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Communist 1968/2

라트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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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Union der Sozialistischen Räterepubliken
국기 국장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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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국가 인터내셔널가
국조
독수리
국목
참나무
국화
해바라기
역사
독일 11월 혁명 1918년 10월 29일
독일 1월 혁명 1919년 1월 5일
라트 연방 수립 1922년 12월 30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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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베를린 (Berlin)
북위 52° 31′ 7″ 동경 13° 24′ 29″
최대 도시
면적
내수면 비율
접경 국가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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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억 6,795만 9,795명 (2024년, 세계 3위)
인구 밀도
출산율
1.77명 (2023년)
기대 수명
82세 (2023년)
인종 구성
게르만족 (49.27%)
슬라브족 (35.14%)
유대민족 (4.34%)
기타 (11.25%)
민족 구성
독일인 (44.3%)
러시아인 (11.7%)
폴란드인 (9.4%)
우크라이나인 (8.4%)
네덜란드인 (4.9%)
유대인 (4.3%)
기타 민족 (16.8%)
[ 기타 민족 | 펼치기 · 접기 ]
헝가리인 (2.8%)
벨라루스인 (2.5%)
체코인 (1.6%)
아제리인 (1.6%)
프랑스인 (1.4%)
핀란드인 (1.3%)
슬로바키아인 (1.2%)
조지아인 (1.0%)
아르메니아인 (0.8%)
리투아니아인 (0.7%)
라트비아인 (0.5%)
슬로베니아인 (0.4%)
에스토니아인 (0.3%)
페로인 (0.1%)
기타 (0.9%)
연방 공용어 없음 (사실상 독일어)
연방 중점언어 독일어 · 러시아제어(러시아어 · 벨라루스어 · 우크라이나어) · 폴란드어 · 네덜란드어 · 이디시어 · 헝가리어
기타 지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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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국교 없음 (세속주의)
분포 무종교 (71.0%)
기독교 (22.6%)
회교 (3.7%)
유대교 (2.0%)
기타 (0.7%)
군대 붉은 군대
HDI 0.927 (2023년, 세계 16위, Sehr hoch)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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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체계 중앙집권제적 요소를 가미한 연방제
연방 공화국 4개 연방 공화국
일반 공화국 21개 일반 공화국
자치 공화국 3개 자치 공화국
해외 자치령 2개 자치령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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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민주집중제, 양원제, 이원집정부제 (실질적으로 내각책임제), 사회주의 형법, 성문 헌법
공식 통치 이념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
민주주의 지수 9.70점[1]완전한 민주주의 (2024년)
의장
(국가 원수)
오스카 라퐁텐
(Oskar Lafontaine)
서기장
(행정 수반)
자라 바겐크네히트
(Sahra Wagenknecht)
입법부 연방 참사원 (상원)
최고 라트 (하원)
유일 정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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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사회주의 경제
GDP
(구매력)
$28조 9,190억 6,416만 | 세계 1위 (2024년)
1인당
$78,593 | 세계 2위 (2024년)
GDP
(명목)
$19조 6,729억 2,197만 | 세계 1위 (2024년)
1인당
$53,473 | 세계 10위 (2024년)
수출
입액
수출
수입
국부
화폐 라트 연방 탈러 (RTL,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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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GMT+00:00 (페로 표준 시간대)
GMT+01:00 (중부 표준 시간대)
GMT+02:00 (동부 표준 시간대)
GMT+03:00 (서러시아 표준 시간대)
GMT+04:00 (캅카스 표준 시간대)
차량 통행 방향 오른쪽 (우측 통행)
도량령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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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일 1945년 10월 24일 (창립국)
대조수교일 1948년 8월 15일
주조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88
ccTLD
.ru
국가 코드
RU, USR, 810
전화 코드
+7
위치
라트 연방 지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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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독일어: Union der Sozialistischen Räterepubliken 우니온 데어 조우페레너 레테레푸블리켄[*]), 줄여서 라트 연방(독일어: UdSRR 우데에스아르아르[*])은 중부 유럽동유럽에 위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상세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손안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안에 집중시키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생산력을 높이게 될 것이다. (...)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를 전제적으로 침해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즉 경제적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운동을 거치는 동안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생산 양식 전체를 변혁하는 수단으로 꼭 필요하게 되는 방책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2장 中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2]이며 현재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을 추동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종주국가이다. 대사상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국가 사상은 헤겔-마르크스의 철학과 국부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치 철학을 조합하여 정립된 이론인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이다.

1919년 1월 일어난 1919년 독일 혁명을 계기로 하여 설립된 독일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을 모태로 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은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치러진 흑적내전에서 구 독일제국 세력인 흑군을 패퇴시키고 독일 전체를 통일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 3개국을 합하여 평의회 연방을 설립했다. 초기 국가체는 사실상 외교권과 국방만이 통일된 국가연합에 가까웠으나, 1930년대 대테러를 거치면서 중앙집권제적 성격이 강해졌다.

현재와 같은 판도를 갖춘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미텔 오이로파 정책으로 동유럽과 서유럽의 여러 국가를 병합하면서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성공적 전후 경제개발에 성공한 라트 연방은 1968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정치적 개혁 역시 달성했다. 전후 약 30년간 미국 및 제국주의 진영과 치룬 냉전에서 승리한 라트 연방은 현재까지 유일한 초강대국이자 세계 최대의 강대국, 세계 사회주의의 요람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대외 영향력 외에도 문화, 스포츠 방면에서 창성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며, 우주 개발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잡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로 공식적으로 5개의 시간대와 200개 이상의 민족을 거느리고 있다. 수도 및 최대 도시는 베를린이며, 그 외에도 , 키예프, 바르샤바, 크라카우, 브레슬라우, 임마누엘 칸트 슈타트(옛 쾨니히스베르크), 레닌스부르크(옛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라스노다르, 프랑크푸르트, 쾰른, 뮌헨, 부다페스트, 프라하, 브라티슬라바, 민스크, 헬싱키 등을 주요 도시로 꼽을 수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로는 서쪽의 프랑스, 남쪽의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쪽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동남쪽의 신유고연방,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고 동쪽의 러시아가 있다. 라트 연방은 이들 국가와 카틴 조약기구코민테른을 구성하여 친근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라트 연방 헌법은 세계 혁명의 완수와 함께 국제 사회주의 연방의 설립을 통한 완전한 국가체의 소멸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혁명 및 생산수단 발전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라트 연방은 자연스럽게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국가로서 기능을 정지하게 될 것이다.

상징

국호

공식 국호는 Union der Sozialistischen Räterepubliken, 직역하자면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혹은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다. "Rat"는 독일어로 평의회를 의미하며, 특정한 지명이나 민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의회 연방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독어 원문을 살려 라트 연방, 줄여서 라련이라 표시한다.

해외로 국명을 번역할 때에는 "평의회"를 번역하는데, 가령 영어로는 Union of Councils로 번역한다.[3] 독어 약자는 UdSRR이며 영어로는 USRR이다. 혹은 Ratsunion(라츠 우니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라트 연방의 법통을 부정하는 우익 세력에서는 독일(Deutschland, Germany)라고 부른다. 이는 라트 연방이 게르만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로 출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트연방 입장에서는 라트 연방이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체코, 벨라루스, 러시아, 발트3국, 우크라이나 등 여러 민족들의 자주적인 연합이라 주장하고 있다.

