미수복지구위원회 未收復地區委員會 Committee for Unreclaimed Provi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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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복지구 관할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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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미수복지구는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지 않고 있는 압록강, 두만강 이북 지역 중 연백북도, 연백남도, 북강주, 즉 2도•1주를 이르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미수복지구위원회는 '중국이 실효지배하는 간도 지역 대부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위해 조직된 단체를 말한다.
역사
1869년 대한제국을 수립하며 한청전쟁을 거친 후 청나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은 후, 간도 지역을 가지고 양국이 벌인 분쟁에서 시작한다.
두만강과 압록강 사이의 간도 지역은 오래전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땅으로, 해당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고 대한제국이 성장함에 따라 양국의 영유권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청나라는 이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하며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 영유권 문제에 관한 협상를 요청했으나, 대한제국은 간도가 역사적으로 자국의 영토임을 내세우며 협상을 거부했다. 아무 진전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던 속 1887년 대한제국 정부는 일방적으로 간도 지역에 행정구역 연백도를 설치하고 양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게 하면서 간도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시도했다.
청나라는 자국 상황도 혼란인 마당에 대한제국의 일방적 지배에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한중변계조약을 체결하며 대한제국이 설치한 연백도를 청이 승인하고 추가적으로 집안 일대[1]를 대한제국이 돈을 지불하여 매입하는 방식으로 국경을 확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 조약도 오래가진 못했는데, 1904년 한러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서 대한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패전하며 러시아가 한중변계조약을 무효화한 것이다.[2] 심지어 대한제국은 한러전쟁의 여파로 8.15 혁명이 발생하여 정국이 혼란스러워졌고 청나라도 신해혁명이 발생하며 양측 모두 간도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게 되며 다시 간도 문제는 묻히게 된다.
이후 1907년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함과 동시에 청나라 역시 무너져 북양정부 중국이 건국된 후 양국 모두 안정화를 거치자 다시 간도 문제가 수면 위에 오른다. 1919년 당시 이동휘 대통령은 기존 대한제국 정부가 설치했던 연백도를 계승한 연백북도, 연백남도를 설치하고 돈 주고 매입한 영토중 하나인 집안 일대에 북강주[3]를 설치하며 국회에 재가를 받아 새로운 강역으로 편입시킨다.
이에 중국 정부는 당연히 반발했다. 당시 존재하던 국제 기구인 국제연맹에 제재를 요청했으나,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였던 대한민국의 위치로 인해 불발된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실질적 지배가 이어지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는 과정 속에서도 한국의 지배는 끊임없이 유지됬다. 오히려 혼란스러워진 중국 정치 상황에서 국민정부 중국이 추축국에 합류하자 대한민국은 만주 전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하기도 한다.[4] 한국이 미국, 영국의 호소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며 국민정부 중국을 공격하면서 한중전쟁이 발발하자 만주 말고도 추가적으로 중국 본토를 잠시나마 지배하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중 간도 지역을 중국이 지배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순조롭게 간도 지역은 대한민국 본토로 편입되나 싶었지만, 문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발생한다. 종전 후 한국은 당연히 중국 본토에서 군대를 철수했으나, 간도 지역은 여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전쟁의 아픔을 뜯어고치던 중국이 1950년 본격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한국을 제소하며 문제가 커진다. 유엔 상임이사국의 자리까지 가지고 미국, 영국, 소련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세계 주요 강대국이던 한국 입장에서 중국의 국제사법재판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다.[5]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간도 지역은 중국의 역사적 왕조 국가의 강역 일부가 맞다.라고 최종 판결을 내리며 상황이 달라진다.
