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건 (당신들의 조선)

벨지엄 박영환 얏슈 핫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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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 에야차! 에야차!
로동당기발 따라 나가자!
에헤 에야차! 에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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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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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사건
八月宗派事件 | August Faction Incident
1956년 8월 종파사건 직전 소련에 방문한 김일성
발생일 1956년 8월 2일
원인 • 스탈린 사망과 스탈린 격하 운동
• 김일성 개인 우상화에 대한 반발
• 경제 개발 노선의 방향성 차이
결과 • 「김일성, 박금철, 김광협, 남일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에 대하여」 결정서 채택
• 만주파, 갑산파 숙청 및 와해
영향 • 남로당파 우위의 집단지도체제 확립
당사
세력
주도 남로당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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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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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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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파, 갑산파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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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만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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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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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56년 8월 2일에 발생한 박헌영남로당파, 허가이소련파가 주도하고 김두봉연안파 등이 참여한 만주파갑산파의 숙청 및 축출 사건.

배경

8월 종파사건 당시 주요 정치 파벌

제1차 거제 상륙작전의 대실패

대한민국조선전쟁에서 패전하여 제주로 수도를 이전하긴 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제주도와 더불어 경상남도, 전라남도의 일부 부속도서를 여전히 점거하여 조선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이어오고 있었다. 특히 경상남도에 위치한 거제도에는 상당한 규모의 육군과 해군 병력이 집결해 있었으며 그러한 거제도와 가장 가까운 본토인 통영군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도 안되었기에 조선에게 있어서 거제도의 '해방'은 조선전쟁 승전 이후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거대하고 시급한 사안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1951년 12월 거제도를 향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여 거제도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이 상륙작전은 조선인민군 해군의 부족한 실전 경험, 거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과 해군 병력의 맹렬한 저항, 미군의 지원 등으로 인하여 압도적인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이 이러한 결말을 모르고 상륙작전을 거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민족보위상이었던 최용건과 총참모장 강건, 야전사령관 최현 등은 해군의 열약한 실전 경험, 12월이라는 작전 개시 날짜의 부적절함, 병사들의 사기 저하 등의 이유를 들어 이러한 상륙작전에 대해 격렬한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반대 의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상륙작전을 강행하였으며 상륙작전이 대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에게 책임을 묻는 최용건, 최현을 향해 "야, 이 새끼야! 작전이 잘못되면 나뿐만 아니라 너희도 책임이 있어!"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그들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전부터 성격이 매우 험악하기로 소문이 났던 최현과 그 당시 여러 군사 정책에서 김일성과 상당한 갈등을 빚던 최용건은 이러한 김일성의 태도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러한 업보는 곧 8월 종파사건 당시 이들이 김일성을 배반하고 박헌영과 허가이의 세력에 합세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1956년 2월 25일 모스크바에선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해당 당대회에서 보고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소련 공산당원을 비롯하여 제20차 전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전 세계의 대표단들에게 비공개 연설을 진행하는데 해당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과 그 당시 공산권에 만연해있던 스탈린 숭배 경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흐루쇼프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개인숭배를 배격했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시작하여 레닌이 죽기 직전에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한 유언장, 당시 레닌그라드 제1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Серге́й Ки́ров)의 암살을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내용[1], 대숙청, 독소전쟁 당시 스탈린의 여러 실책 등을 근거로 들며 스탈린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가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독소전쟁은 스탈린의 '덕분'에 이긴 것이 아닌,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소련의 정치 풍조는 기존의 너 죽고 나 죽자 풍조에서 더욱 신사적인 풍조로 교체되었으며 기존의 굴라크도 폐지, 정치범들의 인권도 개선되었다. 기존 엠버밍되어 레닌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있던 스탈린의 시신도 매장되었으며 스탈린이 기존에 사용하던 직책 명인 '서기장'도 '제1서기'로 교체[2],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각종 지명도 원래대로 환원되거나 새로운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러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소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동구권을 비롯한 다른 공산주의 국가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 상황에서 김일성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 상당한 반감을 품고 이를 마오쩌둥과 함께 '수정주의'라고 맹렬히 비판하였으나 박헌영허가이를 비롯한 인물들은 이러한 소련의 변화에 희망을 품고 이전부터 끊임없이 숙청을 거듭하고 개인숭배 경향을 점점 내비치기 시작했던 김일성을 조선로동당 내에서 완전히 축출할 수 있을 것이란 일말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희망에 부합하듯 8월 종파사건 당시 소련은 본인들의 노선에서 이탈하려고 시도한 김일성 대신 박헌영과 허가이의 편을 들어주며 김일성 축출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의 이견