국기

국기
(붉은 별이 달린 낫과 망치)
민간기
(흑적황 삼색기)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기는 깃봉에 가까운 상부 구석에 금색의 낫과 망치, 그리고 금색 테두리를 두른 붉은색 별이 포함된 적색 혹은 홍색의 천으로 구성된다. 세로와 가로의 비율은 1:2이다.
1922년 라트 연방 헌법 제71조

기존 독일의 국기였던 흑적백 삼색기(이른바 황제기)는 1922년 흑적내전을 통한 독일제국의 멸망으로 사용이 금지되었고, 1922년 헌법을 통하여 빨간 바탕황금색 낫과 망치 그리고 붉은별이 들어간 깃발을 국기로 명시하였다. 세부적인 디자인은 여러차례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도안은 1972년 제23차 당대회를 통하여 확정된 것이다.

그 외에 민간기로 이른바 흑적금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흑적금기는 1848년 독일 혁명 당시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한 깃발로, 독일어권에서 공화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독일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폴란드, 헝가리 및 여타 슬라브어권에서는 사용되는 일이 드물다.

국가

인터내셔널가
Die Internationale
라트 연방 국가
Nationalhymne der Ratsnion


공식적으로 두개의 국가가 지정되어있다. 하나는 인터내셔널(Die Internationale)이며, 다른 하나는 라트 연방 국가(Nationalhymne der Ratsnion)이다.

초기에는 여러 노동가요가 국가처럼 사용되었으나 국가의 통일성을 느낀 정부는 1922년 헌법 제정과 함께 인터내셔널가를 국가로 제정하였다. 인터내셔널가는 국제 노동자의 상징과 같은 노래이다. 이후 사회주의 혁명이 전세계로 확대되고,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애국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었던 라트 연방 측에서는 보다 애국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차원에서 라트 연방 국가를 새로이 만들어 두번째 국가로 제정하였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하나만 불러야할 때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지만, 연방 정부의 행사가 있을 때에는 라트 연방 국가를 먼저 부르는 것이 관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 연방 구성국마다 다른 노래를 자신의 국가로 추가하고 있다. 각 구성국 정부 행사 때에는 그 구성국의 국가를 먼저 부른다.

국가를 부르기 전에는 "국가를 향한 경례"를 했으나,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때 비판받았고 1976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표어

역사

1910년대: 구 제국의 모순과 혁명

1870년 보불전쟁을 통해 성립된 독일제국은 외양상으로 유럽에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처럼 보였다. 군사력은 세계 2위였고, 육군력은 프랑스와 영국을 합친것만큼 강대했다. 또한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재 아래 국가자본주의가 도입되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업화는 동시에 여러 사회적 모순을 야기했다. 우선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한대로, 자본가 계급은 산업화 하에서 급속하게 부를 축적했지만, 절대다수 농민들은 농업의 산업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빈곤층으로 전락하거나 노동자 계급으로 전화되었다. 도시 노동자 계급은 빈곤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했다.

결국 독일제국의 성립은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 대립을 필연적으로 야기한 것이었다. 독일 제국은 사회보험 제도 등 일부 사회적 개혁을 도입했으나, 이는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 시기의 사회 보험 제도는 노동 계급의 불만을 다소 완화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변혁이 아닌 자본주의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빌헬름 2세

이러한 모순을 내재한 채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었으므로 독일제국은 여러차례의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 시기에 들어 비스마르크 시대의 현실주의(realpolitik)를 포기하고 세계정치(Weltpolitik)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세계정치는 실질적으로 독일의 제국주의, 즉 자본의 수출이었다. 독일 제국 말기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군국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독일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의 식민지 확장을 추구했고, 이를 위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 이는 독일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더욱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국제적, 외교적 대립을 더 심화시켰다.

게다가, 독일은 외양상으로 의회제를 선택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구 봉건시대의 귀족과 일부 재벌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황제는 마음대로 총리를 임명, 해임할 수 있었고 의회를 해산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이 시기 사실상 전제군주제 처럼 작동하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결여된 채,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억압되었음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 시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정치적 자유와 노동운동을 억압했으며, 이는 노동 계급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모든 체제 모순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성급히 전쟁에 참여한 채 사실상 패전하는 결과에 이르게 하였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 등 군국주의적 정책을 수립하였고,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사회민주당(SPD)의 총파업을 무력진압했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전쟁에서 독일은 승리할 수 없었다. 전쟁은 기약 없는 참호전으로 귀결되었고, 자원이 바닥난 독일제국은 "순무의 계절"이라 부르는 혹독한 기근에 접어들게 되었다. 보다못한 독일 해군 수병들이 1918년 11월 봉기한 킬 군항의 반란으로 연쇄혁명이 일어나 독일 전역에서 전쟁 반대와 황제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주하려다가 혁명군에게 붙잡혀 포로로 구금되었고, 독일제국은 멸망하여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를 1918년 독일 혁명이라 부른다.

1919년 독일 혁명

뒤이은 1919년 1월, 부르주아 혁명에 이른 사회주의 혁명의 즉각이행을 주장한 독일 사회민주당 다수파에 의해 1919년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주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였다. 공화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이들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의 이행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혁명은 사실상 무혈로 끝났다. 그러나 베를린 밖에서는 귀족과 재벌이 이에 반대하는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참전용사로 구성된 극우 근황주의 집단은 내전을 일으켰다. 이렇게 가톨릭 중앙당, 근황주의자, 일부 사민당 보수파가 연합한 반동배인 흑군과, 변혁을 추동하고자 한 독일 사회민주당 다수파가 구성한 적군이 대립한 정국을 흑적내전이라고 부른다.

1920년대: 사회주의 대조국의 태동기

흑적내전 초기에는 참전용사가 주축을 이룬 흑군이 유리했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흑군에 지지를 보태지 않았다. 더구나 사회민주주의 우파, 자유주의자, 근황주의자, 가톨릭신도 등 여러 이해관계로 얽힌 흑군은 적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합력이 떨어졌다. 결국 흑군은 패주를 거듭하다가 1922년 말 사실상 붕괴되었고, 소수 근황주의자들은 영국으로 도피해 독일제국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한편 빌헬름 2세는 러시아로 탈출하려 하다 실패하자 적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초대 당대회 사진

이로서 3년간의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났고, 적군은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 세력과 연대하고자 했다. 우선 오스트리아에서도 흑적내전의 연장선상으로서 독일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세력이 정권을 잡은 상태였다. 유럽에서 여러 연쇄혁명이 일어났으나, 성공한 곳은 쿤 벨러가 이끈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과 핀란드 내전에서 승전한 핀란드 사회주의 공화국 뿐이었다. 독일은 아쉬울대로 이들과 연합하여 국제 사회주의 연방체를 수립하고자 했고, 192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열띤 논쟁과 토론 끝에 헌법이 완성되었다. 이로서 1922년 12월 30일,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헝가리 4개국의 혁명정부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토대가 될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이른바 라트 연방을 수립하였다.

라트 연방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결착지을 책무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23년 1월, 뒤늦게나마 라트 연방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협상국과 제대로 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라트 연방은 독일 제국을 멸망시키고 나온 국가이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유화론과 프랑스의 강경론 중에서는 미국의 유화적인 입장이 받아들여져, 라인 지역의 비무장과 엘자스-로트링겐 지역의 프랑스 할양, 폴란드 접경 지대의 폴란드 편입, 그리고 320억 마르크 가량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3년간의 내전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 부담으로 인해 신생 라트 연방의 경제는 말이 아닌 수준이었다.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막대한 기근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또한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가 단행한 전쟁 공산주의는 내전에서 군사적 승리를 가져왔지만,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생산성이 크게 하락했고, 특히 집단농장화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로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대규모 기근(1921-1922)이 발생했다. 이러한 경제적 붕괴는 결국 전쟁 공산주의 정책의 실패로 이어졌다.

