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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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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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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총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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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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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총통 이승만 李承晩 | Rhee Syngman | |||||||||||||||||||||||||||
출생 | 1875년 3월 26일 | ||||||||||||||||||||||||||
조선 황해도 평산도호부 (現 황해도 우남군) | |||||||||||||||||||||||||||
사망 | 1979년 11월 30일 (향년 104세) | ||||||||||||||||||||||||||
서울수도시 종로구 이화장 | |||||||||||||||||||||||||||
국적 | 조선 (1876 - 1897) 대한제국 (1897 - 1910) 무국적 (1910 - 1945) 미군정 조선 (1945 - 1948) 대한민국 (1948 - 1957) | ||||||||||||||||||||||||||
임기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 ||||||||||||||||||||||||||
1919년 4월 11일 ~ 1921년 3월 11일 | |||||||||||||||||||||||||||
대한민국임시입법위원회 위원장 | |||||||||||||||||||||||||||
1946년 2월 12일 ~ 1948년 7월 23일 | |||||||||||||||||||||||||||
대한민국 총통 | |||||||||||||||||||||||||||
1948년 7월 24일 ~ 1973년 5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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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승만의 공식 초상화 |
대한민국의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의 초대 총통으로써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장장 25년간 집권했다.[2]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단정 출범과 한국 총통
제헌헌법을 공포하는 이승만 (1948년) |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오랜 압제 끝에 독립을 맞이하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평소 친분이 있는 미국의 여러 사회 고위층들의 도움으로 10월 초 서울에 들어온다.
당시 이승만의 지지율은 여운형 다음으로 높았지만 그에게는 그만의 세력이 없었다. 고로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정치단체인 독립논단을 창설한다.[3] 이후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하자 한국독립당, 조선국민당, 한국민주당 등 주요 우익 정당들을 모아 국민의회를 창설하였으며 이후 국민의회 소속 정당들과 단체들을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미군정은 당시 한반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고, 이에 따라 한국인들로 구성된 자문기구인 대한민국임시입법위원회를 창설했다. 이 위원회는 총 3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우익 성향의 반공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차기 신생 독립정부를 주도할 인물이 될 터였다. 미 당국은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두 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 명은 이승만이었고 또다른 한 명은 바로 서재필이었다. 이들이 후보에 오른 것은 그들이 미국에 우호적이고 고학력자이며 연륜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을 붙일 생각으로 서재필을 서울에 귀국시켰다. 하지만 서재필은 권력에 관심이 없었고 특별한 정치 활동도 없이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자 미국에게는 이승만이라는 선택지 하나만이 남았다. 결국 이승만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이승만은 과도정부 당면과제 12조를 발표하여 자신의 정책 구상을 밝힌다.
1948년 1회 총통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은 당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의 중도좌파 근로인민당과 연정, 근민당의 부당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여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호남 지주들이 지지기반인 한민당계가 탈당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이승만은 또한 국민교육헌장을 공표하여 초등학교 교육을 의무화하고 전국적인 초ㆍ중등학교 건립에 나섰다. 또 인구총조사와 부동산총조사를 시행해 건물의 측량과 세입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유능한 지휘관들을 등용하여 배치하고 군수사령관 채병덕을 시켜 과거 일본이 만들었다가 독립 후 방치되었던 부평과 부산진의 조병창을 복구하고 각종 소형 무기류와 탄약을 자체 생산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았고, 이는 통일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통일전쟁의 승리 후, 평양 선언으로 통일을 선포한 이승만은 곧바로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경제건설에 착수했다. 이 시기, 삼백산업으로 대표되는 경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3선 개헌과 장기집권
연설로 개헌 지지를 호소하는 이승만 (1957년)[4] |
2회 대선과 3회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뭐진 이승만은 개헌을 시도했다. 당시 헌법은 총통의 3연임을 금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폐지하려고 한 것이었다. 민국당은 개헌선 이상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개헌 명분이 취약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던 김구 총리가 버마에서 암살당하는 등 공안 정국이 조성되면서 민국당은 1957년 3월 23일, 개헌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이승만과 김구는 절친한 사이었지만, 김구의 암살은 오히려 이승만에게 기회가 되었다. 김구는 민국당 내에서 이승만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구가 암살되면서 민국당 내의 세력 균형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승만 독주 체제가 만들어졌다.
