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비바 케네디}} ---- {{역대 미국 대통령 (비바 케네디)}}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border:2px solid #0D164A; font-size:10.5pt" |- ! style="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FFC224" | 존 F. 케네디 관련 틀 |- | <div class="mw-customtoggle-Kennedy" style="text-align:center; color:#000; font-size:10.5pt"><div style="margin:-2px">'''[ 펼치기 · 접기 ]'''</div></div>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Kennedy" style="border:1px solid transparent">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margin:0px -15px 0px; background:none; border:1px solid transparent; text-align:left"> {| style="width:calc(100% + 5px); margin-left:-2px; margin-right:-15px; margin-bottom:-13px;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 | style="border:none;" | ----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비바 케네디)}} ----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비바 케네디)}} ---- {{타임지 올해의 인물/1960년대 (비바 케네디)}} ---- |}</div></div> |}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max-width:420px; border:2px solid #0D164A; font-size:10.5pt; float:right" |- !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FFC224" |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br>{{글씨 크기|14|존 피츠제럴드 케네디}}<br>John Fitzgerald Kennedy |- | colspan="2" |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John_F._Kennedy,_White_House_color_photo_portrait.jpg|420px]]</div>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출생 | [[1917년]] [[5월 29일]] |- |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라인 빌즈 가 83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사망 | [[1999년]] [[7월 16일]] (향년 82세) |- |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 |- ! rowspan="2"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재임기간 | style="background:#F5F5F5" | 제35대 대통령 |- | [[1961년]] [[1월 20일]] ~ [[1969년]] [[1월 20일]]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서명 | <html><a href="/w/index.php/존 F. 케네디 (비바 케네디)"><img alt="존 낸스 가너 서명.svg" src="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a/John_F_Kennedy_Signature_2.svg" style="width: 150px; height: auto"></a></html> |- |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JFK" style="text-align:center; color:#000; font-size:10.5pt"><div style="margin:-2px">'''[ 펼치기 · 접기 ]'''</div></div>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JFK" style="border:1px solid transparent">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margin:0px -15px 0px; background:none; border:1px solid transparent; text-align:left"> {| style="width:calc(100% + 5px); margin-left:-2px; margin-right:-15px; margin-bottom:-13px; text-align:left; font-size:10.5pt"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부모 |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br>어머니 로즈 케네디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형제자매 | 형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br>여동생 로즈 케네디<br>여동생 하딩턴 후작부인 캐슬린 케네디<br>여동생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br>여동생 패트리샤 헬렌 케네디<br>남동생 [[로버트 F. 케네디 (비바 케네디)|로버트 F. 케네디]]<ref>미국 법무장관 (1961~1964)</ref><br>여동생 진 케네디 스미스<br>남동생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ref>'''미국 제39대 대통령''' (1989~1996)</ref>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배우자 | [[재클린 케네디 (비바 케네디)|재클린 케네디]]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자녀 | 장녀 아라벨라 케네디<br>차녀 [[캐롤라인 케네디 (비바 케네디)|캐롤라인 케네디]]<ref>미국 국무장관 (2017~現)</ref><br>장남 '''[[존 F. 케네디 주니어 (비바 케네디)|존 F. 케네디 주니어]]'''<ref>'''미국 제43대 대통령''' (2017~現)</ref><br>차남 패트릭 케네디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학력 | [[초우트 로즈마리 홀]] <small>(졸업)</small><br>[[프린스턴 대학교]] <small>(중퇴)</small><br>[[하버드 대학교]] <small>(B.A.)</small><br>[[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종교 | [[로마 가톨릭]]<ref>'''미국 역대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다.'''