니콜라이 부하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는 러시아 혁명 실패 후 망명한 경제학자 니콜라이 부하린을 책임자로 하여 신경제정책(Neue Wirtschaftspolitik; NWP 엔베페)을 수립하였다. 이 정책은 라트 연방에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시킴으로서 경기를 회복하고 국제적 고립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농업 생산량과 산업 생산량이 점차 회복되었으며, 소비재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농민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득보다 실이 더 큼에 따라 이 정책은 폐기되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의 일시적인 타협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는 얄마르 샤흐트가 새로운 경제 정책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경제학을 전공했고, 엔베페의 실질 책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우선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르크를 폐지하고 탈러화를 도입했는데, 이것으로 인플레이션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를 탈러화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는 1925년 연방은행(Unionsbank)의 총재로 취임했다. 재무장관 루돌프 힐퍼딩 역시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수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 시기 라트 연방은 개혁파와 혁명파가 거의 대등한 역할을 부담하던 시기로, 에베르트와 브라운, 힐퍼딩, 레너, 벨스 등의 개혁파가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내세우면서 급진파였던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등과 대립했다. 엔베페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30년대: 슈트라서의 독재

1920년대 신경제정책의 마무리와 함께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 계획은 국가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정책 변화를 의미했다. 때맞춰 터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은 라트 연방이 더욱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매진하도록 만들었다. 에베르트의 사망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실권 장악을 통하여 점차 개혁파의 권위가 약해지고, 혁명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한 경향성은 1933년 온건파의 영수 중 한명이었던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FRSS 서기장이 경제 실적 미진을 이유로 해임당하고 그 자리에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임명됨으로서 더욱 확실해졌다. 슈트라서와 함께 혁명파에 속했던 에른스트 텔만이 서기장 직위에 오르면서, 슈트라서는 룩셈부르크에 이은 2인자이자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던 룩셈부르크를 대체하는 최고지도자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독일 리프크네히트 공업단지, 1933년[4]

우선 슈트라서는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제1차 4개년 경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중공업(철강, 석탄, 기계, 화학 등)을 중심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여 서전쟁으로 망가진 경제를 완전히 복구하고, 구 자본주의 국가를 뛰어넘는 것과 동시에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국가가 경제 목표를 설정하고 각 부문별로 자원과 노동력을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시장은 사실상 폐지되고, 경제 활동은 계획 수립에 의해 조직되었다. 또한 발트해 연안에 대규모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치를 안정화할 이유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대규모 숙청을 대테러(1934-1938)라고 한다. 대테러의 원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정치적 권위 확립을 드는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근 30년간의 연구에 의하면 부차적으로 보였던 요인이 사실은 본질적 원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흑적내전을 거치면서 군부가 일종의 이익집단화되었고, 프로이센 군대의 전통과 맞물려 군대가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면서 당의 목적 달성을 방해하기도 했다. 일부는 부정부패도 저질렀다. 즉, 군벌화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 뽑힌 최고 평의회 의원들은 각 지방 유지들과 유착하며 숫자를 부풀리거나 부패를 눈감아주는 등, 각 지방별 근무태만과 부패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슈트라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도입하여 각 지방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을 일소하고 군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의 파시즘 정권 대두는 이러한 우려에 따른 숙청을 더 강화시켰다.

정치범들이 주로 수감된 핀란드 북부의 강제 노동 수용소

이 시기 개혁파의 많은 인사들이 권력에서 밀려났다. 대테러의 핵심은 공개 재판 형식으로 이루어진 뉘른베르크 재판(1936-1938)이었다. 오토 브라운, 오토 벨스, 하인리히 뮐러, 쿠르트 슈마허 등 많은 개혁파 지도자들이 "반혁명 음모" "프랑스 파쇼 정권과의 내통" "룩셈부르크 암살 시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거나 핀란드에 있는 강제형무소로 보내졌다. 재판은 대부분 조작된 증거와 강압적 자백을 통해 진행되었고, 피고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경찰국장 에른스트 룀이 주도했으나 룀 역시 장검의 밤을 통해 처형되었다. 물론 개혁파만 숙청된 것은 아니었고 헝가리의 지도자 벨러 쿤 등 평판이 좋지 못했던 좌파 측 인사들도 숙청되었다.

나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나의 명예는 빼앗을 수 없다!
오토 벨스, 최후 진술에서[5]

1938년 룀의 숙청 이후, 상대적 온건파였던 하인리히 힘러가 경찰국장 겸 내무차관으로 지명되면서 대테러는 잦아들었다. 힘러는 전임자에 비해 관용적이었고 차별과 불공정에 반대했다. 대테러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우선 부정적 평가로, 정치와는 관련 없는 작가, 예술가, 지식인, 일반 노동자 및 농민들까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대규모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는 점이 있다. 대부분의 혐의는 조작된 것이었고, 수십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군사지도부 중 상당수가 숙청당한 것은 초기 프랑스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부정부패와 파벌화로 흐르고 있던 라트 연방의 기강을 잡고 국가를 보다 더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추동시켰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오늘날 라트 연방 교육부는 기본적으로 대테러를 오류라고 보고 있으나 그 순기능도 간과하지 않으며, 공 4 과 6 정도로 평가한다. 대테러에 연관되었던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권되었다.

1940년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초강대국으로 올라서다

1930년대 대공황은 유럽 각국에서 파시즘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1934년 프랑스에서 샤를 모라스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러시아 제1공화국도 파시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이들은 추축국을 결성해 사회주의 국가인 라트 연방을 포위하였으며, 이는 라트 연방의 안보적 위기로 다가왔다. 당면한 외교안보적 위기는 루르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라인-루르 지방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비무장 지대로 선포된 곳이었다. 이 점을 노린 모라스 정권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라인 지역을 강제로 점령해 자원을 수탈하고자 했는데, 독일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프랑스 군인들은 라트 연방 국민들을 분노케 하였다. 또 폴란드와 라트 연방 간의 무역분쟁(라트 연방-폴란드 무역 전쟁)도 위기를 고조시켰다.

한편 동부에서는 러시아 제1공화국과의 분쟁이 대두되었다.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유대인 포그롬은 라트 연방 내에서 3번째로 큰 민족집단이었던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한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야욕은 동유럽 전체를 공포로 밀어넣었다. 당시 러시아의 지도자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였다. 케렌스키는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 처음에는 사회민주주의자였으나 이후 반공주의를 위해 반유대주의 및 군부 세력과 손을 잡고 파시즘으로 타락한 인사였다.

케렌스키 정권은 1938년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벨라루스와의 재통일을 목적으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을 무단 침공했다. 이를 오브예디네니예(Объединение)라고 부른다. 뒤이은 1939년에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무력 병합하였다. 라트 연방 측에서는 두 완충 국가의 소멸을 곧 전쟁 위험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국 등 여타 유럽 국가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프랑스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확장 시도에 동조하며 라트 연방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1939년 9월 1일, 러시아-프랑스 연합군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라트 연방이 러시아 측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1950년대: 전후 호황기를 맞이하다

1960년대: 과도기와 문화대혁명

1960년대 라트 연방은 점차 관료주의수정주의에 편향되어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연간 7%가 넘던 GDP 성장률은 1960년대 들어 5%대로 떨어졌고, 급기야 1963년에는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에 이른다. 1964년 괴벨스 의장은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을 해임하고 알렉세이 코시긴 재무장관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 코시긴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코시긴 개혁이라는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활력을 잃은 경제를 소생시키고, 관료주의와 보신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지방의 비협조적 태도와 여러 현실적 여건으로 인해 코시긴 개혁은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 결국, 사회적 불만은 가중되었다.

