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베트남 공화국 총통 |
---|
[ 펼치기 · 접기 ] |
베트남 공화국 4대 총통 응웬쑤언오아인 阮秀英 | Nguyễn Xuân Oánh | |
출생 | 1931년 1월 3일[1]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통킹 쁘랑떵 | |
국적 | 남베트남 |
사망 | 2013년 8월 29일 (향년 81세) |
사이공직할시 사이공중앙병원 | |
직업 | 교육인, 공무원, 정치인 |
임기 | 사이공대 경제학 교수 |
1963년 9월 ~ 1977 4월 | |
베트남 공화국 부총리 | |
1977년 5월 24일 ~ 1979년 1월 16일 | |
베트남 공화국 4대 총통 | |
1983년 4월 18일 ~ 1991년 4월 17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의 경제학자, 정치인이다.
생애
초기 이력
촉망받는 경제학자
민주화 운동가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는 응웬쑤선오아인 |
민주파로 돌아선 오아인은 저술 활동, 강연 등을 통해 쩐티엔키엠 정부에 지속적으로 선거의 공정성 보장을 요구했다. 하지만 물증은 없이 심증만 있던 와중에 정부와 여당의 정치공작에 대한 물증이 발견되었고 분노한 베트남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오아인은 민중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했다. 사이공대 학생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오아인은 동료들과 함께 사이공 박람회장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오아인은 광장에 모인 대중 앞에 서서 연설을 하며 시위대에게 용기를 불어너었다. 10월 18일에는 사이공 꽝쭝 광장에 자그마치 100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미국과 서방 세계도 쩐티엔키엠 정부를 압박하였으며 미국 대사는 "시위대의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들이기를 권고하며 유사시 어떠한 종류의 도움도 줄 수 없다"라고 통보했다. 심지어는 군부까지 등을 돌리자 쩐티엔키엠이 직접 TV 방송을 통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담화에서 쩐티엔키엠은 지방자치제 실시와 UN에 의한 선거감독, 그리고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을 약속했다.
오아인은 그 여세를 몰아 야권 통합에 성공, 베트남 민주당을 창당했고 당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1983년, 총통 선거에서 야권 단독후보로 선출되었고 공화당 후보를 득표율 54%대 43%로 꺾으면서 베트남 공화국의 4대 총통에 당선되었다.
남베트남 총통
베트남 공화국군을 사열하는 응웬쑤언오아인 |
총통에 당선된 오아인은 가장 먼저 군대에 손을 댔다. 공화혁명당 집권기 동안 군은 큰 혜택을 받아와 기득권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부 장성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오아인은 선수를 쳐 이들을 체포, 전역시켰다. 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한 오아인은 금융실명제 도입을 시도했지만 공화당이 여전히 과반을 차지하고있는 국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곧이어 치루어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 과반을 확보하면서 오아인이 원하는 어떤 정책이든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아인은 금융실명제를 곧바로 도입하지 않았다. 국회에서의 정상적인 입법 절차를 거치게 된다면 그 사이에 은행의 검은 돈들이 빠져나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아인은 총통의 권한인 긴급조치권을 발동, 은행이 쉬는 일요일에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했다.
오아인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창하며 복지와 경제적 자유의 조화를 꾀하였다. 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약화시키고 국영기업을 민영화시키는 동시에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 산업재해보험 등을 도입했다. 또한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협정을 잇달아 채결하며 무역을 부흥시켰다. 1988년에는 북베트남과 휴전조약을 맺고 부분적 협력에 합의해 남북대립을 완화했다.
각종 개혁의 성공과 80년대 경제 호황 덕에 오아인은 아주 수월하게 재선에 성공하였지만 2기 정부 후기에는 글로벌 경제가 침체되면서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당시 민주당은 민주사회주의 계파부터 경제적 자유주의 계파까지 포함하는 反공화혁명당 빅텐트 정당이었다. 오아인이 지향한 사회자유주의, 제3의 길 노선은 경기 호황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까지는 중도파에서 좌파, 심지어는 일부 중도우파까지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실업률이 오르자 좌파는 좌파 정당으로 이탈했다. 오아인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시장 개입을 시도하자 경제적 자유주의자들까지 이탈했다. 이런 이유로 오아인은 2기 정부 말기에 들어 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 결국 차기 대선에서 야권 분열로 인해 여야가 다시 교체되며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다.
말년
노년의 응웬쑤언오아인 |
오아인은 은퇴 후 각종 경제서적, 자서전 등의 집필 활동을 하였고 사이공대 명예 교수로 임명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맡기도 하는 등 환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2년 암 투병 중인 사실을 공개했으며 2013년 사이공 중앙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통합과 화해, 균형과 평화 응웬쑤언오아인이 사망 직전 글로 남긴 유언 |
그해 9월 6일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장례식에는 남베트남 사회 지도층과 각국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다. 베트남 공화국 애국지사릉 총통 묘역에 안장되었다.
성향과 평가
어록
정부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지만 국민은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1982년, 꽝쭝 광장에 운집한 시위대를 독려하며 |
독재는 자유를 파괴할 뿐더러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불러온다. 이 세상에 용납될 수 있는 비효율은 복지에서의 비효율 뿐이다. |
일부 청년들이 그런 하찮은 책에 홀려 그런 한심한 사상을 추종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구만. 공화혁명당이 오아인을 상대로 색깔론을 시전하자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항변하며 |
문제는 경제다! 총통 선거 유세 중 |
여담
- 대학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과제를 어렵게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해주었고 이론보다는 실사구시를 중요히 여긴 덕에 학생들로부터 평판이 좋아 학생들 사이에서는 멋쟁이 교수님이라 불렸다.
- 1972년 동아시아포럼에서 김대중을 만난 적이 있다. 1982년, 김대중은 베트남 민주화 운동 당시 민주화 시위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국회의원 자격으로 남베트남에 방문해 오아인을 만나 격려했다. 둘은 1991년에 한국 총통 대 남베트남 총통의 자격으로 정상회담에서 재회했다.
- 응우옌쑤언오아인이라고도 불린다.
선거 이력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3 대선 | - | (52.1%) | 당선 | 초선 | |
1987 대선 | - | (56.0%) | 당선 | 재선 |
소속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