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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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대 국무총리 양기탁 梁起鐸 | Yang Gi-tak | |
출생 | 1871년 4월 2일 |
대조선국 평안도 증산현 | |
국적 | 조선 (1871-1994) → 대한제국 (1894-1895) → 대한민국 (1895-1934) |
사망 | 1938년 4월 19일 (향년 67세) |
대한민국 한성부 | |
임기 | 대한민국 제11대 국무총리 |
1930년 3월 9일 ~ 1934년 1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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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양기탁 총리 초상화 |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 한인사회당이 배출한 첫 번째 총리이다.
상세
1871년 조선 평안도 증산현에서 태어났다. 우수한 성적으로 경성 관립경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학을 전공하여 졸업하였고 이후 영국인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국문, 영자 모두로 신문을 발행하던 신문사인 대한매일신보사를 운영하며 언론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양기탁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에 깊은 관김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정계에 투신하였다. 비록 첫 번째 총선 도전에서는 낙선하였으나 두 번째 도전에서 중추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함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사회당 당수에 취임한 후 사회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양기탁은 사회당 온건파를 대표하며 각종 복지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견제와 내부 급진파의 트롤링으로 인해 임기 내내 고생했다. 1933년, 군부 강경파의 쿠데타 시도인 12.5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취임 3년여 만에 사퇴하였다. 이후 한인사회당 내분 당시 조용은, 여운형 등이 이끌던 온건파를 지지하였고 한인사회당 분당 후에는 사회당을 탈당하여 무소속 신분으로 사회민주당 참의를 맡았다.
평가
양기탁은 줄곧 가난한 도시노동자들의 권리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 친화적인 각종 복지정책, 노동정책을 수립하였다. 덕분에 양기탁은 이승만과 더불어 대한민국 복지정책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또 복지정책 덕분에 내수시장이 소생되어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던 한국 경제 재건에 기여했다.
반면 부정적 평가도 있는데, 도시의 공장노동자의 권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농민 등 다른 빈곤계층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또 복지정책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단행된 군축이 한국군의 역량을 크게 악화시켜 3차 극동전쟁 초기 한국군의 연패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