</ref>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신장 | 185cm, O형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정당 | {{민주당 (미국)}}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의원 선수 | '''3''' (하원)<br>'''2''' (상원)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의원 대수 | '''80''', '''81''', '''82''' (하원)<br>'''83''', '''86''' (상원) |- |} |} {{목차}} == 개요 ==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600px; margin-left: auto; margin-right:auto;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PEC1C4p0k3E|600px}}</div><div style="margin: -11.0px 0px"></div> |- | style="color:#FFC224; background:#0D164A" | '''미국 대통령 취임사 (1961)''' |- |} {{인용문|'''"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br>"우리들(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연계고리는 이 작은 행성의 주민이며, 모두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모두 자손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며,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1965년 연방민권법 통과를 촉구하는 연설 도중.<ref>그의 묘비에 적혀있다.</ref>}}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JFK'''라는 약칭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본격적인 TV 이미지 정치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자, 정식 선거로는 미국 최연소 대통령<ref>승계까지 포함하면 [[시어도어 루스벨트 (비바 케네디)|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최연소이다.</ref>, 최초의 가톨릭 신자인 미국 대통령이자, 최초의 20세기 출생 대통령이다. [[1961년]] [[1월 20일]]부터 [[1969년]] [[1월 20일]]까지 재임했다. 그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와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 (비바 케네디)|존 F. 케네디 주니어]]도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맥거번 (비바 케네디)|조지 맥거번]] 등과 함께 [[민주당(미국) (비바 케네디)|민주당]]을 대표하는 대통령이자 미국 진보층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대통령이다.<ref>이중 조지 맥거번은 미국 진보좌파 진영에게, 루스벨트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전국민에게 존경받는다면 케네디는 전형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다.</ref> 제3차 세계 대전이 될 수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바 케네디)|쿠바 미사일 위기]]를 잘 해결했으며, [[아폴로 계획 (비바 케네디)|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켜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절대우위를 갖게 했다. "국가가 당신에게 뭘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으라."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을 주장한 것으로 미국인의 기억에 남아있다. 오늘날에는 [[제럴드 포드 (비바 케네디)|제럴드 포드]]와 함께 진영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대통령이다. == 약력 == * 1947. 제80대 하원의원 ([[민주당(미국) (비바 케네디)|민주당]] / [[매사추세츠 (비바 케네디)|매사추세츠 제11구]]) * 1949. 제81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구) * 1951. 제82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구) * 1953. 제83대 상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클래스 1) * 1959. 제86대 상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클래스 1) * '''1961. 1. 제35대 미국 대통령 (임기 1기,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초선]])''' * '''1965. 1. 제35대 미국 대통령 (임기 2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재선]])''' * 1999.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서훈 == 생애 == 존 F. 케네디는 1918년 주영 미국 대사인 [[조지프 P. 케네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존 F. 케네디는 어릴 때 공부를 못해서 아버지의 속을 많이 썩혔지만, 아버지의 기부 입학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본래 조지프 케네디는 "케네디 가에서 대통령이 한명 이상 나와야한다"라는 생각 하에 장남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차남 존 F. 케네디가 케네디가문을 이끄는 신예로 떠올랐다. 존 F. 케네디 역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본래 나쁜 건강으로 참전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빽을 이용해 나중에 정치에 입문할 때 불리한 점이 되지 않도록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는 항해병과 대위 계급으로 전역했고, 자신이 이끄는 전함이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자 손수 나서 부하들을 구출한 사건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전후 존 F. 케네디는 케네디 가문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매사추세츠주의 제11번 하원 의원 선거구에 출마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1948년, 1950년 선거에서도 재선했는데, 그의 참전 용사 경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던 1952년, 그는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매사추세츠주의 연방 상원의원은 공화당 소속의 [[헨리 케벗 로지]]였는데, 그는 공화당 내에서 대표적인 외교 전문가로 불리는 중진 의원이었다. 당연히 케네디가 낙선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케네디는 근소한 표차로 캐벗 로지를 꺾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대 내내, 존 F. 케네디는 자유무역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민주당 내의 소장파였다. 