국제사법재판소는 한국이 간도 지역에서 철수하고 새로운 국경 조약을 체결하도록 임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이 판결에 따라 중국은 가장 가까웠던 제3지대 국가들과 함께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끝까지 간도를 수호해야 한다 주장하며 버텼으나, 1959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이기붕이 나란히 쫓겨나며 상황이 바뀌게 된다. 이후 새로 집권한 장면 대통령은 엉망진창이 된 국가 수습 아래에서 간도는 무의미한 영토라 생각했고 신의주 조약을 통해 연백북도, 연백남도, 북강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국경을 확립하며 간도 지역에서 철수한다. 하지만 이 역시 논란이 많았는데, 이미 1919년부터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꾸준한 인구 유입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에 대한 논의 없이 속전속결로 땅을 그냥 넘겨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유입된 난민들로 인해 장면 정부의 민심 악화에 한몫하게 된다. 또한 간도 지역에서 머물던 국군 수 만명이 다시 본토로 들어오는데, 장면 정부는 군대 역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군 내 여론마저 악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정희와 김종필 등의 인물들을 주축으로 5.16 군사정변이 발생한다.[6]
새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2인자 김종필은 즉시 신의주 조약의 효력을 정지하고 간도 지역을 향한 군대 배치에 들어갔다. 중국 정부는 이같은 한국 군부에 행동에 반발하며 역시 군대를 주둔을 시작하고 당시 초강대국이던 미국과 소련은 크게 당황한다.[7]소련은 중국 측에 항의하며 만주 내 소동에 대해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미국 역시 한국 측에 경고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미국의 말을 들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결국 미국은 여기서 초강수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대한 정식 지도자로의 승인을 꺼내들고 한국 군부와 접촉했다. 박정희는 간도보단 정통성이 중요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간도 지역을 향한 군대 배치 중단한다. 이 사건 이후 한국과 중국 양국은 시급한 난민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합의하고 잠시나마 간도 문제를 묻히기로 한다.
그로부터 1973년 전체적인 안정을 찾은 후, 박정희는 다시 간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일단 예전과는 다르게 미수복지구위원회 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권을 넓히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1년 뒤 박정희 저격 사건으로 박정희가 서거하자 기구만 출범한 상태로 간도 영유권 주장은 완전히 셧다운된다.
그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과 각종 정치 문제로 인해 간도 문제는 점차 사그라들게 된다. 그리고 1983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의 탈군부 정책과 북방외교, 평화 외교를 통해 중국과 수교하고 경제적인 교류를 확대하며 양국의 이익을 위해 간도 문제는 사실상 완전히 묻히게 된다.[8]
최근까지도 헌법상의 이유[9]로 미수복지구위원회는 잔존하며 각국의 교류 확대 속에 유지되고 있다. 한중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간도 문제에 대한 강도높은 수위의 주장을 하긴 하지만 현 정치권에선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못하고 있다.
2021년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며 강역의 기준을 국회의 동의 하에 변경할 수 있음의 내용이 들어간 개헌안이 가결되었다. 개헌을 통해 간도 지역 영유권 포기는 가능해지긴 했다. 하지만 각종 정치 문제의 난립 속에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현재 네티즌이나 대부분 사람들 입장에선 전혀 쓸모없는데 왜 유지하는지 모르겠는 기관, 세금 날먹의 대명사로 불리며 완전히 쓰레기, 헐세 낭비 기관 취급을 받는 실정이다. 심지어 2023년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위원장직마저 임명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기능이 정지된 상태이다.
조직도
미수복지역
연백북도
연백남도
북강주
관련 문서
외부 링크
여담
• 혹여나 반환되어 미수복지구에 있는 옛 왕조의 문화유산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기존 정부에서 건축물이 아닌 물건이나, 옮길 수 있는 문화유산은 모조리 본토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논 상태이다. 광개토대왕릉비 등이 대표적 예시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후에는 문화유산 공동 발굴 사업 등이 진행되어 한국의 역사 문화유산은 협의에 따라 한국으로 많이 보내질 수 있었다.
둘러보기
- ↑ 현재의 북강주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당시엔 행정구역이 설치되지 않은 상황
- ↑ 조약 자체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조약은 만들지 않았다. 즉 한중변계조약 체결 이전 상태로 돌아간 셈
- ↑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추가로 편입한 남양주의 반댓말이다. 남녘 남(南) 큰바다 양(洋)인 남양과 북녘 북(北) 영토를 뜻하는 지경 강(疆).
- ↑ 당시 만주 전역을 본토로 편입하자는 의견이나 요동 지역을 본토로 편입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불발되었다.
- ↑ 당시 한국 내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대해 잘 모르고 세계 대전의 승리의 향수 속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기에, 더욱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 ↑ 물론 5.16 군사정변의 시작은 이 사건과 관련이 크게 있진 않다.
- ↑ 당연한것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이제 10년 좀 넘었는데,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강국인 두 국가가 혹여나 이 사건으로 전쟁에 돌입하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 이때 이후로 한중 국경에서 군인이 아닌 경찰이 감시를 맡도록 변경됬다.
- ↑ 미수복지구는 현재 헌법상 강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개헌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