개헌에 대한 반발로 야권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이승만은 통합야당이 자신과 여당의 입지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여겼다. 정부는 야권 통합 시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으며 이승만은 김언봉 간첩 사건을 통합 야당 창당 직전에 발표하여 야권, 특히 진보 진영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야당들은 합당하어 자유당을 창당했다. 만약 이승만의 목표가 통합 야당에서의 좌파 세력 제거였다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개헌을 통해 3선 금지조항을 철폐한 이승만은 헌법적으로 영구 집권을 할 권리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승만이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고 해도 장기집권을 위해 개헌까지 감행하는 것은 대중의 눈에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다. 대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승만은 국민연금제도와 국민건강보험을 도입하는 등 복지를 강화해 유화책을 펼쳤다.
이승만의 개헌에 특히 많이 저항했던 이들은 대학생들이었고 대학가에서는 3연임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이어 열렸다. 아이러니한 점은 대학생 계층은 이승만의 교육 중시 정책으로 크게 성장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덧없는 영광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1975년) |
개헌의 여파로 제3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서 이승만은 힘겹게 당선되었으나 제4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는 득표율이 다소 높아졌다. 이는 빠른 경제성장과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 덕분이었다. 이전의 경공업 중심의 성장과는 달리 그의 4기 재임기간 동안 중화학공업이 크게 성장했다. 또한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가 수입을 증대시키고 시설을 개선하는 등 도시와 촌락의 균형을 맞추려는 정책도 활발히 펼쳐졌딘. 4회 총통 취임 후에는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방비를 크게 증액하는 등 동아시아 전쟁을 준비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여 실전경험이 있는 장교단을 양성하고 M113 장갑차, M48 패튼 전차 등의 신무기를 확보했다.
여세를 몰아 5선에도 성공한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설득하여 4+1밀약[5]이라고도 불리는 베를린 밀약을 체결했다.
베를린 밀약과 뉴어크 평화조약에는 외무장관 최규하가 파견되었지만 베이징에서 있었던 승전 기념식에는 직접 참석했다. 이승만은 베이핑에서 만난 소런 서기장 브레즈네프에게 무궁화대훈장과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 광화대장 자그마치 총 3종의 훈장을 수여했다. 훈장 마니아 브레즈네프는 싱글벙글해서 즉석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를 약속했다.
1973년 총통직 퇴임 후에는 1975년까지 민국당 주석을 맡으며 김영삼 총통과 함께 국정을 공동 운영했다. 이후 1976년에 있었던 7회 총선에서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으나 이승만이 총통이자 당 주석인 김영삼과 상의도 없이 당 내 우파를 공천학살하는 바람에 당이 두 동강 났고 민국당은 이전 선거 대비 의석이 100석이나 줄어드는 굴욕을 당했다.(...) 이 일로 김영삼과 사이가 틀어졌다. 1978년까지 인재영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서석준, 김종인, 김재익, 심상우 등을 영입하여 이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김영삼과 대립했다.
2차 개헌 당시에는 헌법 전문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부로 규정되었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국부 이승만 총통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 |
1979년 지병으로 서울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104세.