1956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로 입후보 하려 하였으나, 경선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에 밀렸고, 유력한 부통령 후보자로도 꼽혔지만 결국 배제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대통령 후보감으로 꼽힌 케네디의 입지는 당 내에서 커져만 갔고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 [[휴버트 험프리 (비바 케네디)|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린든 B. 존슨 (비바 케네디)|린든 B. 존슨]] 상원 원내대표를 꺾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지지율은 60%를 상회했다. 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은 인기 최고조의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 부통령이었고 그 누구도 닉슨의 낙선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자신의 잘생긴 이미지와 언변을 무기로 닉슨을 추격했고, TV 토론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잡으며 닉슨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불과 0.1%p차로 케네디는 닉슨을 꺾고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60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키며 42세의 나이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 당선인의 기록을 깬다. === 대통령 1기 ===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600px; margin-left: auto; margin-right:auto;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9cdRpE4KKc|600px}}</div><div style="margin: -11.0px 0px"></div> |- | style="color:#FFC224; background:#0D164A" | '''TV 토론에서 맞붙은 닉슨과 케네디 (1960)''' |- |}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기 임기는 1961년 1월 20일 정오에 시작되어 1965년 1월 20일 정오에 종료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바 케네디)|쿠바 미사일 위기]], [[피그스만 침공 사태 (비바 케네디)|피그스만 침공 사태]], [[마틴 루서 킹 (비바 케네디)|마틴 루서 킹]]의 흑인 민권 운동, [[우주 경쟁 (비바 케네디)|우주 경쟁]] 등이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는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방문 도중 [[리 하비 오스왈드 (비바 케네디)|리 하비 오스왈드]]에 의해 [[존 F.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 (비바 케네디)|암살 미수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의 임기 도중 평균 지지율은 60%대 초반으로 매우 높게 유지되었다. ==== 내정 ====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존 F. 케네디의 국내 정책은 경제 성장, 민권, 의료 개혁, 교육 및 기술 혁신 촉진에 중점을 두었다. 케네디의 경제 정책은 재정 및 통화 조치의 조합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실업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소비자 지출과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전면적인 감세를 제안했으며, 이는 [[케네디-존슨 감세 (비바 케네디)|케네디-존슨 감세]]로 명명되었다. 세금 감면법은 1964년 케네디의 재선 직전 제정되었으며 1965년~1968년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또한 케네디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공공 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지출 증가 정책을 추진했다. [[파일:Civil_Rights_March_on_Washington,_D.C._(Aerial_view_of_Washington_Monument_showing_marchers.)_-_NARA_-_541997.tif|200px|썸네일|오른쪽|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em) 연설로 유명한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 케네디의 국내 정책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시민권이었다. 그는 인종 불평등을 해결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평등을 증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1963년에 케네디는 포괄적인 민권 입법을 촉구하는 전국적인 텔레비전 연설을 했으며, 그의 재선 직후 통과된 [[1965년 연방 민권법 (비바 케네디)|1965년 연방 민권법]]의 기초가 되었다. 케네디는 또한 연방군을 배치하여 [[미시시피 대학교 (비바 케네디)|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인종 차별 철폐를 시행하고, [[마틴 루터 킹 (비바 케네디)|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행진을 정부 차원에서 지지했다. 1963년 12월 31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민권 운동에 대한 불법적인 개입, 도감청, 성추행 혐의 등으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비바 케네디)|존 에드거 후버]]를 직위에서 파면하고 구속시켰다. [[조지 월리스 (비바 케네디)|조지 월리스]] 등 많은 민주당과 공화당 내 극우 인사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후버 국장의 직위 파면 직후 케네디 대통령의 지지율은 70%까지 상승했다. 의료 개혁에서, 케네디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국가 건강 보험 시스템을 수립하고자 조력했다. 그는 모든 미국인이 적정 가격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메디케어로 알려진 노인을 위한 의료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법안을 제안했다. 몇가지 노력은 보수 단체와 미국 의학 협회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이른바 케네디케어로 알려진 보편적 건강 보험법을 1964년 5월 통과시켰고 높은 지지를 얻었다. 교육 역시 의료 개혁과 마찬가지로 케네디 행정부 1기의 초점 영역이었다. 그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교육 기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1961년에 존 F. 