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한국의 군사조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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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대 | |||
육상방위대 | 해상방위대 | 항공방위대 |
방위대 防衛隊 Korea Defense Forces (KD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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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방위대(防衛隊)는 대한국 통위부에서 운영하는 준군사조직이다. 방위대는 국방을 위한 무력의 보유와 행사라는 기치 아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는 주한미군과 함께 한국의 국방을 담당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면서 제국군도 해산되었는데, 당초 미국은 대한국을 소련을 견제하는 반공의 첨병으로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변영태 내각의 외무대신이자 후임 총리대신이었던 장면은 아예 재무장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미군에게 한국의 안보를 맡기면서 경제 성장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장면 독트린).[10]
이미 그 시점에는 1946년부터 시행된 대한국 헌법 제11조에 따라 한국의 육해공군 보유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미국은 끈질기게 존 덜레스(John F. Dulles) 등을 특사로 보내 한국의 재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면은 장면 독트린에 따라 대한은 냉전에 뛰어들지 않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유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결국 1947년,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와 해안경비대(海岸警備隊)라는 준군사조직이 창설되었다. 국공내전에 파병 중이던 미국은 서둘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의 국권을 회복시켰고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한국에서 철수했다. 기존까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은 '주한미군'으로 전환되어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방위대법의 제정에 따라 통합되면서 방위대가 발족하였다.
명칭
1948년 1월 15일 시행된 방위대법에 따라 방위대라는 준군사조직이 창설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방위대를 phòng Vệ Đội (퐁베도이, "방위대")라고 부르지 않고 Lực lượng phòng vệ Hàn Quốc (륵르엉퐁베한꾸옥)[11]이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한국방위역량"이지만 이쪽도 방위대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방위대에서 근무하는 이를 방위관이라고 한다.
역사
군대와의 비교
大韓國憲法 第2章 第十一條 大韓國國民은 自由롭고 平和로운 國際秩序의 건설을 소망하며、國際平和의 유지에 노력하고 侵略的 戰爭을 否認한다。 前󠄁項의 目的을 달성하기 위하여、陸海空軍 戰力은、이를 保持하지 아니한다。 대한국 헌법 제2장 제11조 대한국 국민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국제 질서의 건설을 소망하며,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헌법으로 군대가 아님을 명시한 문장. |
방위대의 태생은 기본적으로 국방경비대(육방)와 해안경비대(해방)에서 출발한 형태이며, 적의 침공 등 고강도의 무장을 요하는, 경찰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만 투입되는 치안 기관이었다. 따라서 방위대의 계급이나 직제에는 '군(軍)', '병(兵)'이 들어가지 않고 '관(官)' 같은 다른 용어로 대체되어 있다. 군인이 아니므로 공무원에게 쓰는 '관'을 쓰는 것이다.
오늘날 정규군을 두고있는 대부분의 국가는 헌법에 군대의 존재 근거와 국가원수가 군 통수권을 가짐을 명시해놓는다. 그러나 대한국 헌법은 한국이 군대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만을 명문화하였으며 법률인 방위대법에만 방위대의 존재 근거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이 방위대에 대한 최고명령권을 가진다는 것을 명시해두었다.
이 밖에 방위대의 애매한 존재를 확정하는 헌법의 조항은 따로 없다.[12] 즉, 헌법을 문장 그대로 해석하여 육해공'군'은 없지만 육해공의 방위 및 치안 유지를 위한 '무력'은 있는 것이며, '국가 교전권'과 자위적 '전투권'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도 아직 장면 독트린이 유효하던 1940년대 당시에는 '경제 성장을 위해 최소한의 국방비만 투자한다'는 철학이 있었으나, 간도방위출동 이후 안보적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점점 적극적인 군비 확충 시도가 이어졌다.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아예 한국의 보통국가화 목소리도 커졌다.