주요 정책
- 국민교육헌장 선포 (1948)
- 이승만 라인 선포 (1949)
- 토지개혁 (1949~1950)
- 국토재건계획 (1951~1954)
-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1955~1960)
- 제1차 국가교통망 정비계획 (1958~1965)
- 제1차 번개사업 (1957~1964)
- 제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1960~1965)
- 혼분식 장려운동 (1960~1966)
- 새마을운동 (1963~1981)
- 제3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1965~1970)
- 제2차 국가교통망 정비계획 (1966~1973)
- 식량자립계획 (1968~1982)
- 녹화사업 (1969~1978)
- 제4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1970~1975)
- 율곡사업 (1972~1975)
사상
정치관
경제관
사회관
외교관
종교관
업적
이승만은 하느님께서 한국을 위해 내려주신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지도자다. 남베트남 초대 총통 응오딘지엠, 1958년 |
이승만이 없으면 신한국도 없다. 김영삼, 1970년 |
통일
통일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승만은 북한의 침공을 어느 정도 예상한듯 하다. 그로 인해 이승만은 능력있는 지휘관들을 전방에 배치하고 미국에 요청하여 각종 무기를 제공받았다. 그중에는 슈퍼바주카와 M4A3E8 셔먼 전차 30량도 포함되어있었는데, 이들은 전쟁 초기 미군의 본격적인 지원이 현실화되기 전에 북한의 기갑부대를 저지하는 데에 톡톡히 효과를 냈다.
이승만이 전투를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군사력 을 강화하여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공이 있다.
다만 통일전쟁은 헌법에서 지향하던 평화적 통일이 아닌 힘을 통한 무력 통일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산업화
전쟁이 끝나면 하루빨리 부흥 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 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 건설 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 사업 건설 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미국이 돈을 못 내겠다면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 달러로 공장을 지으라. 1951년 1월 13일, 국무회의에서 |
가장 큰 공으로 꼽히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이다. 1950년대에는 삼백산업으로 대표되는 경공업이 크게 성장했고 1960년대부터는 중화학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50년대 미국은 자국이 한국에 돈을 지급하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구조를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문경 비료 공장, 남포 시멘트 공장 등을 건설했다. 비료는 농업의 기반이 되는 물품이며 시멘트는 전후 시설물 복구에서 필수적인 자원이었기에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통일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된 이북 지역의 발전소를 복구하고 적성국이었던 중공과 합의를 통해 수풍댐을 공동 운영하여 전력 공급을 원활히 하기도 했다.[6][7]
1963년에는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었고 각 지역의 거점도시와 남동 임해 벨트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건설되었다. 또한 전국의 고속도로와 철도망이 정비되었으며 50여개소의 댐이 건설되었다. 통일전쟁이 끝난 1951년부터 이승만의 마지막 총통 임기가 종료된 1973년까지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9.6%에 육박했다.
농어촌 부흥
(좌)새마을운동 깃발 | (우)새마을운동 홍보 포스터 |
급격한 산업화로 도시는 크게 발달했지만, 청년층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촌락은 쇠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와 촌락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행된 정책이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촌락의 도로와 가옥을 개선할 뿐만 아라 생산량이 많은 미곡종을 개발하고 양식장을 건설하는 등 농어촌 주민들의 소득을 개선하였고 촌락민들의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1년의 시범시행기간을 거쳐 1962년 이중곡가제를 도입하였다. 이중곡가제는 정부에서 농촌으로터 쌀을 고가에 사 도시 주민들에게 저가에 판매하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저임금에 시달리는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고를 덜어주는 동시에 농촌 가계의 수입 또한 증대시켰다.
이러한 농어촌 부흥 정책 덕에 촌락 지역은 이승만 정부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되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민주주의 정착
다른 신생 독립국들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독재자가 된 반면, 이승만은 현실 역사와는 달리 장기집권으로 비판을 받을지언정 독재자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충분히 독재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네임드 독립운동가라는 타이틀과 통일전쟁의 승리 덕분에 국민으로부터는 지지를, 군부로부터는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헌법을 고쳐가며 연임했을 지언정 독재는 하지 않았다. 헌법 개정과 장기집권 또한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의 일이었다. 임기말에는 보도지침을 폐지하기도 했다.