케네디는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지위에 관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설립했다. 케네디는 [[우주 경쟁 (비바 케네디)|우주 경쟁]]에 있어서, 기술 혁신의 중요성과 국가 안보 및 경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했다. 그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설정하면서 우주 프로그램의 개발을 우선시했다. 이러한 약속은 NASA에 대한 자금 지원 증가와 [[아폴로 계획 (비바 케네디)|아폴로 계획]]의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케네디의 지원은 과학 지식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핵심 영역 외에도 케네디의 국내 정책에는 빈곤 퇴치 및 사회 복지 프로그램 확대를 위한 구상안이 포함되었다. 그는 최저 임금 인상을 제안하고 일자리 창출과 교육을 통해 빈곤을 완화하는 정책을 옹호했다. 케네디는 또한 1961년에 해외 자원 봉사를 통해 국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인 평화 봉사단을 창설했다. ==== 외교 ==== 존 F. 케네디 1기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이상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소련의 위험에 맞서는 데 중점을 두었다. 케네디는 소련과의 고조되는 긴장을 관리하면서 미국을 글로벌 리더로 세우고 미국의 가치를 해외에 알리고자 했다. 1961년 1월 취임하자마자 케네디는 미국과 소련 간의 군비 경쟁으로 대표되는, 긴장된 국제 정세를 아이젠하워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 F. 케네디는 전략적 무기 통제와 핵 분쟁 위험 감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1년 6월 그는 대기권, 우주공간, 수중에서의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제안했다. 이 구상은 1963년 [[제한적 핵 실험 금지 조약 (비바 케네디)|제한적 핵 실험 금지 조약]](Limited Test Ban Treaty)에 서명하면서 현실화되었고, 핵 군축과 냉전 긴장 완화를 향한 위대한 발걸음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파일:Annex_No._30_Phase_1_Pre_Strike_-_NARA_-_193244.tif|300px|썸네일|오른쪽|쿠바 핵위기 당시의 작전 지도]] 케네디 대통령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바 케네디)|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1961년, CIA는 케네디 대통령의 반대 속에 쿠바를 무력으로 해방시킨다는 [[피그스만 침공 작전 (비바 케네디)|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수립했으나, 실패했고, 이는 쿠바와 미국 사이의 외교적 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던 와중 소련이 쿠바에서 대규모 미사일 시설을 설치한 사실이 발견되자 미국은 즉각 대응에 나섰고,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의 위험이 고조되었다. 케네디는 쿠바 주변에 해군 봉쇄를 가하고 소련의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강도 높은 협상을 벌이는 등 확고한 외교적 대응을 벌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튀르키예에서 미국이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신 소련 역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평화 협상안을 제시했고, 흐루쇼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례적으로 무력 충돌 없이 종결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결단 있는 외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남아메리카의 경제 발전, 사회 정의 및 민주적 정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을 발족했다. 이 구상은 남미의 근본적인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함으로써 공산주의 확산을 차단하고 미국의 이익을 증진하는 "남미판 마셜 플랜"이었다. 그러나 "진보를 위한 동맹"은 쿠바 혁명 이후 확산된 남미의 공산주의 운동과 해결되지 않은 경제적 불평등, 정부의 독재 등으로 인해 케네디 대통령 임기 1기 내내 미완성으로 남겨졌고 2기에서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63년에 이르러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또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결국 1952년 재출마를 포기한 [[해리 S. 트루먼 (비바 케네디)|해리 S. 트루먼]]의 사례를 고려한 존 F. 케네디는 직접적인 베트남 개입을 피하고자 했으며, 군부 내 강경파 [[커티스 르메이 (비바 케네디)|커티스 르메이]]를 1964년 8월 2일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강제 전역 시킴으로서 군부의 폭주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는 1968년까지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군시키고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사이에 완충 지대를 설립함과 동시에 남-북한 관계를 모델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사이의 평화를 유지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1기 임기 내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2기 시기 시작된 베트남 전쟁으로 비로서 케네디 정부의 핵심 안건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케네디의 외교 정책 접근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탈식민지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신흥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구축을 모색했다. 그는 신생 독립 국가에 원조를 제공했으며 1962년 [[중국-인도 전쟁 (비바 케네디)|중국-인도 전쟁]] 동안 인도와 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 대통령 2기 ===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600px; margin-left: auto; margin-right:auto;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dpsuIFoMgUM|600px}}</div><div style="margin: -11.0px 0px"></div> |- | style="color:#FFC224; background:#0D164A" | '''TV 토론에서 맞붙은 케네디와 골드워터 (1964)''' |- |} 1964년 11월 3일 치러진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는 압도적 지지를 받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재도전했다. 