조선전쟁 이후 남조선 일대와 북조선 일부 해안지역은 전쟁통과 미군의 무차별적 폭격으로 인해 기반시설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에 1950년 종전 직후 조선은 곧바로 전후 복구 사업에 돌입하게 된다. 전후 복구를 위한 비용은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의 무상 원조가 있었기에 크게 문제될 건 없었지만 이들은 '전후 복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김일성은 빠른 국력 성장을 위한 중공업 중심의 전후 복구를 주장하였지만 이러한 김일성의 주장에 대해서 각지에서 많은 반대 의견이 터져나왔다. 외부적으로는 소련이 이러한 김일성의 주장에 우려를 표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의 총재였던 김찬을 비롯한 조선 내 테크노크라트들과 소련의 입장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르던 소련파 등이 이에 반대를 표했다.

당시 이러한 갈등은 소련이 지향하던 공산주의 국제 분업과 크게 연관이 있다. 소련은 각 국가가 독자적으로 산업을 육성할 경우 공산권 진영 전체에서 중복 투자가 만연할 것을 우려하여 각 국가의 특성에 맞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당시 서방 진영보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위축되어있던 소련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서방 진영에 맞설 경제적 역량을 구축하고자 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으나 그 당시 조선은 동유럽보다 공업이 상당히 위축되었던 상태였으므로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 따른다면 조선의 중공업 투자가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며 조선에게 돌아오는 것은 농업과 광업, 자급자족을 위한 최소한의 경공업 정도였을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김일성은 반대파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본인이 주도하여 중공업 중심의 전후 복구를 실시하였다. 겉으로는 상당한 경제 개발이 이루어져 대외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중공업에만 중점적으로 투자하고 농업을 천시한 것과 더불어 1954년에 내려진 개인 간 양곡 거래 금지령을 비롯한 여러 농업적 실책으로 인해 1955년 봄 대규모 식량위기가 터져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은 김일성의 이러한 중공업 중점 경제 개발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초기에는 중공업 중심의 개발을 지지했던 박헌영마저 이러한 상황에 김일성의 경제 정책에 의구심을 품으며 이는 후일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을 향한 주요한 비판점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 개발 노선은 김일성에게 충성하던 군부도 상당한 불만을 품게 만들었는데 제1차 거제 상륙작전이 대실패한 이후 대한민국이 기세등등해져서 거제에서 통영에 지속적으로 포사격을 진행하는 준전시 상황까지 돌입하였는데 그러한 와중에도 김일성은 오히려 그러한 와중에도 국방비를 줄여가면서까지 경제 개발에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기 때문이다.

과정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

김일성의 동구권 순방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원회의

김일성의 최후의 발악

승리의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

결과

[ 8월 종파사건 이전 ]
[ 8월 종파사건 이전 ]
서열순
1위
김일성
(위원장)
2위 3위 4위
박헌영
(부위원장)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
허가이
(부위원장)
5위 6위 7위
리승엽
(제1비서)
최창익
(부수상 겸 재정상)
박금철
(조직지도부장)
8위 9위 10위
최용건
(민족보위상)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남일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 8월 종파사건 이후 ]
[ 8월 종파사건 이후 ]
서열순
1위
박헌영
(위원장)
2위 3위 4위
허가이
(부위원장 겸 제1비서)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
리승엽
(부위원장 겸 제2비서)
5위 6위 7위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박창옥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최창익
(부수상 겸 재정상)
8위 9위 10위
최용건
(민족보위상)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리효순
(검열위원장)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제2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제4기) →

영향

8월 종파사건이 실패했다면?

