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익 (개화)


대한민국 국방성총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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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성장관
초대

신복모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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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윤웅렬
4대

5대

유혁로
6대

안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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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9대

국방성장관
10대

유완수
11대

문창범
12대

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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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암
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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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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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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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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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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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장덕수
23대

홍사익
24대

지대형
25대

최용덕
26대

이범석
27대

김광서
28대

김홍일
29대

김원봉
30대

손원일
31대

채병덕
고려 병부상서 · 조선 병조판서
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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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도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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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2대 3대 4대 5대 6대
신복모 윤웅렬 유혁로 윤웅렬 한규설 조희연
7대 8대 9대 10대 11대 12대
유혁로 이용익 이범윤 권동진 이병무 조동윤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박승환 홍범도 김동삼 조성환 송호성 홍사익
19대 20대 21대 22대 23대 24대
지대형 이범석 김홍일 김원봉 김무정 채병덕
25대 26대 27대 28대 29대 30대
정일권 백선엽 최경록 이종찬 김종오 이한림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장철부 채명신 이병형 정승화 정병주 장태완
37대 38대 39대 40대 41대 42대
이기백 오극렬 이승한
32대 32대
초대 ~ 8대 : 육군통제사
국군도총제사 · 해군도총관 · 공군도총관


대한민국 국군도총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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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홍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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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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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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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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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도총관 · 해군도총관 · 공군도총관


대한민국 국군 7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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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원수 윤웅렬 · 홍사익 · 지대형 · 김광서 · 김홍일
해군원수 신순성
공군원수 노백린

틀:역대 대한자유총연맹 회장 (개화)
대한민국 초대 국군도총제사
대한민국 제23대 국방성총판
홍사익
洪思翊 | Hong Sa-ik
출생 1889년 3월 4일
조선의 기 조선 경기도 안성군
사망 1963년 1월 28일 (향년 73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한성 동국대병원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재임기간 대한민국 제18대 육군도총관
1940년 7월 21일 ~ 1945년 10월 13일
대한민국 초대 국군도총제사
1945년 10월 14일 ~ 1947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제23대 국방성 총판
1947년 12월 11일 ~ 1951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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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남양 홍씨
배우자 조숙원 (사별)
이청영 (재혼)
자녀 2남
종교 개신교
학력 대한민국 육군무관학교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정당 무소속
수훈
군사경력
복무 대한민국 국군 (1911년 ~ 1954년)
주요 보직 제3군단 종사장
67보병연대장
2야전군 군수종사관
국군도총제부 지원국 전사실 정랑
23보병사단장
육군군수본부 참관
육군보병학교장
7군단장
주오한국군 총관
국군도총제부 작전실 정랑
국군군수본부 총관
1야전군 총관
육군도총관
국군도총제사
최종 계급 원수 (★★★★★)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치올코우스키 전투
제3차 극동전쟁
태평양전쟁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여러 전쟁에 참가한 백전노장이자 군수전문가이기도 했다. 제3차 극동전쟁태평양전쟁 당시 육군을 지휘하였으며 이후 초대 구꾼도총제사, 국방성총판, 대한자유총연맹 의정을 역임했다.

생애

초기 이력

1889년 3월 4일 경기도 안성군의 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과거 많은 관리를 배출한 명문가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세가 기운 상태였고 자영농이던 아버지마저 홍사익이 6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홍사익은 머리가 좋아 동네 서당에서 공부를 하며 유학의 기초를 익혔다. 이후 친척의 권유로 군인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19세가 되던 해인 1908년에 대한민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다.

촉망받는 장교

임관 직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독일제국의 조차지였던 칭다오 공략전에 파견되어 보병중대를 이끌었고 공을 세워 정위로 진급했다. 진급 후에는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1사단 1연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1연대에서 근무하던 홍사익은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엘리트 코스인 국방대학교에 진학하였는데, 국방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지휘보직과 행정보직을 번갈아가면서 근무하였는데, 덕분에 지휘와 군사행정 양쪽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북방의 늑대

23사단장 시절 홍사익

홍사익은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주오한국군 23보병사단장을,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주오한국군 도정을 맡았다. 사단장 당시에는 주오한국군과 녹오군의 유기적 작전연계를 정착시켰으며 주오한국군 총관 시절에는 치올코우스키 전투에서 북방의 늑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투 당시 주오한국군과 녹우크라이나군은 소련 극동군에 비해 열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소련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는 한국군과 녹오군을 만만하게 보고 침공을 강행하였으나 홍사익은 제공권 확보를 통해 소련군의 주전력에 타격을 입히고 기갑부대와 보병부대의 협공으로 소련군의 전선을 붕괴시켜 소련군을 격파했다. 이 공로로 홍사익은 한국 최고등급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녹우크라이나 최고 등급의 훈장인 녹우크라이나 영웅훈장을 수훈받았다.

이후 홍사익은 육군군수본부 도정 거쳐 상장으로 진급, 제1야전군 도정에 임명되었고 1940년에는 육군도총관에 임명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평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