부통령 후보는 [[휴버트 험프리 (비바 케네디)|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으로 교체되었는데, 빌리 솔 에스테스(Billy sol estes), 바비 베이커(Bobby Baker) 비리 논란에 휘말린 [[린든 B. 존슨 (비바 케네디)|린든 B. 존슨]]이 스스로 부통령 후보 재도전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후보 [[배리 골드워터 (비바 케네디)|배리 골드워터]]는 '''베트남 핵폭격''' 발언으로 심각하게 낮은 지지율로 선거 운동을 시작해야했다. 비록 TV 토론에서 골드워터가 선전하고 남부 민주당원들이 케네디의 민권법 제정 공약에 반발해 골드워터를 지지하며 선거날 골드워터의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60% 대 39%로 골드워터를 압살하고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2기 임기는 1965년 1월 20일 정오에 시작되어 1969년 1월 20일 정오에 종료되었으며, 후임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1965년 연방 민권법 (비바 케네디)|1965년 연방 민권법]] 제정, [[아폴로 계획 (비바 케네디)|아폴로 계획]], [[빈곤과의 전쟁 (비바 케네디)|빈곤과의 전쟁]], [[6일 전쟁 (비바 케네디)|6일 전쟁]] 등이 있었다. 존 F. 케네디는 '''63.0%'''에 달하는 지지율로 퇴임하여, 역사상 가장 높은 퇴임 지지율 기록을 세웠다.<ref>이는 전임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비바 케네디)|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기록인 60.1%를 갱신한 것이다.</ref> ==== 내정 ==== 1964년 재선에 성공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뉴 프런티어 정책을 확장한 여러 변혁적 국내 정책 의제를 시행했다. 케네디 대통령 2기는 보다 본격적인 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된 것으로 평가받으며, 빈곤, 인종 불평등, 의료, 교육, 환경 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의제가 추진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2기에 추진된 가장 큰 업적으로는 [[1965년 연방 민권법 (비바 케네디)|1965년 연방 민권법]]의 통과가 있다. 린든 B. 존슨이 다시 텍사스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로 돌아간 가운데,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와 린든 B. 존슨 원내대표는 민권법 추진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1965년 7월, 존 F. 케네디는 연방민권법 통과 직전 "그루터기 연설"(Tree stump adress)로 알려진 연설을 통해 흑백 인종 차별 철폐의 당위성을 강변했으며,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65년 7월 2일, 미국 연방 상원은 71대 29로 [[1965년 연방 민권법 (비바 케네디)|1965년 연방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법안 통과 직후 가장 대표적인 남부 민주당원이었던 [[스트롬 서먼드 (비바 케네디)|스트롬 서먼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연방 상원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해 공화당에 입당했지만, 이 시기 케네디의 지지율은 다시 70%대로 상승했다. [[파일:Buzz_salutes_the_U.S._Flag.jpg|썸네일|오른쪽|250px|달에 착륙해 성조기를 꽃은 아폴로 6호의 승무원 [[버즈 올드린]].]]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흑백 분리 철폐와 더불어 1기에 비해 더욱 경제적 평등을 중시했는데, 이는 빈곤 퇴치와 평등한 경제적 기회 증진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1964년에 케네디 대통령은 경제적 기회 사무소(Office of Economic Opportunity, OEO)를 설립하고 총체적으로 빈곤과의 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경제 기회법 (비바 케네디)|경제 기회법]](Economic Opportunity Act)에 서명했다. OEO는 커뮤니티에 권한을 부여하고 직업 훈련을 제공하며 유아 교육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커뮤니티 액션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또한 1965년 보편적 의료를 위한 사회보장 수정안에 서명했다. 새로운 의료법은 "케네디 케어"라 불렸으며, 이는 노인을 위한 보편적인 건강 보험을 제공했고 적용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이러한 정책은 포퓰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의료 접근성을 크게 확대하고 취약계층의 의료비 부담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는 후일 [[맥거번케어 (비바 케네디)|맥거번케어]]라 불리는 미국 의료의 공영화 정책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케네디의 우주개발은 1967년 7월 20일, [[아폴로 6호 (비바 케네디)|아폴로 6호]] 우주 비행사들이 달을 밟으며 결실을 맺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축하 성명을 짧게 발표했으며, 이 시기 케네디 대통령의 지지율은 90%를 상회해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대 지지율을 기록했다.<ref>[[콜린 파월 (비바 케네디)|콜린 파월]] 대통령의 9.11 테러 담화 직후 파월 대통령이 이와 비슷한 수치를 기록한 적은 있다.</ref> 미국의 달 착륙은 소련을 상대로 한 우주 경쟁에서 처음으로 미국이 우위를 잡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았으며, 현재까지 인류 과학 개발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6년 불우한 학생들에게 연방 기금을 제공함으로써 저소득 지역 사회의 교육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초등 및 중등 교육법]]에 서명했다. 그 외에는 환경 정책에서 두각을 보였으며, 1965년에 그는 수질 오염 통제 조치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질법 (비바 케네디)|수질법]]에 서명했다. 1966년에는 교통 정책을 조정하고 인프라 개발을 감독하기 위해 교통부를 설립했다. ==== 외교 ==== [[파일:Fulbright.jpg|썸네일|오른쪽|200px|케네디 2기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J. 