교육
이승만은 교육가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역시 교육가였던 김구처럼 국민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이승만 정부는 교육에 대대적으로 투자하였는데, 1950년대 국가 예산의 25%가 교육 분야에 쓰였다. 이승만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였고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였으며 매년 국비유학생 30여 명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시켰다. 1948년 70%를 웃돌았던던 문맹율은 1958년 10% 언저리까지 줄어들었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대규모의 산업역군과 지식인을 배출해 한국의 경제발전과 산업화, 더 나아가 민주주의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토 확장, 완충지대 확보
동아시아 전쟁으로 남만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베이징 일대는 중화민국령으로 하여 중공과의 완충지대를 확보했다. 현대 중공의 국력을 생각해보면 소련보다 중공을 더 경계하여 완충지대를 형성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8]
다만 후술할 이유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기도 힌다.
비판
독재자가 되려 하십니까. 김대중, 1956년 |
그는 조조와 같은 간웅이다. 언젠가 우리 뒤통수를 후려칠 것이 분명하다. 저우언라이, 1969년 |
정치 공작
김언봉 간첩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012년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자유당 창당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부터 김언봉이 아웅산 묘소 테러에 연루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들어났다. 그런데 하필 자유당 창당 직전에 이를 발표한 것은 야권통합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권력욕
제헌헌법은 총통의 3연임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총통의 연임제한을 완전히 폐지해버렸다. 비록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지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개헌까지 한 것은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 부분이다.[9]
자뻑
이승만이 총통에 취임하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자기 자신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과 무궁화대훈장을 셀프 수여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승만은 평소에 오직 이승만 자신만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자칫하면 선민의식에 빠져 독재를 시도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생각이다.
불필요한 전쟁
동아시아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넓은 영토와 중공으로부터의 완충지대를 얻었으나 입은 피해 또한 컸다. 전쟁 기간 중 만여 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부상당했다. 또한 한국이 선공을 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전쟁은 부도덕한 전쟁이었다는 평이 많다.
그 외에도 베트남 전쟁 역시 굳이 개입할 전쟁이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약 4천 명의 국군 장병이 베트남에서 전사했으며 고엽제 피해자는 그보다 많다.
평가
한국갤럽 선정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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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기념곡 <우리 대총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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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평생 한결같이 몸바쳐오신 고마우신 이(李) 대총통 우리 대총통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우리 대총통> |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를 존경하며 국부로 여긴다. 2000년, 2010년, 2020년에 있었던 '한국갤럽 조사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3회 연속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정계
대한민국 헌법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국부로 규정되어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을 매우 좋게 평가한다. 국무원, 국회, 대법원 등 각종 정부기관에 이승만의 동상, 초상화 기록화, 현판 등이 걸려있다.[10]
이승만이 창당한 민주국민당 거의 이승만을 신격화하다시피 한다. 자민련도 민국당 만큼은 아니지만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새누리당은 조금 애매한데, 그들의 전신인 사회민주당이 이승만의 정치공작의 최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누리당 역시 이승만에 대해서 "과가 크지만 공이 더 크다"라고 평가한다.[11]
재계
해외
어록
지금 우리 대한에게 필요한 것은 고태창연한 말잔치가 아닙니다. 우리 대한에 필요한 것은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입니다! 1948년, 내각책임제 도입을 주장하는 일부 제헌국회의원들에게 |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에 안주하는 것은 죄입니다. 1948년, 초대 총통 취임사 중 |
김일성이 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사탄을 옹호하는 연설을 할 것입니다. 1950년 7월, 통일전쟁 중 대전 임시국회에서 |
중공군이라고 어림도 없다, 암! 아아아암!! 1950년 겨울, 통일전쟁 중 중공군의 개입 소식을 듣고 |
굶주린 이에게는 밥 한 끼가 군주요 조물주인 법일세. 1955년, 김영삼에게 |
진짜 멍청한 이들은 가지고있지도 않은, 멍청한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멍청한 말보다 유익한 말을 훨씬 더 많이 검열합니다. 1957년 |
내가 살아있는 이 한 세대는 순간이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는 영원하다. 오늘 내가 밤 세워 조국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다. 1960년 |
경제 부흥 없는 민주주의는 모래 위의 성이다. 1964년 |
판을 뒤집자. 밥상을 엎자. 그리고, 대한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 1969년, 일기장에 |
누구든 작은 한국을 건드리면 아주 X되는 거에요. 1971년, 닉슨에게 |
나는 키신저 그 奀병X새X가 미 국무장관이 안 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네. 그 새X는 똑똑한 멍청이거든. 1976년 |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유언1 |
이 미친 세계에 축복을. 유언2[12] |
여담
- 비판 문단에 서술되어있듯이 자뻑이 심했다.
