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상록수)

이 문서는 상록수의 공식 설정입니다. 관계자 외 이용을 금지합니다.
문서의 모든 내용은 허구이며, 범죄 사실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 펼치기 · 접기 ]
제1-3대 제4대 제5-9대 제10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제11·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제20대
안희정
고조선 · 부여 · 원삼국 · 고구려 · 백제 · 가야 · 신라 · 탐라 · 발해 · 태봉
후백제 · 후삼국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건준
안희정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안희정
安熙正 | Ahn Hee-jung
출생 1964년 12월 1일[1] (59세)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
사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391 숭인상가아파트 (숭인동)
관저 세종특별시 다솜로 261 (다솜동)
재임기간 제20대 대통령
2022년 5월 10일 ~ 현직
서명
링크 | |
| | |
[ 펼치기 · 접기 ]
본관 순흥 안씨[2]
등록기준지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마산4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연무로 380)
부모 아버지 안동근, 어머니 국중례
형제자매 형 안희돈
누나 안향미
여동생 안향선, 안향숙
배우자 민주원
자녀 장남 안정균 (1993년생)
차남 안형균 (1996년생)
학력 구자곡국민학교 (졸업 / 45회)
연무중학교 (졸업 / 18회)
남대전고등학교 (제적)[3]
성남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 / 학사)
병역 전시근로역 (수형)
종교 무종교
신체 175cm, A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20[4], 21[5]
약칭

개요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

약력

  • 1989년 통일민주당 김덕룡 국회의원 비서관
  • 1990년 민주당 이철 사무총장 비서관
  • 1994년 민주당 이수인 국회의원 비서관
  • 19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
  • 1997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비서
  • 1998년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장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비서실 정무팀장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 2003년 새천년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 2003년 열린우리당 논산계룡금산지구당 창당준비위원장
  • 2005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
  • 2008년 민주당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위원장
  • 2008년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
  • 2009년 민주당 행복도시원안사수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 2010년 제36대 충청남도지사(민선 5기)
  • 2010년 충남도립대학교 이사장[6]
  • 2010년 충남테크노파크 이사장[7]
  • 2014년 제37대 충청남도지사(민선 6기)
  • 2015년 제9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감사
  • 2016년 더불어민주당 참좋은지방정부위원회 위원장
  •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 (최종 2위)
  • 2018년 제20대 국회의원 (충남 천안시 갑 / 더불어민주당)
  • 2020년 아시아문화경제진흥원 고문
  • 2020년 제4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 2020년 민주연구원 이사장[8]
  •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 더불어민주당)
  •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경선 1위)
  • 2021. 10. 10. ~ 2022. 3. 9. 제20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당선)
  • 2022.5.10. ~ 현재.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일생

유년 시절

주민 등록상으로 안희정은 1965년 5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아버지 안동근, 어머니 국중례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이자 셋째로 태어났다.

철물점과 농사를 겸했던 안희정 일가는 그다지 어렵게 지내지는 않았다. 안희정의 조부는 강경 포구에서 객주점을 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는데 가세가 점점 기울어 선친이 땅을 처분하고 마산리로 옮겨오면서 논산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버지인 안동근은 마을에 유일한 만물상을 운영하며 남 부럽지 않게 아들을 키워왔다. 어머니 국중례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어린이 대상 월간잡지를 정기 구독시켜주고 세계명작동화전집을 사 주었다. 안희정의 책 읽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안 위원은 지금도 '한국사이야기' 시리즈가 12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정도로 전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책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안희정이 단순히 명작동화 탐독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 서적으로 진화한 것이 사단이었다.

이름인 '희정'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좋아하던 아버지가 '희'자 돌림의 항렬자를 쓰고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인 정희(正熙)를 뒤집어 희정(熙正)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이 영향을 끼친 듯, 어린 시절의 본인을 박정희 유겐트로 표현하며 꿈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의 안희정이 체격도 좋고 어릴 적부터 탁구, 야구 등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 '논산훈련소' 각개전투 훈련장이 있던 후문 쪽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군가를 자장가'로 여기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핸드볼부로 활동하면서 학생회장에 뽑힐 정도로 소문난 우등생이었다. 보이스카우트를 겸하며 절도와 개방적인 생활 태도를 배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하다고 동네에서 촉망 받으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잠시 다닐 때까지 늘 반장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맡았다. 안희정의 중학 시절은 '정규교육'의 클라이맥스였다. 여전히 후보였지만, 핸드볼에 이어 중학교 때는 농구부에 입문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보이스카우트 활동도 계속됐다. 문무를 겸한 '소년 안희정'은 독서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단순히 삼국지와 같은 경서를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학생회장을 맡아 졸업생 대표로 상을 받았다