또 194~50년대의 베이비부머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직업의 질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고, 특히 교육에 있어 점차 한명의 교수가 수백명의 학생을 대하는 기계식 대형 교육이 늘어났다. 더구나 과거 파시즘 정권에 복무했던 여러 인사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 과거의 혁명 영웅들의 자녀들이 고위직을 독식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 20년 가까이 집권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 대한 피로감 등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던 1967년, 다니엘 브릴 사건이 터졌다. 1967년 10월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에서 한 대학생이 만취 상태로 운전하여 동료 학생을 치고 달아나는 뺑소니 사건이 일어났다. 경비원에 의해 붙잡힌 해당 학생은 "감히 나를 기소해라! 우리 아빠가 다니엘 브릴이라고!"(Wie kannst du es wagen, mich strafrechtlich zu verfolgen! Mein Vater ist Daniel Brill!)라고 소리쳤다. 다니엘 브릴은 헤센 나사우 SRR의 경찰 부국장인 것으로 드러났다. 당에서는 이를 공론화하지 않으려 했지만 학보에 사건이 실리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까지 일어나며 반발이 거세졌다. 결국 다니엘 브릴 부국장이 TV에 출연해 인민들에게 사과했으나 이것으로 라련의 고질적 문제였던 "혈통주의"에 대한 반감은 폭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와중에 반정부 시위에 참석했던 대학생 베노 오네초르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6] 학생들은 분노하여 궐기했고, 비슷한 시기 일어난 프랑스의 대학생 사회운동에 영향을 받아 1968년 5월부터 전국적으로 당의 보수적 통치와 혈통주의, 관료주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를 문화대혁명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를 긍정평가하는 측은 라트 연방의 정치 시스템에 대대적인 개혁을 몰고왔으며,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반면 부정평가하는 측은 수많은 학자와 성직자들이 탄압받았으며, 과거의 유산들을 성급하게 부정한 극좌파적 운동이라고 비판한다. 오늘날에도 문화대혁명의 평가는 라련 내에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1968년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왔다. 1949년 이래 19년간 집권한 괴벨스의 퇴진을 불러왔으며, 개혁파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집권했다. 또,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구조가 개편되었고 이때부터 비로서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정치 구조가 정착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집권한 후 여러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국가 주도의 대규모 중산층 육성 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당의 구조를 개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쏟아져나오는 사회 각개층의 요구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서 인기가 하락하게 되었다.

1970년대: 프람의 집권, 데탕트의 시대

1972년 당대회에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집권하는데 성공하나, 독일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일어나며 상황이 바뀌었다. 백계 러시아 운동의 단원들이 러시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라트 연방 선수단을 인질로 잡아 그중 9명을 살해하는 참사가 일어난 것. 결국 에르하르트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7] 이후 치러진 긴급 서기장 투표에서 헤르베르트 프람이 정족수 표결을 얻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프람은 1960년대 말 라련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사생아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0~50년대 반파쇼 투쟁을 벌였으며 1960년대 후반 라트 연방의 좌파적 파벌을 이끈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헤르베르트 프람은 여러 좌파적인 인사를 기용하여 라트 연방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먼저, 그는 정치범에 대한 탄압을 거의 중단했다. 슈타지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내무부가 직접적으로 슈타지를 감독, 관리하게 되면서 195~60년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슈타지는 그 위세가 축소되었다. 또 붉은 군대의 고위 군장교에 대한 숙청을 통해 군을 견제하였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군축을 시도했다. 종교의 자유가 폭넓게 허가되었으며, 오랫동안 탄압받아온 유대인들을 위한 여러 법안이 통과되어 현재 유대인 SAR이 설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헤르베르트 프람의 개혁 방향성은 인민대중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였다.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반우파투쟁반관료투쟁으로 당을 압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내 기반이 부족하고 대중 지지 기반이 충분했던 프람의 전략적인 계산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에 따라 그는 당원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이 당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고 당대회 대의원에 무작위 대중을 선발하는 것도 고려했다. 나아가 서기장 직선제를 논의하기도 했으나, 당 내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8] 한편으로는 과거사 청산도 있었다. 그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시기 일어난 대테러에 대해 반성하였으며, 아돌프 히틀러, 쿤 벨러 등을 비롯한 대테러 피해자들을 대거 복권했다. 그는 1972년 "고참 사회민주당원"을 선정했다.

대외적으로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힘이 아닌 말을 통한 공산화를 선호했고, 스스로 이를 서방정책이라고 불렀다. 서방정책은 이전과 달리 쿠데타나 혁명을 통한 급진적 변혁보다는 경제적 원조를 통한 제3세계 및 서방권의 점진적 공산화를 유도하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영국에서 20년만에 영국공산당이 원내에 재진입했고, 아일랜드에서는 공산당이 집권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1972년 처음으로 라련-미국 정상회담을 열었다(닉슨-프람 회담). 또, 20년만에 동구권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죽의 장막을 넘어가 장제스 중국 총통과 회담을 가졌다(프람-장 회담).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오늘날에도 최고지도자의 예상치 못한 대외 행보를 "프람이 중국에 가다 (Frahm geht nach China; 프람 게흐트 나흐 히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급진적 행보로 인해 당 내에서 그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렸다. 보수파의 대장 격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바이에른 SRR 서기장은 "유아 같은 극좌 사생아 프람으로 인해 국가가 8년간 멈춰있다"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람이 가장 신뢰하던 보좌관 귄터 기욤이 사실 영국 MI6의 요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인해 유가가 오르자 프람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프람은 더이상 집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80년 3선을 포기했다.

1980년대: 호네커가 냉전을 사회주의의 승리로 이끌다

1980년 당대회에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프란츠 프라니츠키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에리히 호네커가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집권했다. 호네커는 프람과 달리 이전의 보수파를 대표하던 정치가로,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내정과 외정에 있어 모두 강경한 보수 정책을 펼쳤다.

내정에서는 다시 슈타지의 권한을 키웠고, 반체제 인사를 향한 도감청을 활성화했다. 잠시 폐쇄되었던 핀 카렐리아 SRR의 강제수용소도 복구했다. 프람 시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은 인물이 겨우 72명에 불과했지만[9] 1980년부터 1984년 사이의 정치범은 무려 3,000명이 넘었다. 다당제, 서기장 직선제 등 정치 개혁 의제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라트 연방 국민들은 호네커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말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국민들이 보수적 정책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제2차 냉전을 주도했다. 흔히 1950~60년대를 제1차 냉전, 1980년대를 제2차 냉전이라고 부른다. 호네커는 릴레함메르의 참사 등으로 실추된 슈타지의 위신을 되살리기 위해 국제적인 첩보망을 부활시켰고, 미국과의 군비 경쟁을 시작했다. 비록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미국-과테말라 전쟁, 미국-그레나다 전쟁 등에서 남미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해 남아메리카 혁명을 이끌어냈다. 그의 호전적인 대외 외교는 "악의 축" 연설로 극에 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다시 갖는 등 의외의 유화파적인 면모도 있었다.

1990년대: 개혁과 개방의 탈냉전기

2000년대 이후의 현대사

지리

라트 연방 지도.png
2024년 기준 라트 연방 지도

주요 도시

라트 연방의 주요 도시
순위 도시 국가 광역권 인구
1 베를린 프로이센 FSRR 7,144,000명
2 레닌스부르크 유대인 SAR 6,835,000명
3 란트스타드 광역권[10] 네덜란드 SRR 6,000,000명
4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헤센 나사우 SRR 5,800,000명
5 뮌헨 바이에른 SRR 5,600,000명
6 키예프 우크라이나 SRR 5,475,000명
7 바르샤바 폴란드 SAR 4,100,000명
8 뉘른베르크 바이에른 SRR 3,500,000명
9 함부르크 프로이센 FSRR 3,421,000명
10 부다페스트 헝가리 SRR 3,350,000명

시간대

라트 연방 지도.png

페로 표준 시간대, 중부 표준 시간대, 동부 표준 시간대, 서러시아 표준 시간대, 캅카스 표준 시간대가 있다.

