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 개요 == {{인용문|'''지금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데 몰두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카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번 테제≫}} {{인용문|우리에게 카를 마르크스는 도덕적, 정신적 생활의 거장이지 지팡이를 휘두르는 목자는 아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게으른 자들을 때려 깨우는 이이며, 반쯤 잠들어 있기에 선의의 전투를 위해 자각돼야 할 훌륭한 에너지들을 깨워 일으키는 자이다. 그는, 관념들의 저 선명함과 통합성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상들에 대해 헛되이 이야기를 늘어놓길 원치 않을 경우 필요한 저 건실한 문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강렬하고 끈질긴 성격의 작업에 대한 한 사례이다. 그는 의식적이며 사색적인 인간[이라는 건축물]의 한 벽돌 조각이다. 말하면서 자신의 혀를 살피거나 심장의 떨림을 느끼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거나 하지 않으며 현실을 그 본질에서부터 포괄함으로써 이를 지배하는, 즉 민중의 심성에 침투하여 편견의 생장을 분쇄하고 관념들을 일정하게 명징화하며 도덕적 성격을 강화하는, 견고한 논법(syllogism)을 건설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안토니오 그람시]], ≪우리의 마르크스≫ (1918) 中}} {{인용문|각각의 특별한 사건들의 결과물인 이 작품들은, 모두 같은 시대와 같은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나름대로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사유하려 노력했던 우리 세대 모든 철학자들이 목도해야했던 독특한 경험들: 즉 역사가 우리에게 가하고 있는 이론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좋든 싫든 마주해야했던 마르크스의 철학적 사상의 소개에 대한 증인들이다. 역사 - 그것은 인민전선과 스페인 내전을 통해 우리의 청춘을 빼앗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은 우리에게 끔찍한 파시즘적 행위를 각인시키는 교육 효과를 불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진입" 했을 때 우리를 놀라게 했다. 소부르주아지 출신의 학생들을, 계급적인 존재, 계급 투쟁과 목표를 탐색하는 투쟁가로 바꾸어놓았다. 그것이 우리 철학자들에게 부여한 각종 증거들에서, 우리들은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을 도출해냈고, 그 결론에 따라 노동계급의 정치 조직인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제 막 끝났을 뿐이다. 우리는 잔인하게도, 당의 거대한 정치-이데올로기적 진지전에 투입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탐색에 부응하고, 그것에 대한 결과마저도 감수해야했다.|[[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Pour Marx, 1965), 서문 "오늘" 中}} {{인용문|마르크스를 독해하고, 재독해하지 않은 상태로 마르크스에 토론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러한 행동은 점점 더 많은 이론적, 철학적, 정치적 잘못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교리 기계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장치(국가, 정당, 노동조합 및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사라지는 과정에 있을 때, 우리는 변명할 수 없으며 책임을 외면할 수 있는 알리바이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가 없는 미래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 없이는 미래도 없고, 마르크스에 대한 기억과 유산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마르크스가 없는 것은 가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편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res de Marx, 1993), 제1장 中}} {{인용문|지금 시점에서 나는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언제나 비판이, 그리고 급진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니체를 독해할 때 마르크스를 함께 독해하며, 이 둘은 언제나 좋은 페어링이다. 물론 내 저작에서 다루어진 철학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적이다. 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마르크스가 이제는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는 해결해야할 시급할 과제들이 산적해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 시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끊임 없이 탐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결국에는 마르크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질 들뢰즈]], ≪나는 기억한다≫ (Je me souviens, 1993) 中}} {{인용문|마르크스가 단순히 혁명가였다면,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끊임 없는 반대 의식은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정치의 요소로 인식하고, 모든 실증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맥락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오류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유토피아에 반대한다. 그는 현재주의자이다. 그는 현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조건을 이론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 인물이다. 마르크스는 미래와 현재 사이의, 정치와 철학 사이의 빼놓을 수 없는 중계자의 역할을 수백년간 우리에게 해오고 있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La philosophie de Marx, 1994) 中}}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YouTube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글씨 크기 (원본 보기) 틀:나이 (원본 보기) 틀:디데이 (원본 보기) 틀:마르크스를 위하여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본문 (원본 보기) 틀:이브위키 명작선 24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테두리2 (원본 보기) 마르크스를 위하여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