1979년 돼지 파동으로 가산이 부침을 겪자, 그의 가족들은 서울 신림동의 단칸방으로 갔다. 형 안희돈과 누나 안향미, 그리고 그는 대전에 유학해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5.18 민주화운동을 보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비단 충격을 받은게 문제가 아니라, 직접 연루되었다. 대전의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만난 충남대 운동권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조직 활동을 하던 중 경찰에 체포돼 입학 6개월 만에 제적됐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폴 사르트르의 책 구절 중 '지식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창녀다'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들어서서는 교과서를 전부 팔아버리고 사상계 등의 잡지와 사회과학 서적만을 읽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권과 몰려다니는 그였음에도 항상 1, 2등을 놓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학력 과정은 묘한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왔다. 그는 직접 대전 지역의 지하 잡지인 '평천하' 발간에 동참하기도 하였으며, 교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뭘 아느냐'라고 물었을 때,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위의 불온 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합동수사부에 걸리자 사실상 제적[9]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는 '선생님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라며 가르쳐 놓고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저를 이렇게 짜르려 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자퇴 이후에는 농사일이나 돕고 있었는데, 가을 추수가 한창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너 고등학교 안 가면 내가 죽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안희정의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희정 본인도 전통적인 효(孝)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터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뜻에 순순히 따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지 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부모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다시 자퇴하고 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안희정은 본인의 누나가 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제일교회의 '형제야햑'에서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혁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다.

일단 혁명은 해야겠으니 혁명 서클에 가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혁명 서클은 대부분 대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17살 청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81년 서울에서 벌어진 '국풍81'이라는 대학생 축제 때 유인물을 뿌리는 등 운동에 계속해서 참여했지만,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에 안희정은 "집단의 힘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학생 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에 간 이유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동기였다.

청년 시절

어디까지나 학생 운동을 위해 입학한 안희정은 학부 과정에 충실히 임하지 않고, 지하 서클 활동에 전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이불 한 채 메고 고향을 떠나왔면서 일곱 식구가 자취방에서 자야 했는데 드러누울 수 없었고, 돈 자체가 없어 차비도 쓸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 현 영부인인 민주원을 만나면서 가난한 청춘이었지만 수업을 같이 듣고, 다방에서 3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학내를 걸으며 데이트했던 추억이 생생하다고 표현했다.

이후 운동권 생활을 이어가다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으로 수감되면서 제적되었고, 출소 이후 정치에 입문하면서 대학은 계속 휴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두번째로 수감되어 악명높은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서 안희정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 청년 안희정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 경찰의 심문이었다. 취조실에서 안희정에게 "그래, 네가 혁명 해서 권력 잡았다고 치자! 그럼 너 농업정책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외교정책은?" 하는 식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낱낱이 던졌는데, 안희정은 저런 기초적인 질문에 변변한 답변도 하지 못했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곤 그저 갖고 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미국과 잡았던 손을 끊고 자립경제로 간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었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은 충만했지만 그래서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에 이어 정신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안희정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도 한 달 간의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돌아보며 ‘능력이 달리고 스스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리는 절대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또 옥바라지를 해준 민주원과의 관계가 진전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후 잠깐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복학하여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정치 입문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2월에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였던 김영춘이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김덕룡 의원실을 소개해 주었다. 안희정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대부(代父) 같은 빛바랜 이름을 버리고 민주화운동의 조력꾼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여서, 야당 의원 비서로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민주원과 결혼하기 위한 준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 그가 국회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실망과 참담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안희정이 입사한 지 10개월이 지난 때 첫 국정감사가 열렸다. 당시에는 노트북이 없어서 대정부 질의서를 모두 손으로 썼는데, 그러다 보니 국정감사 기간에는 밤을 새워 일해도 당최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안희정에게 참기 힘들었던 점은 ‘이런 것이 국가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란 회의감이었다. 질의를 위한 질의,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해 까만 밤을 불태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를 몹시 부끄러워 했다. 지난 신문을 뒤지며 뻔한 주제의 질문을 의원들이 던지고 기자들은 이걸 쭉 받아쓰고 이것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같은 당이었다면 이야깃거리조차 안 되는 일을 갖고 여당과 야당 의원이 연일 싸우는 것도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정책과 노선은 없고 패싸움으로 점철된 정당정치, 그들만의 정치에 회의와 환멸이 교차했다고 회고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여 꼬마민주당에 참가하며 버티려 하다가 당시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자 견디지 못하고, 1992년에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년 정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대학도 복학한 끝에 마침내 졸업했다.

