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보블리 (개화)


녹우크라이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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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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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전반기 부의장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제3대 총리
보리스 이바노비치 보블리
Борис Іванович Воблий
출생 1883년 8월 2일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폴타바 현 벨리키 부치키
국적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사망 1946년 3월 24일 (향년 62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한성부 민국대병원
묘소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볼로디스히드 성 안드레아 사도 국립묘원[1]
임기 제3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1922년 4월 14일 ~ 1926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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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올하 보블라야
자녀 2남 2녀
학력 폴타바 신학교
동방연구원[2] / 한국 연구부
종교 녹우크라이나 정교회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2, 3, 4, 5, 7
지역구 오하
소속 위원회 외무위원회
약력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인 학생회 총무
동중국철도 사무차장
프로스비타 사무총장
사할린 우크라이나인 공동체 회장
녹우크라이나 급진당 당수
초대 주한녹오공사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대표
제3대 녹우크라이나 총리
녹우크라이나 외무부장관 겸 부총리
제7대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 전반기 부의장

개요

대중의 의사조차 반영하지 못하는 작자들을 모아놓고는, 누가 누굴 보고 가짜라고 비난한단 말인가. 까마귀는 결코 매가 될 수 없다.[3]
보리스 보블리, 주한녹오대사 재직 중, 우크라이나 SSR이 적통 우크라이나라는 구소련 파한대표단 측의 주장을 논박하며

녹우크라이나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흘루슈코-모바 정부에서 제3대 녹우크라이나 총리를, 안드루셴코 정부에서 외무부장관 겸 부총리를 역임했다.

생애

전반기

1883년 러시아 제국 폴타바 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폴타바에 있는 신학교 두 곳을 졸업한 후 극동으로 이주하였다. 극동에서는 현재의 녹우크라이나 국제관계대학교 의 전신인 동방연구원에서 한국 연구부 소속으로 수학하였다. 또 동방연구원에 입학한 1907년, 같은 우크라이나인 동기인 코스트 안드루셴코, 페디르 다닐렌코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인 학생회를 창립했다. 보블리는 학생회 총무를 맡았다.

동방연구원에서의 연구과정을 수료한 이후 교회에서 사무를 보기도 하고 사할린으로 이사해 우크라이나인 공동체를 이끌며 번역가 일도 하다가 나중에는 동중국철도 사무부에서 근무했다. 동중국철도에서의 사무 업무 이력 덕에, 이후에 우크라이나인 계몽단체인 프로스비타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민족주의 운동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이 발생하자 한국군은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고, 그 과정에서 극동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극동에 우크라이나 민족국가 수립을 시도하였다. 민족주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던 보블리는 블라디보스토크(현 볼로디스히드)에서 민족주의, 자유주의 성향의 급진당을 창당하고 잠시 당수직을 맡았다.

한편, 이반 모졸레우스키유리 흘루슈코-모바가 이끌던 극동 우크라이나 국민의회는 건국의 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한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및 협력을 담당할 적임자를 물색했다. 그 인물에는 동방연구원 한국 연구부에서 수학하고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보블리가 낙점되었고, 그는 1917년 12월 본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임명을 얻어[4] 한국에 녹우크라이나 대사로 파견되었다. 보블리는 국민의회 외교서기였던 페트로 트베르도우스키와 함께 한성에 공사관(현 대사관)을 설치하고 한국의 이승만 외무성총판을 접견해 한국과 녹우크라이나의 수교를 이루어냈다. 보블리는 한성에서 공사로 약 2년을 근무했다.

주한녹오대사관

정계 활동

1919년 12월, 보블리는 주한공사 임기를 마치고 녹우크라이나로 귀국했다. 그는 그가 당수직을 맡았던 급진당 소속으로 1920년 총선에서 사할린 북부 오하 지역에 출마했고, 지역기반과 인지도를 토대로 가볍게 당선됐다. 보블리는 당선된 이후 최고의회 외교위원회에서 위원장직을 맡았다. 1922년,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유리 흘루슈코-모바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에 지명되었고, 최고의회에서 총리 임명안이 가결되면서 그 해 3월 녹우크라이나 제3대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로서 보블리는 녹우크라이나의 외교를 관리하며 한국, 만주와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등 여러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보블리는 1926년 대선에서 보블리는 급진당의 후신인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는 예선에서 2위의 득표율을 기록해 결선에 진출했으나, 결선에서 결선에서 국민전선-진보당[5]의 후보로 출마한 이반 모졸레우스키에게 패배해 낙선했다.