인구

민족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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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기준 라트 연방 민족 구성 지도
전체 367,959,795명 (2024년)
[ 각 민족별 분류 펼치기 · 접기 ]
독일인 163,101,792 (44.33%)
러시아인 43,215,288 (11.74%)
폴란드인 34,600,499 (9.40%)
우크라이나인 30,728,508 (8.35%)
네덜란드인 18,192,623 (4.94%)
[ 펼치기 · 접기 ]
본토인 12,237,532 (3.33%)
플람스인 5,955,091 (1.62%)
유대인 15,963,273 (4.34%)
헝가리인 10,187,735 (2.77%)
벨라루스인 9,007,268 (2.45%)
체코인 5,855,660 (1.59%)
아제르인 5,731,575 (1.56%)
프랑스인 5,254,221 (1.43%)
[ 펼치기 · 접기 ]
왈롱인 5,184,119 (1.41%)
본토인 70,102 (0.02%)
핀란드인 4,883,282 (1.33%)
슬로바키아인 4,329,552 (1.18%)
조지아인 3,527,123 (0.96%)
아르메니아인 2,995,014 (0.81%)
리투아니아인 2,395,192 (0.65%)
라트비아인 1,928,084 (0.52%)
슬로베니아인 1,561,180 (0.42%)
에스토니아인 1,561,180 (0.28%)
페로인 49,299 (0.01%)
기타 민족 3,413,326 (0.93%)
[ 계통 별 민족 분류 펼치기 · 접기 ]
게르만 계통 181,294,415 (49.27%)
슬라브 계통 129,297,955 (35.14%)
히브리 계통 15,963,273 (4.34%)
기타 계통 41,404,152 (11.25%)

행정

라트 연방
공화국 구성 국가
[ 펼치기 · 접기 ]

정치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로고. 로고에 그려진 여성은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될 수 있는 대로 명확히 의식할 수 있도록 하려고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사회 정치 제도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제4장 中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Ratsunion)은 라트 연방의 유일 정당이다. 인민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우당(友黨)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에 속하는 라트 연방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야당 없이 유일당으로서 사회민주당이 전위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은 다당제 국가에서의 여느 당과 달리 전위당으로서, 당무 뿐 아니라 정무까지 총괄하는 일종의 정부기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사회민주당은 공산주의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여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고, 국가의 모든 기관과 정책을 통제하고 결정하는 최고 권력 기구로서 기능한다.

역사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은 1875년에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한 파벌에서 시작되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후, 사회민주당은 점차 점진적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파, 혁명을 주장하면서도 수정주의에 동조한 카를 카우츠키의 중간파, 그리고 혁명을 내세운 로자 룩셈부르크의 반수정파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중 룩셈부르크의 파벌이 카우츠키와 연합하여 베른슈타인을 몰아내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반대하는 혁명당을 구성하며 현재와 같은 사회민주당이 출범했다. 1922년 흑적내전에서 승리한 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헝가리 노동당,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핀란드 사회민주당 등 여러 혁명정당을 통합하였다. 이것이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이다.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아주 큰 역할을 하는 기구가 아니었으나, 193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중앙집권제가 강화됨에 따라 당이 곧 국가인 개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은 폴란드 공산당을 비롯해 동유럽과 중부유럽 전체의 혁명 세력을 단일하게 통합하여 세계 최대의 정당이자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본산으로 자리잡았다. 현재와 같은 정당 구조가 정착한 것은 문화대혁명 이후, 1968년~1974년 사이 헤르베르트 프람을 중심으로 한 프람 헌법이 자리잡으면서이다.

구성과 기능

행진하고 있는 사회민주당 당원들

사회민주당은 중앙위원회, 정치국, 서기국, 당대회 등으로 구성된다. 명목상으로 중앙위원회 의장이 국가원수이자 당의 수장을 맡으나 실질적으로는 서기국의 장인 서기장(혹은 제1서기)이 당수 겸 최고지도자의 직위를 맡는다. 조선으로 비유하자면 당대회장은 의결기구장+국회의장, 정치국 위원은 최고위원, 중앙위원회 의장은 명예총재, 서기장은 사무총장+당대표+원내대표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후술.

사회민주당은 라트 연방의 정치, 경제, 사회적 삶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며, 국가 운영의 모든 측면에서 최고 결정권자로 활동한다. 우선 정치적으로 사민당은 소련의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모든 정치적 권력을 독점한다. 당은 모든 국가 기관과 기구의 위에 존재하며, 국가의 모든 중요한 정책 결정은 공산당 지도부에서 이루어진다. 최고 라트나 장관회의와 같은 정부 기관은 공식적인 입법 및 행정 역할을 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사회민주당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고 라트의 의원과 장관들이 모두 사회민주당원이기 때문이다.

또, 경제적으로 사민당은 라련의 계획 경제를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중앙 계획 기관인 슈타트플란(Staatlicher Planungsausschuss; Staatplan)이 국가의 경제 목표를 설정하고, 4개년 계획 등을 통해 자원을 분배하며 경제를 조정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민주당은 경제 정책을 감독하고, 산업, 농업, 무역 등 모든 경제 활동을 관리, 감독한다. 사회적으로는 교육, 문화, 예술, 언론, 그리고 일상생활까지 사회민주당의 이념적 지침에 따라 운영되도록 조정한다.

마지막으로 대외적으로 사민당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통해 세계 각국의 공산당을 지원하고 지도한다. 냉전기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주도적 세력이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전세계에 혁명을 "수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내 파벌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주요 파벌
보수파 개혁파 좌파

라트 연방의 유일정당으로서 사회민주당이 갖는 역할은 지대하기에, 당연히 내부적인 파벌도 있다. 당내에는 공식적으로는 파벌이 금지되어있지만, 비공식적으로 3개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다. 보수파, 개혁파, 좌파가 그것이다.

보수파(Konservative)는 전통적인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를 추구하며 사회적으로 보수적이고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현 체제를 옹호한다. 주요 인물은 현 서기장인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중앙위 의장인 오스카 라퐁텐이다. 라트 연방 최대 파벌로, 당대회 대의원과 최고 라트 의원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혁파(Reformiste)는 보다 개혁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파벌로, 당내 우파로 분류된다. 부르주아 경제학부하린주의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민간의 역할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구한다. 또 사회적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해 보수파에 비해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통치를 중시하는 편이다. 세력은 보수파에 밀리지만, 작지 않은 지지자와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 인물로 내무장관 올라프 숄츠가 있다.

좌파(Linke)는 당 내에서 가장 작은 파벌이지만 영향력에 있어 앞의 두 파벌에 밀리지 않는 극좌적 파벌이다. 이 파벌의 기원은 문화대혁명이다. 헤르베르트 프람 서기장의 이념을 따르는 이들로, 프람보다도 더 좌파적이며, 당 내에서 초좌파 혹은 극좌파로 분류되고 있다. 좌파는 극렬한 반자본주의와 반우파주의를 표방하여 혁명 이후에도 남아있는 우파적 문화를 타파하며 전세계로 공격적으로 혁명을 전파하는 영구혁명론을 지지한다.