당시 서른을 앞두고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이미 다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뒤여서 같이 캠퍼스를 누비며 어울릴 사람도 별로 없던 와중에 교정의 벤치에 앉아 쓸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사색을 많이 하고는 했다. 3당 합당 때, 노무현도 3당 합당에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 즉, 이 시점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거의 처음부터 행적을 동반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93년, 같은 의원실의 강원도 출신의 이광재가 지방자치연구회로 안희정을 끌어들였다. 이후로 1994년부터 노무현 캠프로 들어가며 지금의 안희정을 세운 사실상의 첫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1년 당시 노무현의 보좌관을 맡으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함께 좌희정 & 우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무현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었지만, 정작 참여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더군다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 공직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노무현은 안희정의 출판기념회 축사 영상을 찍으면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나는 뭐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노무현의 지시로 대선자금을 총대맸다지만, 어쨌든 1심에서 징역 2년 6월 및 추징금 13억 1천만 원이 선고됐으며, 2심에서 징역 1년 및 추징금 4억 9천만 원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실형을 살게 되었다. 이때의 충신 모습이 오늘날 유권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 아주 유명하다.

당시 재판 과정이 인상적인데, 최후 진술의 경우 보통 감형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희정은 "자신을 엄벌에 처해서 승자도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게 해달라."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또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채우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직후인 2005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산하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연구위원직을 역임했다. 2006년에 노무현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2007년에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입집행위원장직을 맡아, 참여정부 재평가 작업을 수행했다. 2008년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의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상술한 선거법 위반 전력이 발목을 잡아 낙천됐다.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노무현을 수사하면서 출소한 직후에도 박연차로부터 백화점 상품권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자살로 수사가 전격 종결되면서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

민선 5기 충청남도지사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선거결과는 상당히 접전이었는데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의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2위를 기록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와 고작 20,023표 차이(2.30%)였다.

안희정 지사의 고향인 논산에서 박상돈 후보를 22,497표 차이로 이겨서 당선될 수 있었다.

임기 동안 민선 5기 안희정 지사가 도민에게 약속한 공약 이행도에 대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평가결과 민선 5기 4년 내내 전국 최우수 등급인 ‘SA’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주요 공약

  • 6대 정책과제
* 3대혁신
 *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가는 「행정혁신」
 * 주민이 주인 되는 「자치혁신」
 * 농어촌에 희망 주는 「3농혁신」
* 3대 행복과제
 * 자영업에서 기업까지 「행복한 성장」
 *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행복할 권리」
 * 도랑에서 서해까지 「행복한 환경」

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

제20대 국회의원

당권 장악

제21대 국회의원

안희정 정부

평양무인기 사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국지전이 발생하자 행정안전부 장관 윤석열이 안희정 대통령에게 비상 계엄을 제안했다가 거부 당하자, 단독으로 군을 움직이려고 했던 김용현-윤석열 내란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비판 및 논란

평가

대선 공약

다른 정치인과의 관계

사건 사고

여담

각종 타이틀

가족 관계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9 - 1990 정치 입문
1990 탈당[10]
1990 - 1991 창당
1991 - 1995 합당[11]
1995 - 1997 합당[12]
1997 탈당[13]
1997 - 2000 입당
2000 - 2003 합당[14]
2003 탈당[15]
2003 - 2004 창당
2004 -2006 제명
2006 - 2007 복당
정계 복귀
2007 - 2008 합당[16]
2008 합당[17]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18]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19]
2015 - 현재 당명 변경

선거 이력

어록

노력과 열정이 인정받고 정당한 대가로 돌아오는 사회. 다양한 도전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되는 사회. 특권과 반칙이 없는 나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러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제가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바란 것은 단지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자는 공동체주의였고 독재권력과 천박한 자본의 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 정신이 사회의 작동원리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으며 분단된 약소국인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우리는 오랜 기간 힘의 크기에 따라 계급을 결정짓는 남성 중심의 권력 질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폭력, 희롱 그리고 차별이 난무해왔습니다. 나 안희정은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사회관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저술 활동

저서

방송 출연

각종 매체에서


  1.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65년 5월 1일이다.
  2. 1파 양공공파. 29세손 희(熙)○ 병(炳)○ 항렬.
  3. 명예 졸업장 수여
  4. 충청남도 천안시 갑.
  5.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6. 충청남도지사가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직책
  7. 충청남도지사가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직책
  8.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직책
  9. 교사와 부모님의 간곡한 애원으로 전학은 갈 수 있는 자퇴
  10. 3당 합당에 대한 반발.
  11.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
  12.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
  1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한국당-통합민주당 합당 반대)
  14. 새천년민주당에 흡수합당
  15.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16.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
  17. 민주당과 신설 합당.
  18.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
  19.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