윌리엄 풀브라이트 (비바 케네디)|J. 윌리엄 풀브라이트]].]] 존 F. 케네디 정책의 2기는 더욱 비둘기파(doves)에 가까웠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대처를 주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화책을 사용하고자 했는데, 이는 그의 1기 임기 도중 반공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다수의 정치인들과 군부 지도자들이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 내의 강경파였던 린든 B. 존슨이 부통령 재선에 실패하고, 커티스 르메이, 에드거 후버 등 극우에 가까운 인사들이 대거 좌천 혹은 해직당하며 케네디는 자신의 외교적 이상을 추진할 동력을 얻었다. 존 F. 케네디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유임시키지 않고 [[J. 윌리엄 풀브라이트 (비바 케네디)|J. 윌리엄 풀브라이트]]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미국 상원에서 케네디의 온건한 외교 정책을 지지하는 "케네디 키드"(Kennedy Kids) 파벌이 형성되었는데, 대표 인사로는 [[로버트 F. 케네디 (비바 케네디)|로버트 F. 케네디]], [[유진 매카시 (비바 케네디)|유진 매카시]], 그리고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맥거번 (비바 케네디)|조지 맥거번]] 등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 진보 좌파의 아버지들로 여겨진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축출되면서 미소 관계도 다시 경직되었지만, 신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비바 케네디)|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전임자에 비해 더욱 유화적인 대미정책을 펼쳤다. 존 F. 케네디는 브레즈네프의 정책을 고평가하며 브레즈네프와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비록 소련과 미국 내부에서의 반발로 인해 미소 정상회담은 결렬되긴 하였으나, 1966년 1월 존 F. 케네디는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 (비바 케네디)|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지고 더욱 포괄적인 핵확산 통제 협정을 체결했다. 다만 존 F. 케네디의 유화책이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소련의 영역 확장을 간접적으로 도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1964년 체결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평화협정으로 베트남 전쟁의 위험은 한층 적어졌고, 1965년 6월 25일에는 명확한 남베트남 정책 방향이 설정되어 대부분의 주월미군이 철수했다. 1967년 1월 기준으로 오직 1만 5천명의 미군만이 치안 유지 밑 북베트남 경계를 위해 남베트남에 주둔했으며 절대다수의 미군은 이 시기 철군한 상태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는 완충지대 설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북베트남 측이 거절하면서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케네디의 노력은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이 휴전 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침공하며 수포로 돌아갔다. 존 F.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미군을 베트남에 파병했지만, 안일한 안보 정책으로 베트남 정책을 망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결국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과 20만 병력 파병을 지지한 초강경파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진보를 위한 동맹은 2기 임기 내에도 계속 확충되었으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주요 국가와 핵심적인 동맹을 체결하였다. [[유진 매카시 (비바 케네디)|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은 쿠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며 쿠바와 미국 사이의 경직된 분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1967년 5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의 중재 하에, [[라울 카스트로 (비바 케네디)|라울 카스트로]]가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고, 1968년 7월에 케네디가 쿠바를 방문해 쿠바와 재수교하고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미국 정상회담을 가지고자 했다. 하지만 1968년 1월 베트남 전쟁의 발발로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반감이 커지며 이는 실패했고 결국 쿠바와의 수교는 1972년 맥거번이 대통령으로 당선될때까지 미루어진다. 전반적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은 베트남 문제 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점이 많았고 당대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1972년 [[조지 맥거번 (비바 케네디)|조지 맥거번]]이 당선되며 케네디의 정책이 재평가받았다. 맥거번 대통령은 케네디의 정책을 확대계승하여 탈냉전 기조를 이끌었고, 퇴임한 케네디 대통령도 이를 고평가하며 현재로서는 케네디 대통령의 외교적 이상이 잘 현실에 반영되었다고 평가받는다. === [[존 F. 케네디 행정부 (비바 케네디)|존 F. 케네디 행정부]] ===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 후보가 승리하여 성립된 행정부로, 1961년 1월 20일부터 1969년 1월 20일까지 존속했다. 부통령은 [[린든 B. 존슨 (비바 케네디)|린든 B. 존슨]](1961.01.20 ~ 1965.01.20), [[휴버트 험프리 (비바 케네디)|휴버트 험프리]](1965.01.20 ~ 1969.01.20)이었다. === 퇴임 후 === 1969년 1월 20일 존 F. 케네디는 리처드 닉슨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백악관을 떠났다. 존 F. 케네디는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휴버트 험프리를 물심양면으로 도왔지만, 결국 휴버트 험프리는 닉슨에게 석패했다. 민권법 제정에 반발한 남부 민주당원들이 [[조지 월리스 (비바 케네디)|조지 월리스]]를 후보로 추대해 독자 출마하여 민주진영의 표가 분열되었기 때문이었다. 존 F. 케네디는 닉슨의 베트남 전쟁 초강경 대응책을 비판하며 "반전파의 배후 교황"이라는 보수파의 비아냥을 들었다. 오히려 존 F. 케네디는 이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겨 자주 인용했으며, 닉슨의 베트남 전쟁 정책이 인기 없어지면서 케네디의 퇴임 후 지지율은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치솟았다. 