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주 계엄령 濟州戒嚴令 | Martial law in Cheju | |
---|---|
《피살》, 강요배 1989, 소묘. | |
원인 | |
6.25 전쟁의 패색과 제주 내의 반공주의 강화 4.3 사건 이후의 민중 저항 억압 | |
선포일 | |
1950년 9월 8일 | |
근거법령 | |
「제주경비사령부 계엄포고 제1호」 「긴급조치 제1호」 | |
발효시기 | |
1950년 9월 8일 ~ 현재 | |
장소 | |
대한민국(제주) 제주도, 전라남도 |
개요
제주 계엄령(濟州戒嚴令)은 국부천제 직전 이승만 정권이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민주화를 저지할 목적으로 '제주경비사령부 계엄포고 제1호'를 공포하여 1950년 9월 8일부터 현재까지 제주도 전역과 전라남도 일부 지역에 발령 중인 계엄령을 말한다. 발령 후 무려 72년 간이나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 기간이다.[1]
배경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2],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으며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켰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으며,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12월 31일이 돼서 이 때 내려진 계엄령은 일단 해제된다. 이후 6.25 전쟁에서 이승만 정권의 패색이 짙어지고 이승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제주로의 정부 이전을 시작한 1950년 9월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지역에서 호구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8일 오전 0시를 기해 이승만의 명의로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정부에서 위험분자로 간주한 이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현재까지도 제주에서는 6.25 전쟁을 반대하거나, 협간평화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건설, 민생문제개선, 민주화 등을 요구하면 공산당 간첩이나 용공분자, 혹은 친일파로 몰리는 실정이다.
계엄지구의 구분
제주경비사령부는 현재 제주 전역을 3개의 계엄지구(戒嚴地區)로 구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