- 친자식이 없다. 이승만과 박승선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친아들 이봉수는 병으로 요절했고 박승선과 이혼한 뒤 재혼한 프란체스카와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1973년에 양자 이정헌, 양녀 이선희를 입양했다.
- 한국 총통들 중 최고의 명필가로 꼽힌다. 국회, 청와대, 서울시청 등 온갖 장소에 그가 쓴 현판과 서예 작품들이 걸려있다.
- 가끔 주변인들은 뜻을 모를 알쏭달쏭한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13] 하지만 대부분 죽기 직전의 말년에 한것으로 보아, 단순히 초기 치매 증상이라는것이 정설이다.
- 동상이 매우 많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이승만 동상이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동상은 우남대로의 동상[14]인데, 이승만을 불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훼손된다.[1]
그럴 때마다 서울시청은 고발 테크를 탄다
- 장단음 구별을 못했다. 지금이야 실생활에서 장단음 구별이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장단음 구별이 엄격히 지켜졌는데, 이승만은 [말]과 [말:] 모두 [말]로 발음하는 등 장단음 구별을 전혀 못했다고 한다.
- 김씨버거의 창업주 김집개가 그의 전속 요리사였다. 김집개가 김씨버거의 첫 점포를 내려 할때 이승만이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이후 김씨버거가 주식시장에 상장할 때도 이승만은 많은 양의 주식을 사 김집개를 도왔다. 그 덕에 이승만 일가는 현재 김씨버거 대주주다.[15]
- 사재로 "우남학원"이라는 고아원 겸 학교를 운영했다. 현재의 우남재단의 전신이며 양자 이정헌과 양녀 이선희가 이 우남학원 출신이다.
- 서구식 식습관 도입을 줄기차게 시도했었다. 밥 대신 빵을 먹자는 얘기는 아니었고 육류와 유제품 섭취를 늘리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국가 재정이 워낙 빌빌대던 시기라 학교에서의 무상급식과 무상우유급식은 재무부장관들의 반대로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임기 말에야 실시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수십년을 생활한 이승만은 한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체구가 왜소한 것이 단순히 가난해서 밥을 많이 못 먹은 것 때문만 아니라 식습관 자체의 문제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매체에서
영화ㆍ드라마
게임
문명 시리즈
반갑습니다. 나는 새로운 대한의 설계자, 이승만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겠지요. 처음 접촉 시의 인사말 |
문명 시리즈 개근맴버. 문명1서부터 4까지 주욱 나오다가 문명5에서는 나오지 않았다.[17]
문명6에서 다시 나왔다. 이승만 AI는 경제력과 산업력이 우수한 문명을 선호하는 특성이 있다.
하츠오브아이언 시리즈
하츠오브아이언 시리즈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지도자(민주국민당 소속)으로 나온다. 특성 "조용한 일꾼 (정치력 획득 +15%)"를 달고있으며 인게임에서 일본으로 한국을 해방시키면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을 플레이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볼 일이 별로 없다.
모드에도 자주 등장한다.
- 카이저라이히: 일본제국의 정치인으로 나온다. 이름은 "리노이에 쇼반(李家承晩)". 대정익찬회 개혁파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이승만 루트를 통해 총리로 만들 수 있다.