당내 파벌을 넘어서 다당제를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다. 이를 다당제 공산주의 개혁으로 부른다. 네메트 개혁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도입될 가능성은 낮다. 대중적으로 사민당 이외의 정당이 내는 목소리가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11]

1부

중앙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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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오스카 라퐁텐
(중앙위원회 의장 겸 국가 원수)
2위 3위 4위
자라 바겐크네히트
(중앙서기국 서기장 겸 정부 수반)
프리드리히 메르츠
(서기장 대리 겸 프로이센 FSRR 지역당 서기장)
프란츠 주르크자니
(중앙감찰위원장 겸 검찰총장)
5위 6위 7위
엘리오 루포
(중앙감사위원장 겸 재정국장)
베르너 파이만
(조직위원장 겸 국무장관)
히 페어호프슈타트
(대외위원장 겸 외무장관)
8위 9위 10위
라이문트 안제이차크
(군사위원장 겸 국방장관)
빅토어 야누코비치
(경제감독위원장 겸 재무장관)
올라프 숄츠
(국가행정위원장 겸 내무장관)
11위 12위 13위
페테르 시모넨코
(노동위원장 겸 노무장관)
하이코 마스
(법제법무위원장 겸 법무장관)
셈 외즈데미르
(상업위원장 겸 상무장관)
←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 (제48기)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독일어: Zentralkomitees)는 사회민주당의 핵심 지도부로,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들로 구성된다. 중앙위원회는 당의 정치적 방향을 결정하고, 당내에서 모든 활동을 감독한다. 32차 대회 기준으로 중앙위원회는 총 13명으로 구성된다. 중앙위원회 의장과 중앙서기국 서기장을 중심으로 중앙감찰위원장, 중앙감사위원장, 서기장 대리, 조직위원장, 대외위원장, 군사위원장, 경제감독위원장, 국가행정위원장, 노동위원장, 법제법무위원장, 상업위원장이 배석한다. 초기에는 6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국가 규모가 커지고 권력자 간 상호견제가 이루어지다보니 13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74년 개헌 이후, 중앙위원회 위원은 중앙위원회 의장, 서기장 및 그 대리를 제외하면 각 부처의 장관직을 당연직으로 겸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회 배석 장관직위 역할
중앙감찰위원장 검찰총장 당 내에서 당원들의 당규 위반, 혹은 도덕적 타락, 사기, 권력 남용과 같은 범죄들을 감시하고 심판한다.
중앙감사위원장 재정국장 당과 국가의 예산 전반을 관리, 감독한다.
조직위원장 국무장관 당 내의 주요 인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과의 수장을 맡는다.
대외위원장 외무장관 코민테른을 비롯해 해외 혁명당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며 국제적으로 혁명을 수출한다.
군사위원장 국방장관 붉은 군대의 수장으로서 당과 국가를 무력으로 보위한다.
경제감독위원장 재무장관 국가의 경제 발전을 관리, 감독하며 총괄적으로 계획한다.
국가행정위원장 내무장관 경찰을 비롯한 행정, 치안 전반을 담당하면서 당과 국가의 행정을 관리한다.
노동위원장 노무장관 노동조합과 노동자 인권을 관리한다.
법제법무위원장 법무장관 국가의 법과 당의 당헌을 수호하며, 당의 법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상업위원장 상무장관 국가의 상업을 관리, 감독하며 진흥한다.
중앙위원회 의장

라트 연방 중앙위원회 의장(독일어: Vorsitzender des Zentralkomitees, 영어: Chairman of the Central Committee)은 라트 연방국가 원수이다. 흔히 주석(독일어: Vorsitzender)이라고도 부른다. 현 중앙위원회 의장은 오스카 라퐁텐.

중앙위원회 의장은 명목상으로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당수로서 당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중앙위원회의 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의원내각제 국가의 대통령과 같은 상징적 국가원수의 지위를 맡는다.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라트 연방의 정치 특성상 의장에게 큰 권한은 없지만, 일단 명목상으로는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당수로서 중앙위원회 서기국을 비롯한 당정직 후보자들의 임명을 승인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다른 내각제 국가의 대통령과 같은 군통수권이나 의회해산권는 갖지 못한다.

서기장과 달리 연임 제한이 없으며, 처음 선출되면 죽을때까지 별도의 재신임 투표 없이 영구히 재임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서기장과 달리 선출 과정에서 복수후보가 출마하는 경우가 아예 없고, 당 내에서 폭 넓은 존경을 받는 원로인사가 재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앙서기국 서기장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서기국 서기장(독일어: Generalsekretär des Zentralsekretariats, 영어: Secretary General of the Central Secretariat)은 라트 연방정부 수반이자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당수로 라트 연방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이다. 현 중앙서기국 서기장은 자라 바겐크네히트.

정치국

2부

사회민주당 당대회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당대회(독일어: Parteitag der SPRU)은 라트 연방의 주요 당직자, 즉 중앙위원회 의장과 서기국 서기장, 감찰위원장, 감사위원장 등을 선출하는 중요한 대회이다. 당대회는 4년에 한번 치루며, 가장 최근의 당대회는 2024년 개최된 제32차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당 대회였다.

과거에는 당대회를 치루는 기간이 정해져있지 않았으나 1968년 개헌 이후 4년에 한번 돌아오는 노동절을 전후하여 치루도록 하였다.

당대회의 대의원은 일반 민중을 포함해 최고 라트 의원, 연방 참사원 의원, 각 지방당 파견 대의원, 각계층 직능대표 등으로 구성된다.[12] 이들의 투표를 통해 총 3/4 이상을 얻은 후보자가 당직자로 선출된다. 일반적으로 투표는 거수기에 불과하고 표결이 이루어지기 전 정파 간 조정을 통하여 후보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지만[13], 때때로 복수의 후보자가 출마해 결선투표까지 가기도 한다.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면 1위 후보부터 차례대로 찬반 거수를 세는 식이다.

연방 참사원

연방 참사원(독일어: Bundesrat, 영어: Federal Council)은 라트 연방의 상원 역할을 하는 입법부이다. 1974년 라트 연방 민족 평의회가 최고 라트로부터 분리되어 개원하였다.

라트 연방 최고 라트

라트 연방 최고 라트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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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최고 라트
(2022 ~ 2026)
유일당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832석
무소속 115석
재적 950석 | 공석 3석
라트 연방 최고 라트 의원의 배지. 만일 이 뱃지가 위치할 자리에 다른 훈장 등이 부착되어 있을 경우 그 훈장의 위치를 변경한다.

최고 라트 혹은 최고 평의회(독일어: Obersterrat, 영어: Supereme Council)는 라트 연방의 하원 역할을 하는 입법부이다. 1974년 이전까지는 라트 연방 민족 평의회라트 연방 인민 평의회를 산하에 두고 있었으나, 1974년 정치 개혁으로 민족 평의회가 상원 기능을 하는 독립적인 연방 참사원으로 분리됨에 따라 현재는 인민평의회가 곧 최고평의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선거는 처음에는 5년에 한번씩 치루었으나, 1974년 개헌을 통하여 4년 단위로 뽑고 있다. 가장 최근의 선거는 2022년 치러진 제24대 최고 라트 의원 선거.

총 의석수는 950석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와 달리 지역구 단위에서 선출하지 않고 각 작업장과 도시 별로 복잡한 선거구를 구성하여 선출한다. 또한, 각 집단 단위별로 의석 수가 배정되어있어[14] 소외되는 집단이 없도록 하고 있다.

복수 후보의 출마가 가능하며, 1974년 개헌 이후로는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에 당적을 둔 복수의 후보자가 출마하기도 한다. 다만 현재도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사회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가 하나 뿐인 경우가 많다. 유일당인 사회민주당을 제외하면 무소속 후보가 출마할 수도 있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도 한다. 무소속 후보가 사회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는 경우도 있는데,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 단독 후보자가 출마한 경우, 찬반 투표로 당선 여부가 정해진다.