오늘날 방위대가 헌법에 근거를 두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한국 내에서는 보수와 혁신 모두에게서 논란이다. 혁신계의 경우 '방위대가 헌법 9조를 무시하고 운용된다. 방위대는 초법적인 기관인가?'하는 비판이, 보수계의 경우 '헌법 11조의 애매한 정의 때문에 방위대가 무슨 활동을 하려고 해도 항상 논란이 생긴다! 이러다가 한국의 안보에 중대사가 터지면 어떻게 대처하려고 그러나?'하는 불만이 있다. 이에 집권당인 대한독립당의 이명박 전 총리는 개헌을 통해 헌법에 방위대의 존재 근거를 명문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런 어중간한 지위 때문에 벨렌코 중위 미그기 귀순 사건 때도 준전시상태인데 방위대가 경찰로부터 통제를 당하고 사건 현장에 출입도 못 하는 등 다른 국가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경찰과 방위대 간의 알력은 의외로 강하며 방위대 월급의 기준은 경찰관의 월급 기준으로 받는다. 카리브해나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은 별도로 군을 운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방위대처럼 경찰 형태의 조직이 국방 업무를 맡거나, 경찰 내에 특수부대의 형태로 육상 병력을 두거나, 해안경비대가 해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한국은 매우 큰 반도국가라서 단순 비교는 어렵다.
사실 방위대가 준군사조직이라기보다 정규 군대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주장 역시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한국 국내의 법적 지위에 한정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본다면, 방위대는 많은 군사력 통계에서 타국의 군대와 동등하게 취급된다. 세계의 어떤 정보기관이나 외교기관도 한국에 공권력만 있고 군사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방위대가 다른 준군사조직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타국에 국방을 위탁하면서 자국의 기술로 스텔스기와 초음속 미사일을 연구하는 나라는 한국 말고는 없다. 서방 국가(제1세계)의 경우 방위대를 우호 전력의 하나로 계산하며, 반대로 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잠재적 위협으로 분석한다.
국제법으로 가면 더욱 널널해서, 준군사조직도 교전권자로 인정받으며 상비군과 다른 어떠한 제한이 없고,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흔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처럼 간판만 그렇게 단 군대나 다름없다. 미국 등 타국에서도 공식적인 문서가 아닌 일반 서적이나 방송 등에서는 '한국군(Korean military)'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며 군사조직의 일부로 본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대한국 헌법을 개정하여 방위대를 '방위군'이나 '국방군' 등으로 개칭하여 한국의 정식 군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12년 민의원 선거에서 한독당은 총선에서 성공하면 보통의 군에 가깝도록 법제를 고치고 명칭도 '국방군'으로 바꾸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그러나 한국 대다수의 여론은 방위대를 일반 군대로 바꾸는 것에 부정적이다. 2012년에 치러진 민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을 밀어내고 한독당이 압승한 이후로도 아직 개헌에 필요한 2/3선을 확보하는 것은 난망한 상황이었다. 2013년 3월에는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로 인해 흐지부지 된 상태로 논점 자체가 방위대를 국방군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닌 주한미군을 얼마나 더 유치할까로 전환됐다. 한독당의 국방군 전환, 즉 군대 재건 시도는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국들(일본, 중국)은 물론 한국 국내 여론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해 사실상 무산되었다.
그러나 국방군 승격만 무산되었을 뿐, 2014년을 기점으로 방위대의 영문 명칭이 Korea Self-Defense Force(한국 방위대)에서 Korea Defense Force(한국 국방군)으로 변경되고, 충무공급 항공모함의 건조가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는 핵잠수함의 개발까지 추진되고 있다. 방위대의 핵잠수함 보유 시도 자체는 몇 번인가 있었지만 사회당, 민주당 등 혁신 진영의 반대로 전부 무산되어 왔었다. 하지만 중국의 팽창 대만 문제로 인한 이명박 내각의 방위비 증강 방침에 따라 다시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엔 헌법은 그대로 두고 해외에 파병할 수 있는 별도의 군 사령부를 만들자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는 대한독립당의 견해와 달라서 2014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회당은 초기에 방위대 해산을 주장했지만 현재는 방위대의 군대 전환 반대 및 방위대 축소 정도의 온건한 주장으로 선회한 상태이다.
