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승유 (총리님)


틀:다함께공화당 원내대표


황보승유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민의원 의원 (함북 황주)
제16대
강경직
제17·18대
황보승유
[1]
제18대
강경직

대한민국 민의원 의원 (함북 황주 갑)
선거구 분구
강경직
제19·20대
황보승유
현직

초대 다함께공화당 원내대표
황보승유
皇甫勝有 | Hwangbo Seung-yu
출생 1986년 3월 1일 (38세)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 덕월리
(현 황해북도 황주시 덕월1동)
현직 제20대 민의원 의원
다함께공화당 황주 갑 지구당 당협위원장
다함께공화당 원내대표
거주지 황해북도 황주시 덕월동 자택[2]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자이아파트
링크 | |
[ 펼치기 · 접기 ]
본관 황주 황보씨
가족 동생 황보승무
종교 무교 (무신론)
학력 여반중학교 (졸업)
사립 유무고등학교 (졸업)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 / 졸업)
소속 정당
지역구 황해북도 황주시 갑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7, 18, 19 ,20
소속 위원회 이북재건발전위원회
경력 대한민족청년회 행동대장
황주애국자구락부 명예고문
황주시 승격위원회 수석고문
황주청년발전재단 이사장
비국민척결전국민전선 고문
독도강치지키는 이수태재단 이사장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 위원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생애

1986년 3월 황해도 황주에서 로동당 말단 관리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살 때 터진 통일전쟁에서 황주에서 가장 먼저 전향한 아버지가 전후 황주지역의 실질적인 재건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탄탄대로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때 자신의 아들 둘 중 하나는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엄청난 야심덕분에 영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열린 17대 총선에서 황주군[3]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선거결과 아버지의 빵빵한 지원덕에 45%의 득표율로 사회당 김약치 후보를 꺾으며 당선되었다. 물론 아버지의 지원덕만은 아니였고 황보유승 개인의 강경한 민족주의적 행보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의원 당선 이후에는 극우적 성향을 대놓고 내보였다. 고구려 수복을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하여 한중 양국간의 외교적 문제로 번질뻔하기도 하였으며, 사회주의자는 비국민이기 때문에 죽여도 상관없다는 발전 역시 이때 나온 발언이다. 얼마나 망언을 하고다녔으면 당시 노무현 정부 견제를 위해 한석한석이 급했던 자유당 마저 그의 입당에는 질색을 표할정도였다. 즉, 그는 입당을 안한것이 아니라 입당신청을 할때마다 거절을 당한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수준의 지역구 관리[4][5]. 탄탄한 가문의 지원덕분에 오히려 다음 선거에서는 64%라는 엄청난 득표율로 재선하였다. 여담이지만 동시에 치루어진 황주시장 재보궐선거에서는 그의 동생이던 황보승무가 당선되었다.

이후에는 "유유히 유유히 나는 황북지역의 대표다, 나는 황북지역의 최고다 넘버원이라는것을 보여줄것"이라고 말하며 황북지사에 출마했으나, 정작 가장 인구가 많은 사리원시에서 10%도 얻지 못하고 황주시와 황주시 권역인 송림시를 제외하면 어떠한곳에서도 1위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현재 도지사인 무소속 리용준에게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그 후 19대 총선까지 독도강치지키는 이수태재단 이사장을 지내면서 지역구 관리에 힘썼다. 총선 시기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 민주당에 입당신청을 했으나 불허되자 다시한번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였다. 의원 자진사퇴와 더불어 황보승유의 존재감도 일부 잊혀진 상황에서 출마한지라 39%라는 그리 높지않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마저도 진보당에서 후보를 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민주당에게 밀려 낙선할뻔했다.

19대 임기동안은 가장 논란이였던 강경우익, 민족주의적 망언들을 자제하면서 조용히 의정생활을 하였다. 이로인해 일각에서는 황북지사 재도전을 노리는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허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창당한 다함께공화당에 입당하여 원내대표로 선출됨과 동시에 4선 도전을 선언하면서 유야무야됐다. 정치인생 처음으로 당적을 갖게된것은 덤이다. 나름 중진이고 인지도도 어느정도 있는만큼 수도권 투입론, 함북 투입론도 있었으나 자신은 황주의 뼈를 묻을것이라 발언하며 이를 부정했다.

황주 갑 지역에 대학가가 증가하고 빈촌지역이 황주 을과 병으로 이동하면서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50%의 득표율로 무난히 당선되며 지역구에서의 입지를 증명했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2010 - 2022 정계입문
2022 - 입당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0 제17대 민의원 의원 선거 황북 황주 무소속 49,877표 (45.22%) 당선 (1위) 초선
2014 제18대 민의원 의원 선거 82,324표 (64.93%) 초선[6]
2016 제17회 지방선거 황해북도지사 n표 (21.70%) 낙선 (3위)
2018 제19대 민의원 의원 선거 황북 황주 갑 27,900표 (39.45%) 당선 (1위) 3선
2022 제20대 민의원 의원 선거 40,295표 (50.02%) 4선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여담

  • 의외로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에서 위원을 지냈다. 직접 본인이 위원회 측에 참가를 타진했다고 하며, 이유는 비국민 사회주의자를 공개적으로 때려잡기 위해서라고(...)
  • 강치 복원에도 적극적인데 이유는 "강치 고기를 먹어보고 싶어서"라고 한다(...)
  • 포스터 디자인이 20년 전으로 퇴화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본인은 비용절감을 위해 스스로가 포스터를 제작한다"며 "이러면 나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포스터에 담을수있다"라고 이야기한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뭐고 자시고 당장 디자이너 쓰라는 의견이 대다수인편.

각주

  1. 황해북도지사 출마를 위한 사퇴
  2. 현대한옥이다.
  3. 당시에는 아직 승격 전이여서 황주군이였다.
  4. 그의 임기 동안 황주시의 인구가 10만명에서 15만명까지 수직상승했으며, 황주군이 황주시로 승격한것은 물론 통일 이후 황해권역 최초의 대학교인 신해공과대학이 개교한것도 이 시기이다.
  5. 이 정도는 시장이 한것이냐 하지않을수도 있는데, 당시 황주시장은 임기를 채운 시장이 한명도 없을정도로 심각하게 부패한 시장들이 재임했을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위와 같은 일들을 해낸것이다.
  6. 황해북도지사 출마를 위한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