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목차}} ==개요== '''장복'''(場服)은 [[천금의 시대 (개화)|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에서 발전한 개량한복으로, 전통 한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근대적인 실용성과 서구적 요소를 반영한 의복이다. 기존 한복의 불편한 요소를 개선하고,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 디자인이 변경되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널리 착용되었다. 1920년대에 절정기에 이르렀던 장복은 대공황을 거치면서 상당부분 쇠퇴하였으나 여전히 [[천금풍 (개화)|천금풍]]의 일부로서 한국의 의복사와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역사== 개화 이전까지 한국인의 복식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조선 말기 한복이었다. 그러나 [[고종 (개화)|고종]] 시기 시작된 개화를 통해 전국 여러 곳에 개방된 항구, 즉 개항장이 설치되면서 외국 문화가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한국에 상륙한 서구 문물 중에서는 서구식 의복도 있었다. 하지만 [[갑신혁명 (개화)|갑신혁명]] 이전까지는 서구 국가에 유학하는 등 서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서구 복장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다. 1884년, 고종의 온건개화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개화당 (개화)|급진개화파]]가 갑신혁명을 일으키고 [[개화정부 (개화)|개화정부]]를 구성,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개화정부는 사구 기술과 사상을 한국에 빠르게 정착시키길 원했고, 이를 위해 서구 문물의 유입을 장려했다. 그 덕에 서구의 의복문화도 인천과 동래 등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퍼졌고, 개항장에서는 양복을 입은 한국인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편 인천에서 한복점을 운영하던 김한복은 서양 의복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눈여겨보았고, 당대의 추세대로라면 언젠가는 한복이 양복에 밀려 완전히 퇴출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한복은 1900년대 말에 양복의 특징을 한복에 반영한 개량한복을 출시했고, 이 양식은 곧 인천과 다른 여러 개항장의 한복점들로 퍼지게 된다. 이 때부터 김한복의 개량한복은 '개항'''장'''에서 입는 한'''복'''<nowiki>'</nowiki>이라 하여 ''''장복'''<nowiki>'</nowiki>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1910년대 중반이 되면서 한국의 개화정책은 안정적 궤도 위에 올랐다. 또한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면서 훈정이 폐지되고 헌정이 실시되었다. 이는 곧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다수의 민중이 정치권력을 형성함을 의미했는데, 당대의 민중은 개화를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옛 전통문화에 친숙했었다. 이에 서구문화와 전통문화의 조화를 선호하는 흐름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장복 역시 사회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기존에는 양복을 고집하던 개화당파 정치 엘리트들 조차도 시류에 따라 장복을 수용하게 되었다. ==특징 및 디자인== ===남성복=== ===여성복=== ==현대의 인식== ==각주== '''''내가 반드시 그림자료를 넣고야 만다<br>그림판 딱대'''''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개화 (원본 보기) 틀:개화 배너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장복 (개화)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