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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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명 | 韓人社會黨 |
영문명 | Korean Socialist Party (KSP) |
창당일 | 1917년 5월 11일 |
전신 | 혁신동지회 |
분리된 정당 | [1] |
당명 변경 | 1938년 월 일 / 조산공산당 |
해산일 | 1946년 1월 5일 |
후신 | 틀:노동자대중전선 (개화) |
역대 총리 | 양기탁 / 제13대 • 1930~1934 이동휘 / 제14대 • 1934~1935 유동열 / 제15대 • 1935 |
당수 | 이동휘 / 초대 박헌영 / 말대 |
이념 | • 1917-1935 사회주의 베른슈타인주의, 구조개혁주의 (사회당 우파) 혁명적 사회주의, 좌익민족주의 (사회당 좌파) 혁명적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박헌영계) 좌익민족주의 (유동열계) |
스펙트럼 | • 1917~1935 좌파 빅텐트 (중도~극좌) 좌익 ~ 극좌 |
국민의원 | 35석 / 300석 (11.7%)[2] |
당색 | 적색 (#B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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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조직 | (1919~1935) |
(1935~1938) |
개요
1917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역사
창당
20세기 초,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추원에서 혁신동지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동자의 처우 개선, 근로기준법 제정, 노조 활동 방해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혁신동지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벌였으나 별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에 혁신동지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을 느꼈고 1917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혁신동지회 회원 중 대중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휘와 이위종이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성장과 집권
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도시 노동자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했다. 1927년, 공장 관리진 측의 부당한 대우에 원산 노동자연합회가 전면적 파업을 일으킨 원산 총파업 당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파업을 지원하며 그 세력이 급속도로 불었다.
1929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한국의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30년 총선에서 과반의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제3당으로 굴어떨어지고 한인사회당이 대한국민회를 제치고 중추원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첫 사례였다.[3]
총리로 선출된 이는 사회당 온건파의 거두 양기탁이었다. 양기탁 내각은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고 노조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양기탁 내각은 농촌 문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4] 경제 정책 역시 이전 수권 정당들에 비해 상당히 투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열, 김안산[5], 박헌영 등 사회당 급진파는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대한국민회와 대한민주당, 그리고 자유당은 한인사회당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권 축하 편지를 받은 것을 문제삼아 사회당을 소련의 프락치 정당이라는 주장을 하며 파상공세를 가했다.
안팎의 압박이 계속되던 와중에, 대공황으로 인한 군비 축소와 소극적 팽창에 불만을 품은 급진파 장교들이 12.5 반란사건을 일으키자 결국 양기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내란 진압을 지휘한 이동휘가 당수에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분열과 쇠퇴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9기 지도부[6] |
이동휘는 당내외의 걱정을 뒤엎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934년에 치루어진 13회 총선에서 한인사회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민족단결연맹의 약진으로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이 연립하여도 한인사회당의 의석수보다 적었기에 한인사회당은 내각구성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만의 단독 소수내각을 꾸리기에는 국정운영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기에 이동휘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유당과의 연정을 시도하였고 교섭 끝에 연정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5년 이동휘가 급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급진파와 온건파 양측의 인정을 받던 이동휘가 사라지면서 한인사회당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총리 대행을 맡았던 신채호와 부당수 김립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지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진파와 온건파 양쪽 모두로부터 불호를 받았기에, 김립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당 내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온건파와 급진파를 중재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일한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맞붙게 되었다. 양측은 차기 당수를 뽑을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었는데, 193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치루어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지지를 받은 유동열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조용은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수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유동열이 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추진을 선언하자 이에 자유당이 반발해 연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총리 선출 직후 민족단결연맹에 의해 발의된 내각불신임안이 민단련,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에 사회당 온건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총리 유동열에게 코민테른 가입 추진 선언을 철회해 타 정당들을 안심시킬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탈당하겠다고 급진파를 압박했다. 이에 사회당 급진파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조용은, 안공근 등 온건파 인사들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온건파는 집단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공산당으로
그동안 대한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나치게 온건하고 현실안주적이었다. 이제 대한 인민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박헌영, 당수 취임식에서 |
유동열은 국무총리 사퇴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치러진 선거가 1935년 제14회 총선이다. 14회 총선에서 국민회와 민주당은 선거연대를 꾸려 집권에 성공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지지율도 낮아진 상황에서 한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된 상태였던지라 표가 분산되어 한인사회당은 의석을 절반 이상 잃으며 실권했다.
