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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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체 Dissolution of United Kingd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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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언잭이 내려가고 잉글랜드 민주공화국의 국기가 게양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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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당하는 윈스턴 처칠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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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일시 | 1991년 12월 26일 새벽 2시 |
내용 | 연합왕국의 공식 해체 잉글랜드 등 연합왕국 구성국 4개국의 독립 브리튼 제도 국가 연합의 창설 연합주권왕국의 무력화 완전한 냉전의 종식 |
개요
The House of Commons confirms that with the creation of the Union of the British Isles, the United Kingdom ceases to exist as a state and as a subject of international law. 영국 서민원은 브리튼 제도 국가 연합의 창설과 함께 연합왕국이 국가로서 그리고 국제법의 주체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1991년 12월 26일 영국 서민원 선언 142-N호. |
1706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일된 이래 약 300년간 존속했던 영국(United Kingdom, 연합왕국)이 1991년 12월 27일 4개의 공화국(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잉글랜드)로 분할, 해체된 사건을 의미한다.
냉전기 미국과 함께 제국주의(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한 영국이 해체된 이 사건은 냉전의 종식과 탈냉전의 개막을 상징적으로 알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배경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 파키스탄 등 주요 식민지가 독립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주류 경제학(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의하면 자본주의 국가는 이윤율 저하의 경향성을 회피하기 위해 외부적으로 자본을 확대, 수출해야하는데, 제국주의의 철폐는 그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클레멘트 애틀리가 집권하며 사회주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고자 했으나[1] 1950년 총선에서 반동세력인 보수당의 집권으로 이는 무효로 돌아갔다. 이후 집권한 처칠, 이든, 맥밀런 등의 제국주의자들은 수에즈 위기 등에 개입하며 영국의 제국주의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이 가말 나세르 정권의 수에즈 투쟁으로 명확해지자, 이후의 해럴드 윌슨 정권은 내부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군사적 개입을 축소하고 현지 정권의 협조를 통한 착취를 효율화하는 신식민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제적 모순은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내몰렸고, 1974년의 광부 총파업으로 인한 전국적 전기 부족과, 2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으로 인하여 영국의 경제 동력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난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오히려 조장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인플레이션이 그들의 이윤창출에 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등장한 마거릿 대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자로 이전 처칠-이든-맥밀런 정권의 실패한 제국주의 정책을 답습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노동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였다. 대처 정권 하에 영국의 경찰 병력은 3배 이상 증강되었으며 노동 쟁의는 그의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대처 정권은 포클랜드 침공 등 제국주의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영국 노동자들의 정당한 불만을 탄압하고자 했으나, 아르헨티나 혁명정부가 영국군을 꺾으면서 대처 정권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더구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내부 모순으로 인해 계급 갈등은 심화되고 있었고, 이미 영국 붕괴 이전부터 맨체스터, 리버풀, 리즈 등 주요 노동자 도시에서는 공산당에 의한 자치 코뮌 수립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또한, 대처 정권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인하여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경제난이 심화되었고, 이는 지역 내 독립여론이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북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투쟁이 강화되며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이 수립되었고 루이 마운트배튼의 암살 등 투쟁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영국 왕실은 시대착오적 행동으로 노동자 계급의 분노만을 샀다.
전개
마거릿 대처의 강경한 대응
1989년, 서구권 전체에 불어닥친 자유화의 바람으로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고 있었다. 가령 1989년 6월 노르웨이에서 왕정이 폐지되고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한달 뒤에는 아일랜드 역시 신페인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캐나다, 호주 등도 영연방 탈퇴 및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붕괴와 사회당, 공산당 등 신흥정당의 대두로 인해 타국에 개입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결국 1989년 이후로는 브라질,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노르웨이, 인도, 파키스탄, 칠레, 멕시코 등 주요 국가들이 모두 공산화되었는데, 영국만큼은 섬나라라는 이점을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인민의 요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1989년 11월, 리버풀을 중심으로 영국 전역에서 사회주의와 대처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대처 정권은 이에 대해 강력한 공권력으로 맞서고자 했으며, 수도 런던에서 기마부대 300명과 노동자 5만명이 충돌해 약 1,200명이 죽거나 다치는 화이트채플 가의 전투가 일어났다. 대처 정권의 탄압에 맞서 노동당은 의회를 보이콧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잉글랜드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항으로 인하여 행정력을 상실했다.