1929년 미국의 검은 목요일과 함께 세계대공황이 불어닥치자 보블리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다소 수정해 수정자본주의적 사상을 내세웠다. 이는 여전히 고전적 자유주의를 고수하고 있던 자유당 주류와 상충되는 의견이었다. 양측의 갈등은 자유당이 국민전선과 인민전선에 밀려 내리막길을 걷던 1930년 대선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자유당 후보인 ㅇㅇ이 예선에서 득표율 3위를 기록해 결선 진출에 실패하자 자유당 지도부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세운 국민전선의 모졸레우스키 대통령을 지지하였으나 보블리는 개혁적 사회주의를 내세운 인민전선의 코스트 안드루셴코를 지지하였다. 이 사건으로 보블리는 당에서 징계를 받게 됐다. 결국 1932년, 보블리 등 자유당 내 사회자유주의 파벌은 주류와의 갈등 끝에 탈당, 사회자유주의 정당인 사회자유당을 창당했다. 보블리는 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1932년 총선에서 보블리가 이끄는 사회자유당은 인민전선에 합류하였고, 자유당의 의석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의 결과를 냈다. 이후 보블리는 외무장관 겸 부총리로 안드루셴코 정부에 입각하였다. 1934년 대선에서 안드루셴코가 대선에 실패하고 우크라이나 국민당보리스 흐레샤티츠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보블리는 직에서 사임하였다. 이후 국민당이 대승을 거둔 1936년 총선에서 보블리는 그가 내리 4선을 한 지역구인 오하에서 낙선했다.

1940년 총선에서 보블리는 사회자유당이 통합된 사회당 소속으로 오하에서 출마해 다시 당선되었고 최고의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고, 녹우크라이나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보블리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한성의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에서 정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민국대학교 대학병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보블리는 오극란인 공동묘지에 뭍혔다가 녹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녹우크라이나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여담

  • 동방연구원 한국연구부에서 수학 중에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주한녹오공사를 지내면서 조금 더 늘었고, 총리와 외무부장관 임기 중 한국과의 외교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대중매체에서

선거 이력

선거 정당 연합 선거구 득표율 비고
1920 총선 급진당 모바블록 오하 지역
1차: 33.9% (1위)
당선
(초선)
2차: 59.8% (1위)
1924 총선
1차: 38.9% (1위)
당선
(재선)
2차: 61.2% (1위)
1926 대선 자유당 - 전국
1차: 28.7% (1위)
낙선
2차: 44.1% (2위)
1928 총선 오하 지역
1차: 35.0% (1위)
당선
(3선)
2차: 53.2% (1위)
1932 총선 사회자유당 인민전선
1차: 29.5% (1위)
당선
(4선)
2차: 54.5% (1위)
1936 총선
1차: 23.7% (2위)
낙선
2차: 47.8% (2위)
1940 총선 사회당 -
1차: 27.5% (1위)
당선
(5선)
2차: 54.1% (1위)

소속 정당

소속 정당 기간 비고
1917 - 1925 창당
1925 - 1932 신설합당
무소속 1932 탈당
1932 - 1937 창당
1937 - 1941 합당
무소속 1941 - 1942 당 와해
1942 - 1946 입당
소속 정당연합 기간 비고
1917 - 1925 -
1932 - 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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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자유주의 진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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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자유주의(녹오) · 경제적 자유주의 · 국민주의(오극란) · 보수자유주의 · 고전적 자유주의 · 자유지상주의 · 기독교 자유주의 · 문화적 자유주의 · 사회자유주의 · 태평양주의 · 시민 내셔널리즘 ·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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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정당 원내 민주연합 · 인민의 종
원외 자유지상당
과거 인민자유당 · 자유당 · 사회자유당 · 민주개혁당
정당연합 흘루슈코-모바 블록
언론 포우나 스보보디
단체 시장경제연구소 · 민주주의재단
극좌 · 진보 · 보수 · 극우

각주

  1. 1992년 이장
  2. 녹우크라이나 국제관계대학교
  3. 우크라이나 속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랴.'정도의 의미다.
  4. 당시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는 본토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의 통합을 추구했고, 그런 의미로 한성에 대사를 파견하기 전에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동의를 구했다. 인민공화국 측은 제 코가 석자였던지라 극동 상황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국민의회의 요청대로 보블리를 대표에 임명했다.
  5. 제2공화국의 진보주의 정당인 진보당과는 다른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