특이하게 어떤 후보도 50% 이상의 득표를 하지 못하거나 유권자 투표율이 80%에 미달하면 누구도 당선되지 못하는 것으로 정해놓았다. 이 경우 재투표를 통해 다시 의원을 선출하는데, 결선투표의 역할을 한다고도 생각될 수 있다.

3부

문제점

개혁 요구

반정부 단체

라트 연방의 주요 반정부 단체
(연방 헌법수호청 감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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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중인 반정부 단체
A급
(특별한 주의 요함)
러시아 해방기구 유럽 노동자 농민 해방운동 폴란드 인민당 크로아티아 혁명운동
B급
(일정한 주의 요함)
라트 연방 좌파공산당 리비아 해방운동
C급
(평범한 주의 요함)
백계 러시아 운동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간디주의) 라트 연방 자유민주당 다에시 파키스탄 인민해방전선
비활동 중인 반정부 단체
D급
(주목할 활동 없음)
폴란드 제2공화국 지하정부 라이히스뷔르거 운동 독일 민족민주당 코소보 내부혁명기구
E급
(일체 활동 없음)
독일 민주당 독일제국 망명정부 적군파
해산됨 가톨릭 중앙당 독일 국가인민당 라푸아 운동
범례: 우익 계열| 좌익 계열| 국제 단체

사법

특징

라트 연방의 사법 체계에 대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벌금형의 부재: 라트 연방은 사회주의 체제로, 형벌이 금액화될 수 없다는 관점 하에서 벌금형을 내리지 않는다. 또한 벌금형을 실시하게 되면 돈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 벌금형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간의 격차를 조장하는 부르주아적 형벌이라고 보았다. 라트 연방은 작은 죄라도 벌금형을 내리지 않고 노동교화형이나 구속형을 선고하는데, 이는 라트 연방이 많은 수감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과 연관되고 있다.
  • 국선변호사 제도: 라트 연방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적인 변호사 집단이 부정되며, 모든 변호사는 국가와 당에 소속된다. 모든 피고는 변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원칙 하에 국선변호사는 무료로 배정된다. 구 미국에서 일부 부르주아가 막대한 돈을 들여 이른바 "로펌"의 좋은 변호사를 채용하는 것을 두고서 라트 연방의 법학자들은 "재산의 유무에 따라 양형이 달라지냐"고 지적한다.
  • 인민재판관의 존재: 인민과 공동체의 보편적인 법 감정을 형벌에 도입해야한다는 원칙 하에, 일반 인민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인민재판관으로 배정한다. 이는 실질적으로 배심원의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판사와 논의해 유무죄와 형벌의 정도를 결정한다.
  • 경제범에 대한 엄벌주의: 모든 것이 국유화된 효율적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한 라트 연방 체제의 특성상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이 유독 엄격하다. 5만 탈러 이상을 횡령한 경제사범은 사형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작은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경제범이라면 기본적으로 3달 이상의 징역형이 원칙이다.
  • 특별 재판의 존재: 위 사항에 구애받지 않는 특별 재판이 존재한다. 슈타지 요원을 상대로 한 특별 재판이 대표적이며, 이 경우 슈타지 트로이카라 하여 슈타지 요원 3명이 판사와 배심원의 역할을 했고 재판의 중대성과 효율성을 감안하여 검사와 변호사의 배정도 거부되었으며 기본적으로 일심제이다.

라트 연방 법무부

라트 연방 대법원

라트 연방 대법원을 이루는 대법관은 라트 연방 최고 라트에서 선출하며, 법에 대한 이해와 당과 이념에 대한 충실도, 공정성 등을 평가하여 객관적 기준에 거쳐 선발된다. 따라서 헌법적으로는 독립적인 기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다.

산하에 다양한 전문부서를 두고 있는데, 크게 군사부서, 형법부서, 민간부서가 있다. 군사부서는 군사법원에서 올라온 사안에 대해 심사한다. 형법부서는 일반적인 상소와 재심을 담당하며, 민간부서는 민사사건과 노동사건에 대해 다룬다.

대법원은 하급 법원에 재판 지침을 하달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이는 재판의 정치적, 경제적 속성을 고려하여 사법적인 요인 외에도 추가로 고려해야할 것을 법무부와 대법원을 거쳐 하급 법원에 일일히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트 연방 대법원은 하급 법원을 대상으로 한 훈련과 교육이라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하급 법원

자잘한 권리도 모두 법으로 보호받는 권리로 포괄한 것이 특징이다. 크게 보아 임신중절권은 물론 여가를 갈 권리, 휴식을 취할 권리 등이 모두 법에 따라 보장되었고 이를 어기는 작업장은 엄하게 처벌받는다. 실질적인 효과는 없지만 임산부 지정좌석 제도가 법적인 효력을 갖기도 한다.

경제

에너지

역사

구 독일 시대의 에너지 개발은 19세기 산업혁명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여느 유럽 국가와 다름이 없이 뗄감을 구해다 불을 피우는 것이 에너지의 전부였으나, 1800년대 독일이 산업혁명을 맞이하면서 자본주의에 의해 에너지 산업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독일의 경제성장 및 에너지 기술은 주로 석탄에 의존했다. 루르 지역에서 석탄이 대량으로 체굴되면서 루르는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지역으로 부상했고, 이는 프로이센바이에른 등 경쟁 국가를 꺾고 독일 전체에서의 패권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막대한 석탄 체굴은 독일의 철강 산업과 제조업의 급성장에 기여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체코를 중심으로 중공업 산업을 발달시켜나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 이후, 석탄 노동자들은 흑적내전에서 주로 공산주의의 편에 섰으므로 혁명 이후에도 이들이 큰 발언권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1922년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루르 지역이 비무장지대로 선포된데다 파쇼화된 프랑스(모라스 정권)이 베르사유 조약 대금 미납을 이유로 석탄 광산을 점령하고 자원을 수탈했으므로 라트 연방의 석탄 산업은 주춤하게 되었다. 이는 라트 연방 정부로 하여금 석유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게 하였다. 또한 20세기 들어 발달한 자동차 산업과 항공기 산업, 특히 핀란드-독일을 잇는 장거리 항로의 활성화는 석유기술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4개년 경제개발 계획에 독자적 석유 중화학공업 기술 발전을 중점으로 삼도록 하였다.

플로이에슈티 유전, 1950년

석유 산업에 도움을 준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세계 최초의 유전 중 하나인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라트 연방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온 안토네스쿠 파쇼 정권을 전복하고 루마니아를 해방시킨 라트 연방은 루마니아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았으며, 이는 라트 연방이 동부 전선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전쟁 도중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유전 중 상당수가 파괴되긴 하였으나, 전후 사회주의적 개발 정책으로 이를 복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플로이에슈티 유전은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합작 공기업인 소브롬페트롤(Sovrompetrol)의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2차 대전 전후 처분에 따라 바쿠 지역의 유전이 라트 연방에 속하게 되었다. 캅카스 지역, 특히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대대적인 유전 발전은 이 지역이 전후 라트 연방 석유 공급의 80%를 책임지게 했으며, 바쿠-트빌리시-제이한(BTC) 파이프라인을 통해 튀르키예로도 자원을 수출하게 되었다. 자카캅스 정유공사(Pan Caucasus Petrol Öffentliches Unternehmen)는 1957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기업으로 평가받았다. 1955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 중앙위원회 의장은 라트 연방이 최종적으로 에너지 자립을 이루었다고 선포했다.

