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합중국 제1-3대 연방총리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 Yamamoto Isoroku
출생 1884년 4월 4일
일본 제국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사망 1965년 4월 18일 (81세)
일본 니가타주 니가타시 아키하구
묘소 일본 니가타주 니가타시 야마모토 이소로쿠 기념관
국적 일본 제국 → 일본
재임 기간 제1대 연방총리
1948년 8월 15일 ~ 1952년 8월 14일
제2대 연방총리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제3대 연방총리
1956년 8월 15일 ~ 1960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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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친부 타카노 사다요시, 친부 타카노 미네코
양부 야마모토 요시미치
형제자매 6남 1녀 중 5남 (친가), 1남 2녀 중 장남 (양가)
배우자 야마모토 레이코
자녀 2남 2녀
장남 야마모토 요시마사
차남 야마모토 타다오
장녀 야마모토 스미코
차녀 야마모토 마사코
학력 일본해군병학교 (졸업)
하버드 대학교 (연수)
니가타대학 (정치외교학 / 학사)
종교 신토
신체 165cm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 2, 3
지역구 호쿠리쿠주 제7구
최종 당적 무소속
약력 주미 일본대사관 주재 해군무관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자유 일본 군정사령관
일본합중국 연방총리
일본합중국 국방군 명예원수
군사 경력
임관 일본해군병학교 (1914년)
복무 일본 제국 해군
1901년 ~ 1942년
자유 일본 해군 연합함대
1942년 ~ 1947년
일본합중국 해군
1947년 ~ 1948년
최종 계급 해군 원수
지휘 사령장관
참전 러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회군
작전명 구원
서훈 국화장(菊花章, 2등급)
욱일장(旭日章, 1등급)
서보장(瑞宝章, 1등급)
금치훈장(金鵄勲章, 1등급과 2등급)
대독일국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미국 최고사령관 훈공장
영국 바스 훈장 대십자장

개요

일본합중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

일생

1919년에 주미 일본대사관 주재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당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를 받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이후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떄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직접 보고 느낀 뒤 친미파로 성장하였고, 이후로도 일본 내 대표적인 친미파로서 삼국동맹에 반대하였으며 진주만 공습을 반대하였다. 미국과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에 맞서 전쟁을 반대하였으나, 전쟁이 결정되고 일왕까지 승인하자 쿠테타를 계획했고 나구모 주이치, 도고 후미마로 등 해군 내 조약파들과 함께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도고 후미마로와 친분이 있던 육군 내 반전파들을 소개받아 접촉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츠노다 토모시게 육군 소좌를 필두로 한 육군의 반전·반내각 세력과 힘을 합치게 되었다.

쿠데타 계획은 해군은 진주만 해군기지까지 접근한 후 진주만에서 맥아더 장군, 루즈벨트 대통령, 니미츠 장군 등 미군 주요 수뇌부들에게 전보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호소하고 미국과 같이 일본을 공격하는 한편 육군은 도조 히데키 이하 일본군 장교들을 처단한 뒤 다카히토 친왕이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는 것 이였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군 수뇌부와 접촉하는 한편 "적은 나가타쵸에 있다!"라는 연설을 통해 휘하 장병들이 동요하지 않고 계획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였고, 1941년 12월 7일 미군 수뇌부와의 접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일본 전체 해군의 40%에 달하는 연합함대와 미 태평양함대는 서로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미국 정부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일본의 임시 국가 지도자로 대우하며 신 일본 건국 계획을 승인하였고 일본제국 본토 공격 작전인 최종 계획 작전명 구원이 1942년 1월 1일 개시되었다.

이후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육군 반전파들이 도조 히데키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고, 회군을 결정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본토 내 반전 세력과 연합하여 군부 세력과 교전을 치루었다. 동시에 규슈 남부와 도쿄 만으로 100만여명의 보병이 상륙하였으며 상륙지를 제외한 일본의 군사지역은 7500여대의 폭격기로 융단폭격을 가했다.[1] 공격이 가해진지 반년만에 일본 열도 50% 이상이 반전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대부분의 구일제군은 신일본군에 투항하였고 일본 국민들 또한 구일제이 아닌 신일본을 지지하여 사실상 일본 제국은 패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가 일본제국 국가원수 자격으로 무조건 항복하였고 이후 즉시 일본군 항모 아카기에서 패전조약이 맺어졌다.

선거 이력

각주

  1. 신일본의 재건을 위해 민간지역에 대한 공격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