방위대와 일본 국방군의 탄생 과정은 아주 비슷했다. 방위대의 경우엔 경제 발전을 위해 병력 증강에 소극적이던 장면 내각에 의해 경찰의 보조부대인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로 창설됐다. 줄여서 '경비대'라 한다. 경비대의 경우엔 초반에 무장폭동 등에 대응하는 훈련을 했다. 이후 냉전이 전개되며 장면은 최소한의 국방을 위해 방위대를 정식 창설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일본 국방군의 경우엔 본래 미국은 경찰 외에는 따로 일본에 무장조직을 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냉전의 시작과 함께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일본의 재무장을 검토하게 되고, 1949년 중국 대륙의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밀려 하이난으로 옮겨 가면서 위기 의식이 커지자 본격적인 입안에 들어가고 공식적으로 경찰예비대 창설로 이어진다. 일본의 경찰예비대 역시 한국의 국방경비대와 마찬가지로 경찰을 보조하는 무장집단으로 출발했지만 일본의 전술적 역할이 커지면서 사실상 군이 되었다. 심지어 일본제국군(한국의 경우엔 만주군까지) 출신들이 초기에 대거 입대했단 점도 비슷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본 국방군은 정식 군대로 출범하였지만 방위대는 끝내 정식 군대는 되지 못하였다. 이는 지정학과 경제적인 상황이 작용한 덕.
최근 전력 팽창을 이유로 들어 이러한 한국의 기조가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또한 중국 해군력의 팽창에 따라 미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사실상 방위대는 여전히 미국의 보조 개념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봐도 된다.
방위대 기념일은 11월 1일이다. 방위대가 설립된 건 1954년 7월 1일인데 정작 기념일은 11월 1일이다. 그 이유는 태풍 오는 여름에 기념식을 치르면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서 그나마 괜찮은 가을로 날짜를 옮겼기 때문이다. 참고로 1년에 1회씩 돌아가면서 육상대가 주최하는 "육상관열식(陸上観閲式)", 해상대가 주최하는 "관함식(観艦式)", 항공대가 주최하는 "항공관열식(航空観閲式)"를 치른다.
2014년 12월 16일에는 방위대의 영문 명칭을 개정해 Korea Self-Defense Force(한국 방위대)에서 Korea Defense Force(한국 국방군)으로 변경하고, 50조원을 들여 핵잠수함 등 공격용 무기를 대거 개발하거나 도입하기로 하면서 방위대는 방위대라는 명칭만 걸어놓고 완전히 보통 군대화되었다.
수뇌부
내각총리대신 | 통위대신 | 통위부대신 |
---|---|---|
주호영 | 유승민[13] | 윤재옥[14] |
통위정무협판 | 통위사무차관[15] | |
성일종[16] | 임병헌[17] | 박재민 |
최고명령권자는 한국의 내각총리대신이다. 한국 총리대신은 최고명령권(最高命令権)을 가지는데 이는 통수권에 해당한다. 역대 총리는 한국 역대 총리를 역대 방위대신은 역대 방위대신을 역대 막료장들은 방위대/역대 방위총감을 참고할 것.
미군의 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문민통제가 중시되는 한국의 특성상 이들은 서열상 삼군진무의장보다 위에 있다.
지휘부 및 주임원사단
더 자세한 정보는 장성급 장교들은 방위대/장성급 장교 문서를 참고할 것.
본래 방위대는 1948년 창설 이후 육해공 방위대의 방위총감들이 각자 작전권을 행사하는 3군 병립제를 채택했고, 방위총감들로 구성되는 삼군진무회의를 운영해 왔다. 그 수장인 삼군진무의장은 지휘권은 없이 육해공 방위대의 의사조율 역할만 수행했다.
하지만 1988년부터는 삼군진무회의를 상설 합참본부의 역할로 격상시켰고, 삼군진무의장도 총괄적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바뀌면서 지위 및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는 1990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일본의 현행 합동군 체제와 유사하다. 다만 육해공 출신의 비율이 균형적인 일본군과는 달리, 방위대는 육방대 출신이 전통적으로 삼군부의 주요 직위를 독식해왔고, 김승겸까지 역대 삼군진무의장 43인 가운데 39명이 육방대, 1명이 해방대, 3명이 공방대 출신이다.
삼군진무의장 | 육상방위총감 | 해상방위총감 | 항공방위총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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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진무의장 김승겸 | 육상방위총감 김용우 | 해상방위총감 김용우 | 항공방위총감 정상화 |
삼군진무회의 선임특무정교 | 육상방위대 선임특무정교 | 해상방위대 선임특무상사 | 항공방위대 선임특무정교 |
특무정교 이재호 |
특무정교 어윤용 |
특무상사 엄하일 |
특무정교 이원희 |
한국의 방위관들은 정치적 중립이 상당히 중시되므로 정치적 성향이라든가 헌법에 대한 의견을 드러내는 일이 아주 드물다. 현대 한국에서 적어도 방위대 자체는 군국주의적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며 무관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대로 이뤄지는 편이고, 방위대 내부에서 누군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순간 방위대 전체가 뒤집어지기도 한다. 오히려 당사자인 방위대보다는 한국 정치권에서 방위대의 정식 군대화를 밀어붙이며 여러 잡음을 만들어내는 편이다.