- Millennium Dawn: 모드 배경이 현대인 만큼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한국의 국민정신 중에 "이승만의 유산"이 있다. 효과는 안정도 +5%. 전쟁지지도 +5%, 일일 친서방주의 관점 지지도 +0.01
- 냉전: 철의 장막: 대한민국 지도자로 나온다. 소속 정당은 민주국민당(민주주의). 국가중점에서 이승만 루트를 타다가 한국전쟁의 결과에 따라 탈 수 있는 루트가 다르다. 한국이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일한다면 트리를 계속 타다가 남만주 영유권을 주장하며 중국을 칠 수 있다. 한국전쟁이 무승부로 끝난다면 철저한 친미정책으로 국가를 개발하다 독재의 길에 빠지고 반정부 시위로 인해 하야한다.[18] 한국이 한국전쟁에서 패한다면 제주도로 이동해 계속 집권한다.
개인 특성은 핵심영토에서 공방 +10%, 소비재 공장 -1%, 일일 정치력 획득 +0.01, 이념 변화 방어 +50%로, 군사, 생산, 정치 모든 면에서 버프를 주는 사기적인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서적
역대 선거 결과
선거 종류 | 연도 | 소속정당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국회의원 선거 | 1948 | 전국구 1번 | 당선 |
초선 | |
총통 선거 | 1948 | 71.32% | 당선 |
초선 | |
총통 선거 | 1953 | 63.3% | 당선 |
재선 | |
총통 선거 | 1958 | 53.3% | 당선 |
3선 | |
총통 선거 | 1963 | 56.8% | 당선 |
4선 | |
총통 선거 | 1968 | 58.2% | 당선 |
5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독립협회 | 1897 - 1898 | 정계 입문 |
무소속 | 1898 - 1909 | 해산[19] |
대한인국민회 | 1909 - 1924 | 창립 |
무소속 | 1924 | 탈퇴[20] |
대한인동지회 | 1924 - 1925 | 창립 |
무소속 | 1925 | 탈퇴[21] |
흥업구락부 | 1925 - 1938 | 창립 |
무소속 | 1938 - 1948 | 강제 해산[22] |
1948 - 1979 | 주석 추대로 입당 사망 |
- ↑ 이승만이 은퇴 후 만든 환경단체
- ↑ 5선 총통이다.
- ↑ 다만 이승만 본인은 독론에 가입하지는 않았는데, 차후 정계 개편에서 일개 정당 지도자로 취급받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 ↑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도 보인다. 조선일보는 이승만에 유리한 보도들을 쏟아내며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다.
- ↑ 4개 참전국(한국, 중화민국, 소련, 인도)과 1개 지원 및 방관국(미국)
- ↑ 다만 통일전쟁 말기 중난하이 밀약을 맺어 완전히 적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서중국 관계 참고
- ↑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하는 1970년까지 공동운영되었으며 이후에는 한국이 장악하였다. 수풍댐은 현재까지도 한국전력공사가 운영하고 있다.
- ↑ 만약 중공과 국경을 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국방비를 지출해야했을 것이다.
- ↑ 이 개헌과정에서 위에 언급한 정치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 ↑ 국회에는 헌법을 공포하는 이승만의 기록화가, 국무원 1층 로비에는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는 이승만의 기록화가, 청와대에는 이승만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 ↑ 새누리당 김문수 주석 공식 논평, 2020년
- ↑ 이 유언은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전쟁 실질적인 패배를 가정한 소설의 제목으로 패러디된다
- ↑ 예를 들면 "난 분단된 진짜 조국보다 더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었어", "그 사람 영혼은 어디로 간걸까", "난 남의 자리를 뺏었어" 등등이다.
- ↑ 원역사의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
- ↑ 김씨버거 지분의 약 13%를 이승만 일가가 보유중이다.
- ↑ 위장명으로, 내부적으로는 암살공사라고 불렸다.
- ↑ 대신 선덕여왕이 나왔는데, 국내에서 반발이 심했다.
- ↑ 이승만이 하야하면 지도자는 한국민주당의 송진우로 교체된다.
- ↑ 독립협회 강제 해산
- ↑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탈퇴
- ↑ 흥업구락부 창립을 위해 탈퇴
-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강제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