1960년대 들어 라트 연방은 원자력 발전 기술을 도입하였다. 원자력 발전은 기존 에너지와 달리 환경 오염원 배출이 적었기 때문에 에너지원에 있어 소비는 급속히 원자력으로 전환되었고, 라트 연방은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2의 원자력 발전 국가로 거듭났다. 1970년대 데탕트 당시에는 원자력 발전 기술을 도입한다는 닉슨 대통령의 정책에 따라 기술을 이전해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라트 연방은 1973년과 1979년 일어난 두차례의 석유 파동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원자력이 큰 비중을 차지해서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국가가 정유 시설을 장악하여 수요와 공급을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석유파동과 같은 위기를 더 잘 해결하기 위해, 라트 연방은 1980년대 전 연방의 에너지 수요를 파악하고 공급하는 작업을 전산화하였고, 이는 후일 AIB(Automatisiertes Informationsverarbeitungs- und Buchhaltungsnetzwerksystem; 자동화된 정보 처리 및 회계 네트워크 시스템)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다.

1986년 미국에서 일어난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는 라트 연방 내 반핵 운동을 추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트라 켈리좌파의 일원들은 라트 연방 최초의 탈핵 세대를 양성했다. 초기에는 극좌편향 운동으로 매도되었으나, 점차 대중의 공감대를 얻어 라트 연방이 1990년대 이후 에너지 전환(Energiewende)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에너지 전환 정책은 태양광, 수력, 지열 등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여 화석연료와 원자력의 영향을 탈피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라트 연방은 2030년까지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고, 나아가 2038년까지 완전한 화석연료 탈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요 에너지원

화석연료
리보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광산, 2023년
원자력
재생에너지

전망

사회

종교

분포

라트 연방의 종교 신도 명수 및 비율 (2024년 기준)
기독교 83,108,14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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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43,852,120 (11.92%)
정교회 24,344,351 (6.62%)
개신교 14,912,274 (4.05%)
회교 13,662,667 (3.71%)
유대교 7,452,712 (2.03%)
기타 2,424,380 (0.66%)
무종교 261,257,822 (71.00%)
[ 역사적 추세 펼치기 · 접기 ]
1950년
기독교 67.4%
27.3% 무종교
1970년
기독교 53.2%
38.0% 무종교
1990년
기독교 44.3%
48.4% 무종교
2010년
기독교 32.1%
61.6% 무종교
2024년
기독교 22.6%
71.0% 무종교

2024년 인구조사 결과, 라트 연방 내 최대 종교는 기독교로, 인구의 22.59%가 믿고 있다. 제2 종교는 회교로 3.71%를 차지하며, 민족종교인 유대교는 제3종교로 2.03%를 차지한다. 그 외 기타 종교는 0.66% 정도이다. 무종교인은 71.00%로 2024년 조사에서 처음으로 70%를 넘어섰다. 다만, 실제로는 기독교인 수가 약 35%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역사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종교는 노예제와 봉건제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주술로서 생산양식의 발달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는 비과학적 믿음이다. 이에 따라 초기 라트 연방국가무신론을 표방하여 이전의 독일제국과 달리 종교를 장려하지 않았으며, 종교에 앞서 과학을 강조하였다.

독일제국 시기 국교는 기독교로, 인구의 90% 이상이 기독교였다. 따라서 라트 연방의 초기 관료들은 종교를 강하게 억압하기보다는 무신론을 유도해야한다고 보았다. 교회에 대한 예배는 평소와 같이 유지되었으며, 일부 협조적인 성직자들은 공산당 체제 하에서도 별 문제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적내전과 이후의 공업화 과정에서 다수의 종교인들이 라트 연방 정부에 비협조적이거나 반동적 흐름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성직자들은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서구권에서는 이를 두고 종교의 탄압이라고 과대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트 연방은 헌법 차원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노동력의 집약적 활용을 강화하고 국민적인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 종교의 영향력을 사회에서 점차 배제시키고자 했다. 모든 학교 과정에서 종교 윤리가 배제되었고, 많은 교회소가 폐쇄되었다. 유대교 등 다른 종교도 억압되었다. 1949년 슈트라서가 사망한 후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집권했지만, 여전히 반신론적인 국가 정책이 유지되었다. 단 괴벨스는 종교의 자유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유대교에도 유화적이었다.

1968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종교를 대하는 라트 연방의 태도는 다시 한번 변하게 되었다. 문화혁명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좌파 성향 대학생들은 공산당의 강압적인 통치에도 반대했지만 기독교와 같은 구습에도 반대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당에 의한 교회 탄압보다 대중에 의한 교회 탄압이 더 심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교회가 공산당의 통치에 점차 협조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1978년 폴란드 출신의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1980년에는 보수파인 에리히 호네커가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와 "역사적 화해"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신론적 무신론이라는 전반적 교육 과정은 변하지 않았다.

1990년대 탈냉전에 접어들자, 당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니콜라스 네메트네메트 개혁 하에 종교의 자유는 보다 폭넓게 인정되었고, 당원이 무신론자여야한다는 조항 역시 고위당직자가 무신론자여야한다는 조항으로 대체되었다. 2006년, 두번째로 라트 연방 출신인 요제프 라칭거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2024년까지 재위했다.

연방 공휴일

  • 1월 1일: 신년
  • 1월 5일: 스파르타쿠스 봉기 기념일
  • 5월 1일: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일, 세계 노동절
  • 5월 5일: 카를 마르크스 탄생일
  • 5월 9일: 승리의 날 (2차 세계대전 전승일)
  •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
  • 11월 3일: 11월 혁명 기념일
  • 11월 28일: 프리드리히 엥겔스 탄생일

문화

외교

라미관계

라러관계

기타


  1. 경제적 민주성 9.7점, 전위당의 기능성 9.3점, 직접민주참여도 9.5점, 정치경제적 평등성 10.0점, 의사결정의 절차성 10.0점
  2. 정부까지 포함하면 파리 코뮌에 이은 2번째 국가이다.
  3. 거짓짝으로 영어에서 Rat가 쥐를 의미하기 때문에 Councils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4. 후대에 컬러로 복원한 사진이다.
  5. 벨스는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핀란드 형무소로 보내졌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수감 2년만인 1939년 사망했다.
  6. 후일 밝혀지길 오네초르크를 쏜 경찰은 사실 미국 CIA의 공작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측에서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대학생을 쏜 것이다.
  7. 다만, 이것이 핑계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에르하르트는 1970년대 초반 건강이 좋지 않았고, 헤르베르트 프람만은 막자는 당의 여론에 따라 억지로 재선했지만 스스로 권력의욕이 없어 테러를 핑계로 재집권하자마자 사임했다는 것이다.
  8. 그의 인기가 워낙 좋았던 탓에, 서기장 직선제가 이때 통과되었다면, 프람은 임기 제한만 없었어도 죽을때까지 영구집권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9. 이마저도 대부분이 백계 러시아 운동의 단원들이었다.
  10.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11.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하정당으로 독일 민주당가톨릭 중앙당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지만 가톨릭 중앙당은 문화대혁명 당시 지도부가 전원 숙청당했고 독일 민주당은 1987년 이후 공식적인 활동을 멈춘 상태이다. 오죽하면 현재 라트 연방 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반정부 정당이 현 여당보다도 더 극좌파적인 라트 연방 좌파공산당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이다.
  12. 대의원 수는 각 당대회마다 모두 다르지만 4,500명을 내외로 한다.
  13. 특히 현임 서기장이 연임을 시도할 경우 복수후보자가 나오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
  14. 가령 유조스의 경우 의원 수의 10%를 반드시 배정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