14회 총선에서의 참패 이후 당수 유동열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렸다. 이미 온건파는 탈당해 다른 살림을 꾸린 상태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박헌영계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인 유동열계에 도전해왔다. 결국 유동열은 박헌영계의 압박에 총선 패배와 분열의 책임을 지고 1935년 11월 당수직을 내려놓았다.
새로이 실시된 전당대회에서 당수에 선출된 박헌영은 당수 취임 후 당명을 조선공산당으로 변경하였으며, 이전보다 더욱 좌경화된 강령을 채택하였다.
성향
초중기
사실은 나도 우리 당에 존재하는 정파가 정확히 몇 개인지 모른다. 나 외에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양기탁 당시 국무총리 겸 당수, 1931년 |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한인사회당은 극좌 레닌주의자부터 중도에 가까운 개혁주의자까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인사들이 모인 정당이었다.
- 온건파: 양기탁, 이동녕 등의 온건파는 독일의 온건좌파 정치사상가 베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시대에 따른 자본주의의 변화에 주목하였고, 이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를 통한 민주적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폭력혁명을 부정하였으며 자본주의의 다음 발전단계가 사회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전제에도 의문을 제시했다.
- 급진파: 유동열, 김안산, 박헌영 등의 급진파는 세계 자본주의가 수십 년 내로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핸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다만 이들은 의회민주주의에는 회의적이었으나 한국의 견고한 의회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의회 진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 중립파: 이동휘, 김립 등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연이라고 보았으나 급진파와는 달리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체제 수립 과정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들은 의회민주주의에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위에 나온 3대 정파 외에도 수많은 군소정파들이 사회당 내에 존재했다. 이렇게 지나치게 넓은 스펙트럼은 사회당 분당과 쇠퇴의 단초가 되었다.
말기
유동열이 당수로 선출된 이후, 구조개혁주의를 주장하던 당내 온건파가 사회민주당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 남은 한인사회당은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사회당 내에는 다시 두 가지 정파가 대두되었다. 하나는 유동열로 대표되는 좌익 성향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극좌 성향의 친소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었다.
유동열이 당수였던 시기에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레닌주의 계열이 그들을 견제하는 모양새였지만 박헌영이 당권을 잡은 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 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당가
한인사회당 당가 인터내셔널가 The Internationa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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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저주로 인맞은 주리고 종된 자 우리의 피가 끓어 넘쳐 결사전을 하게하네. 억제의 세상 뿌리뽑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국제사회당은 인류를 위한다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국제사회당은 인류을 위한다 한인사회당 당가 <인터내셔널가> |
창당과 함께 채택된 당가. 인터내셔널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김안산이 개사하였다. 사회당 온건파는 가사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불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동휘, 신채호 등 당 내 중립적인 인사들이 그냥 쓰자(...)고 해서[7] 채택되었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는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대한공산당, 국민사회당, 자주인연맹 등에서 사용되었으나 인터내셔널가를 불호하던 사회당 온건파가 창당한 사회민주당은 독자적인 당가를 작곡해 쓴다.
역대 지도부
역대 한인사회당 당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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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당은 당수가 당의 지도자였다. 당수의 임기는 2년으로, 중임이 가능했다. 당수는 2년에 한 번 치러지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후보 4명을 뽑아 2차 투표를, 2차 투표에서도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그중에서 상위 후보 2명을 뽑아 3차 투표를 치러 선출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당수 | 의석수 (의석율) | 증감 | 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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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이동휘 | 9 / 20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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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석 1% |
제2야당 |
1919 | 17 / 25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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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석 2.3% |
제2야당 | |
1923 | 이동녕 | 39 / 250 (16%)
|
22석 8.8% |
제2야당 |
1926 | 조성후 | 37 / 250 (15%)
|
2석 0.8% |
제2야당 |
1930 | 양기탁 | 124 / 250 (50%)
|
87석 34.8% |
여당 |
1934 | 이동휘 | 115 / 250 (46%)
|
9석 3.6% |
여당 |
1935 | 유동열 | 43 / 300 (14%)
|
72석 31.7% |
제1야당 |
1938 | 박헌영 | 35 / 300 (12%)
|
9석 3% |
제2야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