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황제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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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설중매"는 "현대까지 대한제국이 존속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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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4대 황제
소황제 | 少皇帝
이름 이영(李滎)
출생 1965년 1월 19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붕어 1974년 8월 3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향년 8세)
즉위 1971년 8월 16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66년 4월 21일 ~ 1971년 8월 16일
대한제국 제4대 황제
1971년 8월 16일 ~ 1972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상황
1972년 11월 27일 ~ 1974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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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혜종 순황제, 모후 경신순황후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종교 유교 (성리학)
묘호 없음
시호 소황제
(少皇帝)
연호 건무(建武, 1972)[1]
계급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개요

소황제 이철(少皇帝 李哲)은 대한제국의 제4대 황제이며 혜종 순황제의 장남이자 유일한 후손이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으나 친재종인 고조의 찬탈로 일찍 상황으로 물러났으며, 만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사후 대한제국에서는 묘호 없이 시호는 소황제(少皇帝), 약칭 소제로 칭한다. 연호는 건무(建武)였는데,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사용됐는데, 사실상 소황제를 쫓아내고 즉위한 고조가 이 연호를 무효화하여 이 시기의 연도를 이전의 연호인 연경(年景)으로 표기하도록 했고[2] 그 다음 해인 1973년부터 성녕의 연호를 쓰게 하였다.

생애

1965년 혜종의 나이 48세에 혜종 순황제경신순황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혜종은 어렵게 얻은 늦둥이 아들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 소황제가 태어난 즉시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1966년 4월 21일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황태자로 정식 책봉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7년 11월 27일 부황 혜종이 폐암으로 붕어하자 2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보위를 이은 소황제는 나이가 너무 어린데 다가 몸까지 병약한 탓에 모후인 경신순황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즉위 이전부터 경신순황후와 관련된 황족과 인척인 강씨 가문은 권력을 이용해 부정축재에만 몰두했기에 인기가 형편없었다. 게다가 새로 즉위한 소황제의 병세는 좋아지기는커녕 날로 악화되어만 갔고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 몸 상태가 이 지경이니 나라가 조용할리 없었다.

결국 1972년 4월 19일 소황제가 독감으로 쓰러지고,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자 개성에서 강씨 척족과 경신순황후를 규탄하는 데모가 발생했다. 이에 순황후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황실예전을 개정하여, 황사(皇嗣)를 택현(擇賢)할것을 공포한다.

당시 종법상 최근친은 상친왕이었으나, 상친왕이 정신병을 앓고 있어 이는 수포로 돌아갔고, 제친왕(훗날의 제경군)과 한경군(훗날의 고조)가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었다. 이중 제친왕은 행동이 방탕하고 부패하였으며 군인 신분임에도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민간인을 폭행해 황실의 골칫덩이 신세였다. 반면 한경군은 젊고 황족 중 유일한 고등문관시험자일 정도로 총명하고 유능했고, 품행이 단정하여 어릴 때부터 왕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제친왕의 부인 강씨는 경신순황후와 같은 진주 강씨로 순황후와 제친왕은 이미 연줄이 있어, 순황후와 황실의 전횡을 묵과할 것이라는 약조를 받았고, 순황후와 황족 대다수는 제친왕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한경군은 고등문관시험 출신 경찰 커리어조답게 경찰과 관료조직의 지지를 받았고, 제친왕의 횡포로 망신을 산 군부 또한 한경군의 편에 섰다. 결국 황사 책봉 문제는 황실의 지지를 받는 제친왕과 관료와 군부의 지지를 받는 한경군의 대립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병석에 누운 6세의 어린 황제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섭정을 담당하던 태후가 제친왕에게 기울어지며 끝난다. 결국 9월 19일, 황사를 공포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대다수 사람들은 제친왕이 황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렇게 밀릴 수 없었던 한경군과 군부는 결국 비리 문제와 각종 군기문란의 혐의로 제친왕을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9월 18일 아직 까지 유지되던 계엄 하에서 정보사로써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3] 한경군은 군인 신분이던 제친왕을 체포하고 순황후를 별궁에 유폐시켰다.[4]

다음날인 9월 19일 한경군은 문무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사 자리를 차지했다.

결국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소황제는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한경군에게 양위하였다. 한경군은 전례에 따라 3번 사양하는 절차를 거친 뒤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성녕으로 하였는데, 사후 고조로 불리게 된다. 이에 따라 소황제는 상황으로 물러났다.

상황으로 물러난 소황제는 갑작스러운 소아마비로 인해 2년 후인 1974년 8월 3일 8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실권도 없는데다가 밀려난 왕이라 그런지 고조는 묘호도 올리지 않고 '소황제'라는 시호만 올렸을 뿐이었다.

평가

여담

가계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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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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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조의 즉위 후 건무 연호를 사용했던 것 자체가 취소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본문을 참고할 것.
  2. 이에 따르면 1972년은 연경 52년이 된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로 새 연호를 쓰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개원이나 황제의 붕어 등으로 대체된 기존 연호를 일부러 계속 쓰는 것을 전문 용어로 '습용'(襲用)이라고 한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삼국지에서 연초에 조조가 죽고 몇 달 뒤 한-위 선양이 일어난 220년에 건안 연호가 폐기되었는데, 촉한ㆍ동오는 220년에 연호를 바로 바꾸지 않고 습용했다.
  3. 1933년 5.16 사건으로 군부가 득세한 이후, 이강과 혜종은 군부를 감시하기 위해 기존의 감시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을 통합하여 정보대에 집중시켰다. 이에 따라 계엄 시 의무적으로 설치되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장은 정보대의 수장인 정보사가 겸임했고, 한경군은 손쉽게 국내외의 정보를 장악하고 군대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4. 현재까지도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는 9.18 총격 사건이 제경군과 연관된 정치자금 수사를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에서는 당시 황실 여론상 황위 계승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던 고조가 9월 19일에 공포하기로한 (사실상 제경군으로 결정된) 황사(皇嗣) 책봉 공포를 무산시키고 황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제경군과 경신순황후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소황제를 반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