존 메이저의 주권왕국 수립 시도
영국은 여전히 MI5와 MI6로 대표되는 방첩기구, 반공 국가독점자본주의 기구가 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산발적인 투쟁은 1990년 초에 이르러 모두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거릿 대처 총리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1990년 2월 여왕은 대처를 총리 직위에서 해임하고 온건파 존 메이저를 총리에 임명했다. 존 메이저는 노동계급 출신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유화적이었으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인근 야산에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잉글랜드 노동계급 세력, 북아일랜드 공화국군과 협의를 통하여 연합왕국을 보존하고자 했다. 이를 펜틀랜드 숲의 조약이라 부른다.
존 메이저의 방안은 북아일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대등한 주권 왕국으로의 도약(즉 브리튼 주권 왕국 수립), 잉글랜드 각 지역의 노동자 자치 의회 보장 및 런던, 노스 잉글랜드, 사우스 잉글랜드 자치의회 설치를 담고 있었다. 또한 왕실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혁신적 계획도 포함되어있었다. 라트 연방 방첩국(이른바 슈타지)의 비밀 여론조사에서 영국인의 78.5%가 이 조약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도약해야한다는 급진적 주장에는 오직 17.4%만이 동의하고 있었다.
1990년 12월 17일, 영국 최초의 전국민 국민투표를 통해 신연합왕국 조약의 여부가 결정되었다. 영국공산당의 광범위한 보이콧으로 투표율이 64%에 머물렀음에도 찬성이 91.3%로 반대의 8.7%를 압도했으며 이에 따라 펜틀랜드 숲의 조약은 효력을 갖게 되었다.
보수파의 쿠데타
그러나 파시즘 정당인 보수당 내에서는 메이저의 방안에 대해 광범위한 불만이 존재했으며, 1991년 1월 17일 의회에서 조약이 비준되는 날에 맞추어 보수파 의원 다수가 존 메이저에 대한 불신임안을 상정하고 이를 단독으로 통과시키는 의회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노동당은 의회를 보이콧하고 있었기에 존 메이저의 불신임안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는데, 배후에 마거릿 대처 의원이 있었다는 것이 현재로서 확실시된다.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하는 시위를 전개했으나 런던 경찰국은 이를 강경 진압하고자 했고, 왕립군 역시 쿠데타를 지지하며 점차 메이저 축출 시도는 군사 쿠데타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500만 런던 시민 대다수가 보수파의 쿠데타에 반대하고,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 존속에 반대를 드러냈으므로 보수파의 쿠데타는 사실상 승리할 수 없었다. 북부 지역에서는 공산당이 조직한 노동자 전위대가 주요 도시의 치안을 장악했고,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군이 행정력을 상실했다. 이에 따라 쿠데타 군은 절대다수 영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무장해제하였다. 일부 강경파 군인들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결하기도 하였다.
영국 왕실은 이에 대해 큰 유감의 의사를 표명했으나, 존 메이저와 왕실 역시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신임을 잃었다. 결국 좌파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토니 벤 의원이 신임 총리로 지명되었고, 토니 벤은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영국의 근본적 체제 전환을 앞당기고자 했다.
연합 왕국의 해체
1991년 12월 1일, 영국 자체에 신임을 잃은 북아일랜드는 자체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했다. 투표율은 89%였고 찬성은 99.3%였다. 보수파는 부정선거를 주장했으나 국제 참관인단은 결과를 유의미하게 바꿀만한 부정선거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발표했다. 결국 이미 북아일랜드 공화국군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고 있던 북아일랜드는 연합왕국을 이탈해 북아일랜드 인민공화국을 자체적으로 수립하였으며, 뒤이어 스코틀랜드와 웨일스가 모두 독립 투표 진행을 자체적으로 선언했다.
결국 연방 유지가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잉글랜드의 토니 벤 내각은 12월 8일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독립 세력을 모아 요크셔 데일 주권 조약을 체결, 연합왕국의 해체와 이후 외교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홍콩 등 잔여 식민지는 각자의 독립 정부를 가질 것이 허가되었다.
12월 26일, 스코틀랜드와 웨일스가 연합왕국을 이탈하며 잉글랜드는 붕괴되었고, 동시에 잉글랜드 역시 공화제로 전환됨에 따라 대영제국은 290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분석
어록
"무엇보다도 우리는 연합왕국의 붕괴가 20세기의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리스 존슨, 2023년 의회 연설 中 |
여담
관련 자료
- ↑ 그러나 애틀리 역시 사회주의적 제국주의자(사회파시스트)였다는 부분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