우스갯소리로 민주당 내에서는 존 F. 케네디를 부통령 후보로 옹립해야한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1972년 미국 전역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인 [[72혁명 (비바 케네디)|72혁명]]이 일어나자, 존 F. 케네디는 로어 맨해튼에서의 연설을 통해 대학생들을 지지하고 미국 정부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닉슨은 전직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지만 케네디에 비해 미숙한 연설 태도로 인해 조롱거리만 되었을 뿐이다. {{인용문|"존 F. 케네디는 조지 맥거번을 '''1,000 퍼센트 지지합니다.'''"|존 F. 케네디 공보관의 성명. 6일 후 조지 맥거번의 전국 지지율이 처음으로 닉슨을 추월했다.}}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는 자신의 파벌에 속한 소장파 의원 [[조지 맥거번 (비바 케네디)|조지 맥거번]]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조지 맥거번은 급진적인 좌파 정책으로 초반에 닉슨에 크게 뒤쳐져 있었으나, 케네디의 지지 성명을 통해 판세를 역전시켰다. 토론회에서도 닉슨에 조지 맥거번에 처절하게 밀리며 점차 승리는 맥거번 쪽으로 기울었고, 좌파 대학생 운동권과 반전파의 지지를 한몸에 받은 조지 맥거번은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을 저지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이어진 맥거번 행정부 임기 동안, 존 F. 케네디는 "제2의 국무장관"이라 불릴만큼 많은 역할을 맡았다. 비록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지만, 가장 인기 있는 후임 대통령이자 민주당의 원로로 여러 외교적 자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1974년 미중정상회담을 앞두고 존 F. 케네디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중국이 미국 정부에 호의적인 인상을 얻는데 큰 도움을 줬다.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존 F. 케네디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했고, 조지 맥거번 행정부가 이란 대사관 인질극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며 다시 한번 존 F. 케네디의 혜안이 빛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일:EdwardKennedyUSSTheodoreRooseveltFeb1987.jpeg|300px|썸네일|오른쪽|1989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한 존 F. 케네디의 동생,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는 [[지미 카터 (비바 케네디)|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를 지지했지만, 민주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 속에 [[제럴드 포드 (비바 케네디)|제럴드 포드]] 후보가 승리했다. 그럼에도 존 F. 케네디는 제럴드 포드를 인간미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하며 고평가했고,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비바 케네디)|브렌트 스코크로프트]] 국가안보보좌관도 훌륭한 전략가라 평가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지병이 악화되면서 투병생활이 시작되었고,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으며 매사추세츠의 사저에서 요양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1988년, 자신의 동생 [[테드 케네디 (비바 케네디)|테드 케네디]]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케네디는 동생을 위해 적극적인 선거 운동에 나섰다. 존 F. 케네디는 테드 케네디 대통령 지지 연설에서 '''"희망은 계속 살아남고, 꿈은 죽지 않을 것"'''(The hope still lives, and the dream shall never die)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남겼는데, 그 결과 테드 케네디는 여유롭게 공화당의 후보인 밥 돌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존 F. 케네디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1992년 DNC에서의 공개 연설을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투병 생활에 돌입했다. 1999년 7월 16일, 존 F. 케네디는 자신의 지병과 여러 합병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맨해튼의 종합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비록 상대당 대통령이었지만 [[콜린 파월 (비바 케네디)|콜린 파월]] 미국 대통령마저 장례식에 참여해 눈물을 흘렸을정도로 그는 죽어서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 평가 == === 긍정적 평가 === === 부정적 평가 === == 어록 == === 취임식 연설 === {{youtube|P1PbQlVMp98}} {{인용문|"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br>자,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으십시오'''.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으십시오.|1961년 대통령 취임식 연설 中}} ===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 {{youtube|kwFvJog2dMw}} {{인용문|"'''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and the moon and the planets are there, and new hopes for knowledge and peace are there. And, therefore, as we set sail we ask God's blessing on the most hazardous and dangerous and greatest adventure on which man has ever embarked. Thank you."<br>'''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에 오릅니다. 달과 행성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지식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축복을 빌며 항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지금껏 인류가 승선한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위험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1962년 휴스턴 라이스 대학에서의 연설 中.