육상/해상/항공방위총감은 대장급이며, 최선임계급이름과 보직 이름이 동일하며, 육상/해상/항공방위대의 최선임부사관은 원사에 준하는 특무정교와 특무상사가 맡는다.
제국군과의 연계
1947년에 국방경비대를 모집했을 때 제국군 영관 이상은 공직추방령에 따라 배제했다. 징병으로 끌려간 제국군 사병의 경우에는 배제하면 민간에서 인원 유입 자체가 힘들어서 추방령에서 제외됐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관서에서 1200명을 추천받아 일등병사로 입대시킨 뒤에 간부교육을 하였다. 그러나 내부 출신의 경찰 출신들은 지휘운용 등에서 단점을 보였고 미국은 방침을 바꿔 1951년부터 종전 당시 위관급과 영관급은 중령까지 입대를 허용했다. 1948년에 405명의 영관급과 407명의 위관급 구 제국군 장교 출신들이 채용되었다. 1949년 7월에는 대령급 11명이 특별입대하기도 하였다. 초기 인원은 분명히 군 경력이 없는 경찰 내무관료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1950년대 후반까지 조직을 확대해가면서 육자대의 장교는 제국군 장교 출신의 비율이 절반 이상을 넘게 되었다.
1954년 7월 1일에 육상방위대의 부장은 11명이었는데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내무각료, 즉 내부(만주국 관료 출신 포함) 출신이 3명, 육군무관학교 출신이 11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61년 육자대 중장 진급에서 육사가 5명, 일반이 1명으로 비중이 줄어들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의 중장 진급자를 살펴보면 32명 가운데 내무각료 출신이 1명, 육사가 31명일 정도로 육사 출신들이 강세를 보이게 된다. 1970년대부터는 일반간부후보생의 비중도 좀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내무각료 출신들이 군에서 거의 전역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가면 거의 일반간부후보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육사 출신도 나이 문제로 거의 없게 된다. 1980년대 말에 가면 통위대학교 출신들이 예전 사관학교 출신들의 위상을 차지한다.
해양방위대의 경우 해양경비대를 창설해냈을 때 장교의 98%, 부사관의 99%가 제국 해군 출신이었다. 이는 초기의 해안경비대 자체가 제국 해군의 근간을 사실상 유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항공방위대의 경우에는 주로 제국 육군 항공대 출신들이 주를 이뤘다. 해군 항공대 출신도 참여하긴 했지만 육군 출신들이 많았고 그때문에 해군보단 육군에 가까운 문화가 되었다.[18]
편제
인적 구성
인적 선발
계급
예산
급여
과거 급여
전사자 보상금
정년
교육 및 훈련
방위출동 및 해외 파병 경력
병과
방위대 제복
출신 인물
비판 및 문제점
방위대
육상방위대
해상방위대
항공방위대
핵개발 문제
장비
육상방위대
보병화기
기갑 및 차량
항공기
해상방위대
항공방위대
출신 인물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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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관련 문서
홍보와 모집
창작물 속의 방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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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한독당 내에서 이른바 한독정파에 해당한다. 방위대의 국방군화를 주장하는 쪽은 한독입파이다. 원래는 정파가 전후부터 오랫동안 주류였으나 이인제, 이명박이 장기집권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입파가 당내에서 더 주류가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정파 계열의 주호영이 집권하자 입파의 세가 다시 줄고 있다.
- ↑ 한자로는 力量防衛韓國(역량방위한국)
- ↑ 방위대 자체가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국공내전이라는 비상사태에 미군의 재무장 요구를 타협하면서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대한극 헌법은 1947년 시행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 ↑ 민의원 출신.
- ↑ 민의원 출신.
- ↑ 통위부 내부승진으로 올라오는 문관 측 최고 직급자이다. 제복에서는 삼군진무의장이며 사무차관은 삼군진무의장보다 의전상 앞이다.
- ↑ 민의원 출신.
- ↑ 민의원 출신.
- ↑ 이는 세계 대부분의 공군이 육군 항공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어디나 비슷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