8월 종파사건은 조선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개선장군이었던 김일성을 축출한다는 점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었다. 그 당시의 김일성이 제1차 거제 상륙작전에서 대패하고 경제 정책을 말아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반도를 통일했다는 것에서 김일성의 명망은 매우 높았으며 이러한 점에서 김책, 최용건과 같이 김일성과 친밀했지만 그의 정책에 의문을 품었던 이들도 김일성을 축출한다는 것에 대해선 상당한 우려를 표했을 정도이다.

만일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에서 축출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여파로 김일성의 축출을 주도했던 박헌영, 허가이와 같은 비(非)김일성 계파들이 이들의 반격으로 역으로 축출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들과 더불어 김책, 최용건 최현, 강건, 김영주와 같이 김일성 계파에서 전향한 이들도 함께 축출당했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김광협, 박금철과 같이 김일성과 매우 친밀하고, 8월 종파사건 당시에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반격에 나섰던 이들의 위상은 역으로 상승하여 조선은 만주파와 갑산파 양강이 주도하는 스탈린주의 과두정 국가로 남았을 것이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실시한 것에 대해 김일성이 마오쩌둥과 함께 흐루쇼프를 비난하였단 점에서 8월 종파사건이 실패했다면 조선과 소련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며 극도의 친중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국공내전 당시 중국에서 항일활동을 하던 연안파의 위상도 더불어 상승했을 것이며 김두봉, 김무정과 같은 이들도 여러 중책을 맡았을 것이다. 이들은 8월 종파사건에 참여하긴 했지만 박헌영, 허가이의 행동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 김일성 축출에 소극적으로 움직였기에 이들이 중책을 맡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숙청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 극단적인 역사학자의 경우는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 당시 김일성이 개인숭배와 관련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만일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김일성 자신의 개인숭배가 더욱 심화되어 현재 조선이 박헌영을 숭배하는 것보다 더한 개인숭배가 이루어져 공산주의 국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세습 독재까지 이뤄졌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만일 세습 독재가 이뤄졌다면 그 대상은 김일성의 장남이었던 유리 킴(김정일)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유리 킴이 진짜로 김일성의 뒤를 이어 조선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했다면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 유일무이한 부자 세습 국가로 남았을 것이다.

유리 킴은 영화감독 시절에도 <선군>을 비롯한 각종 작품에서 유독 군대의 역할을 강조하는 면을 보여왔으며 영화감독에서 은퇴한 이후 정계에 입문하면서 국방비 증액, 극단적인 반미 등을 주장하여 그가 속한 통합 러시아 내에서조차 전쟁광이라고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을 고려하여 만일 유리 킴이 김일성의 뒤를 이어 정권을 승계했다면 조선은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극단적인 반미 국가, 군국주의 국가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동인 서클 RO[3]에 속한 재일 조선인 작가 리노이에 이시모토(李家石基)가 집필한 장편 인터넷 소설인 백두혈통(白頭血統)에선 8월 종파사건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 박헌영과 허가이가 역으로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하고 김일성은 연안파, 갑산파까지 차례대로 숙청,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이후 1995년까지 조선을 통치하는 것으로 나온다. 해당 작품은 김일성 사후 그의 아들인 김정일과 그의 아들[4]이 차례대로 정권을 물려받은 2020년의 조선을 다루고 있다.

기타

각종 매체에서

영화

소설

게임

방송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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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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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나 현 역사학계에서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은 당시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당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Леони́д Никола́ев)가 본인의 아내였던 밀다 드로엘(Мильда Драуле)이 키로프와 간통하고 있었다고 믿어서 발생한 충동적인 사건이었다고 보고 있다.
  2. 이는 흐루쇼프의 후임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기에 원상복구되었다.
  3. Revolutionary Organization. 지하혁명조직(地下革命組織)이란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냉전과 관련된 대체역사 창작물을 주로 제작하는 동인 서클이다.
  4. 작중에선 김정운(金正雲)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유리 킴이 김일성의 장남이었던 것과 달리 작중에서 김정운은 삼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