}} ===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 {{youtube|0GKd50lrROc}} {{인용문|"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br>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1963년 서베를린 연설 中}} === "꿈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 {{youtube|VsDqdGsoSW8}} {{인용문|나를 위하여 몇 시간 전에 이 선거 운동이 끝났습니다.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관심사가 되고, 업적은 계속되고, 원인은 계속되고, '''희망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꿈은 전혀 죽지 않을 것입니다.'''}} == 소속 정당 ==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border:2px solid #0D164A;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소속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기간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비고 |- | {{민주당 (미국)}} | 1946 - 1999 | 정계 입문<br>정계 은퇴<br>작고 |- |} == 선거 이력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border:2px solid #0D164A;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연도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선거 종류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선거구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소속 정당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득표수 (득표율)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당선 여부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C224" | 비고 |- | 19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rowspan="3" | 매사추세츠 11구 | rowspan="7" | {{민주당 (미국)}} | '''69,093 (71.87%)''' | rowspan="7" | '''당선 (1위)''' | '''초선''' |- | 194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06,366 (100.00%)''' | '''재선''' |- | 195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87,699 (82.28%)''' | '''3선''' |- | 195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rowspan="2" | [[매사추세츠]] | '''1,211,984 (51.35%)''' | '''초선''' |- | 195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362,926 (73.20%)''' | '''재선''' |- | 1960 |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미국 대통령 선거]] | rowspan="2" | [[미국]] | '''34,220,984 (49.72%, 303명)''' | '''초선''' |- | 1964 |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비바 케네디)|미국 대통령 선거]] | '''40,773,510 (57.35%, 350명)''' | '''재선''' |- |} == 가족 관계 == == 여담 == * 입담에 위트가 있는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난 대통령이 되어야만 했어요. 아이들 받아주는 아파트 구하기가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란 농담을 한 일도 있고,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인 케네디보다 그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더 집중하여 취재를 벌였는데, 이를 본 케네디는 "저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당시엔 트루먼과 논쟁을 하다 불같은 성격의 트루먼에게 개새끼란 말을 듣기도 했다. * [[리처드 닉슨 (비바 케네디)|닉슨]]은 재임기 국세청을 동원해 정적들의 약점을 잡고 도감청을 하는 등 온갖 정치공작을 벌였는데, 본인만 욕을 바가지로 먹고 구속 위기까지 몰리자 좀 억울했는지 "케네디도 했는데..." 라고 물타기성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일부는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디는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부유층들을 압박하려고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 극우단체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막기 위해 철강업체들 주요 임원들의 자산에 대한 세무조사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정적들에 대한 도감청과 대화의 비밀 녹음도 했다고 한다. * [[스티븐 킹]]의 대체역사 소설 11/22/63에서는 주인공 커플의 삽질로 암살을 당하며 역사가 개변되는데, 이후 대통령직을 계승받은 존슨 대통령의 무리한 베트남 개입과 197~80년대 닉슨, 레이건, 부시 부자의 장기 집권으로 미국은 사회보장시스템이 붕괴되고, 총기난사 사고가 일상이며, 의료보험이 없으면 그대로 죽어야하는데다 탈레반 진압 실패로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정권까지 수립되는 준 디스토피아 상황에 몰리게 된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 후기에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설이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는 결론이 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비바 케네디) (원본 보기) 틀: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비바 케네디) (원본 보기) 틀:Color (원본 보기) 틀:Youtube (원본 보기) 틀:구분선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글씨 크기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민주당 (미국) (원본 보기) 틀:비바 케네디 (원본 보기) 틀:역대 미국 대통령 (비바 케네디)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타임지 올해의 인물/1960년대 (비바 케네디) (원본 보기) 존 F. 케네디 (비바 케네디)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