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빌레펠트}}[[분류:빌레펠트]][[분류:제2차 벨트크리그/전투]][[분류:상륙작전]][[분류:1940년 전투]] {{제2차 벨트크리그/연표 (빌레펠트)}} {| class="wikitable" style="float:right;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536349; color:#000;"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536349; color:#fff;" | {{large|포항 상륙작전}}<br>Battle of Pohang / 浦項上陸作戦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fff; color:#000; text-align:center" |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전선의 일부 |- | colspan="3" align=center |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k포항상륙작전.png|450px]]</div>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날짜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fff; color:#000; text-align:center" | 1940년 6월 6일~1940년 7월 28일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장소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fff; color:#000; text-align:center" | 대한제국, 포항 해안 |- ! colspan="1" Width="20%"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교전국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000; vertical-align:top;" | [[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대한제국]]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000; vertical-align:top;" | [[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일본인민공화국]] |- ! colspan="1" Width="20%"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지휘관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000; vertical-align:top;" | [[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신성모<ref>당시 한국군 총사령관</ref> <br>[[파일:동방의 카이저라이히.svg|24px]] 권준<ref>당시 포항 방위군 사령관</ref>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000; vertical-align:top;" | [[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우메즈 요시지로<ref>당시 일본군 총사령관</ref><br>[[파일:일본공산당 당기.webp|24px]] 이무라 조<ref>당시 포항상륙작전 사령관</ref> |-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병력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상륙 당시 약 24,000명<br>6월 24일 약 100,000명<br>7월 24일 약 250,000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상륙 당시 약 40,000명<br>6월 24일 약 450,000명<br>7월 24일 약 1,200,000명 |-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피해규모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총 사상자 약 25만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총 사상자 약 30만명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결과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fff; color:#000; text-align:center" | '''일본인민공화국의 상륙작전 성공'''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영향 |- | colspan="3" style="width:450px; background:#fff; color:#000; text-align:center" | 일본의 한국 점령 작전 개시 |- |} {{목차}} == 개요 == 1940년 6월 6일, 우메즈 요시지로의 지휘 아래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펼친 상륙작전. [[제2차 벨트크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 개전 직후의 대한제국군의 무능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기도 하다. == 과정 == === 배경 === 전운은 아시아에서도 감돌고 있었다. 1차 벨트크리그에서의 패배 이후 공산화 된 일본은 대한제국의 대한 복수를 부르짖으며, 아시아 곳곳의 생디칼리스트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편 1차 벨트크리그로 영원한 라이벌이 될 것만 같은 일본을 굴복시키고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자 대한제국은 이참에 아시아 전역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여 독일처럼 신질서를 구축하기를 바랐다. 적백내전에 개입함으로써 적군을 끝장내버리자, 자신감을 얻은 대한제국군은 이후 독일과 함께 장제스의 북벌을 저지하는 등 아시아 곳곳에 개입하며 영향력을 늘리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역효과를 불러내어 아시아 곳곳에서 생디칼리스트들이 준동하는 결과를 배출하고야 말았다. 특히, 일본 내전에서 일본인민공화국이 승리하며 일본이 적화되자 대한제국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좌파가 남중국을 평정할 때 개입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함으로써 더 이상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 또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성모의 총 사령관 임명 또한 그의 일환이었는데, 1차 벨트크리그 당시 수송선단을 안전하게 호위했던 그가 일본의 새로운 수송선단 습격에 맞선 적합자라고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임명된 신성모는 현장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작계를 짜기 시작했다. 해군에 너무 과도한 투자를 이어가거나, 부산에 너무 많은 병력을 밀집 시켜놓는 상황이 벌어지자 현장 사령관들은 신성모의 계획에 우려를 표했으나, 신성모는 '''"국군은 황제폐하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오사카에서 먹고 저녁은 도쿄에서 먹을 수 있다."'''라는 말로 응답했다.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제2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할 당시 일본 또한 대한제국을 침공할 계획을 갖고있었다. 한국 침공 계획중 가장 중요한 작전인 포항 상륙작전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은 생뒤칼리슴 정권이 수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 정부는 큰 성과과 필요했기 때문이다.<ref>상륙지로 부산이 아닌 포항으로 정해진 이유는 너무 뻔한 곳이라 한국이 준비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는게 제일 컸고, 역사적으로 부산에 상륙해서 최종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걸로 보인다.</ref> 허나 일본은 아직도 내전의 피해가 회복이 끝나지 않았던데다 장교에 대한 숙청으로 당시 육군대신이였던 무라카미 겐자부로가 "일본의 개전은 1943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1939년에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전파에서는 개전을 촉구했고, 결국 1940년 군 관련 인사 대부분이 주전파로 교체된 후에 대마도를 포격하며 개전한다. == 영향 == 사령부의 무조건적인 절대사수 명령과, 부족한 지원들 때문에 권준은 끝내 포항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포항의 함락 이후, 한국군의 주력군이 배치되어있던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일대는 위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속된 신성모의 오판은 끝내 경상남도의 한국군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었고, 포항에서의 패배는 [[울산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포항에서의 패배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성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까지 패배가 이어지며 한국군 주력이 통째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신성모는 해임. 퇴역한 안중근이 다시 임명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포항에서의 패배는 초기 한국군 주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면서 수도인 한성까지 함락 위기에 처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2차 벨트크리그 동안 한국군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어록== {{인용문1|국군은 황제폐하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오사카에서 먹고 저녁은 도쿄에서 먹을 수 있다.|신성모. 일본의 선전포고 직전}} {{인용문1|'''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br>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안중근. 울산전투 패배 이후 총 사령관 재임명 명령을 받고서. 이후 대한제국군의 슬로건이 됐다.}}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빌레펠트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인용문1 (원본 보기) 틀:제2차 벨트크리그/연표 (빌레펠트) (원본 보기) 포항 상륙작전 (빌레펠트)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