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칸 프린스}} {{역대 미국 대통령 (아메리칸 프린스)}}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max-width:420px; border:2px solid #0d164a; font-size:10.5pt; float:right" |- !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0d164a" | 미합중국 제43대 대통령<br>{{글씨 크기|14|존 F. 케네디 주니어}}<br>John F. Kennedy Jr. |- | colspan="2" |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케네디 주니어.png|420px]]</div>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출생 | [[1960년]] [[11월 25일]] |- | [[미국]] [[워싱턴 D.C.]]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사망 | [[2001년]] [[9월 11일]] (향년 40세) |- | [[미국]] [[플로리다 주]] [[새러소타 카운티]] [[새러소타]] |- ! rowspan="2"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재임기간 | style="background:#F5F5F5" | 제43대 대통령 |- | [[2001년]] [[1월 20일]] ~ [[2001년]] [[9월 11일]] |- |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JFK" style="text-align:center; color:#000; font-size:10.5pt"><div style="margin:-2px">'''[ 펼치기 · 접기 ]'''</div></div>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JFK" style="border:1px solid transparent">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margin:0px -15px 0px; background:none; border:1px solid transparent; text-align:left"> {| style="width:calc(100% + 5px); margin-left:-2px; margin-right:-15px; margin-bottom:-13px; text-align:left; font-size:10.5pt" |- ! style="width:100px; 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부모 | 아버지 '''[[존 F. 케네디]]'''<br>어머니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형제자매 | 누나 아라벨라 케네디<br>누나 [[캐롤라인 케네디]]<br>남동생 패트릭 케네디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배우자 | [[캐롤린 베셋 케네디 (아메리칸 프린스)|캐롤린 베셋 케네디]]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학력 | [[브라운 대학교]] <small>(미국학 / 학사)</small><br>[[뉴욕 대학교]] [[로스쿨]] <small>(법학 / J.D.)</small>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종교 | [[가톨릭]]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신장 | 185cm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정당 | {{민주당 (미국)}}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의원 선수 | '''1''' (상원) |- ! style="background:#ececec; color:#0D164A" | 의원 대수 | '''181''' (상원) |- |} |} {{목차}} ==개요==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600px; margin-left: auto; margin-right:auto;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iIA8CcHVTEY&t|600px}}</div><div style="margin: -11.0px 0px"></div> |- | style="color:#0d164a; background:#f3f3f3" | '''케네디 주니어의 인터뷰 영상''' |- |} {{인용문|'''"People often tell me I could be a great man. I'd rather be a good man."'''<br>"사람들은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위대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John F. Kennedy Jr.}} [[미국]]의 제43대 [[대통령]].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아메리칸 프린스)|미국 대통령]]이며,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장남이자, 2남 2녀 중 셋째이다. 당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인 [[마돈나]]와 [[대릴 해나]] 등 여러 미인이 꼬였으며, 역대 [[미국 대통령 (아메리칸 프린스)|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잘생기고 섹시하다는 평을 받는다. ==생애== ===젊은 시절=== [[1960년]] [[11월 25일]] 태어난 그는, 세 번째 생일을 코앞에 두고 있던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1963년 11월 22일 아버지가 암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생일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장례식 당일, [[아메리칸 프린스|관]] 옆에 선 채 작은 손을 들어 [[아메리칸 프린스|경례]]를 하는 세 살배기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전국에 송출되었는데, 정작 본인은 그 관 안에 누가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나이였기에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그저 주변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순진하게 손을 올렸을 뿐이지만, 이 한 장면은 이후 수십 년간 [[아메리칸 프린스|미국인]]들의 뇌리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남았다. 아버지를 잃은 뒤 어머니 [[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 (아메리칸 프린스)|재클린]]은 한동안 [[뉴욕]]에서 아이들을 키웠으나, 같은 해, 그리스 선박 재벌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혼을 택했고, 이후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난 1975년까지 케네디 주니어는 오나시스 소유의 사유섬 스콜피오스와 뉴욕 맨해튼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낸다. 학창 시절에는 [[아메리칸 프린스|콜리지에이트 스쿨]]과 [[아메리칸 프린스|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를 거쳐 [[1982년]] [[아메리칸 프린스|브라운 대학교]] 미국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연기에 흥미를 느꼈던 그는 졸업 후에도 이 관심을 이어가 연극 무대에 직접 올라 관객들 앞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 [[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 (아메리칸 프린스)|재클린]]은 아들이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결국 그는 연극에 대한 미련을 접고 이듬해인 [[1986년]] [[아메리칸 프린스|뉴욕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한다. [[아메리칸 프린스|로스쿨]]은 [[1989년]] 무난히 졸업했지만, 정작 변호사 자격시험이 발목을 잡았다.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서 두 차례나 낙방한 것인데, 명문 로스쿨을 나온 [[아메리칸 프린스|케네디가]]의 일원이 시험에서 미끄러졌다는 사실은 언론과 대중에게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다. "합격할 때까지 계속 시험을 보겠다"고 공언했던 그는 [[1990년]] [[7월]], 세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만약 이때도 실패했다면 그는 애초에 맨해튼 지방검찰청에서 일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세 번째 시험은 그의 이후 경력 전체를 갈랐던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호사가 된 케네디는 로버트 모겐소 지방검사가 이끌던 맨해튼 지방검찰청에 부지방검사로 들어가 1993년까지 근무한다. 이 기간 동안 주로 소비자 사기 사건과 임대인-임차인 분쟁을 다뤘으며, 1991년 8월 29일에는 검사로서 첫 승소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참고로 [[아메리칸 프린스|케네디 가문]]에서는 숙부 [[아메리칸 프린스|에드워드 케네디]], 누나 [[아메리칸 프린스|캐롤라인 케네디]]를 비롯해 [[아메리칸 프린스|하버드 대학교]] 졸업이 일종의 가풍처럼 이어져 왔는데, [[아메리칸 프린스|브라운]]과 [[아메리칸 프린스|뉴욕대]]를 나온 케네디 주니어는 이 점에서 다소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편 검사가 되기 전인 1988년,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던 숙부 [[아메리칸 프린스|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위해 전당대회 찬조연설자로 나선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저의 아버지께서는 20여 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 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셨습니다"'''라는 발언으로 장내를 뭉클하게 만들며 큰 화제를 모았다.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600px; margin-left: auto; margin-right:auto;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C34QiUdEROc|600px}}</div><div style="margin: -11.0px 0px"></div> |- |} ===정계 입문=== [[1993년]] 지방검찰청을 나온 케네디는 곧바로 정계 도전을 결심한다. 문제는 그해 [[아메리칸 프린스|뉴욕주]]에서 의석의 주인이 다름 아닌 3선 중진이자 당내 거물 [[아메리칸 프린스|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이었다는 점이었는데, 그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이름값과 세대교체 프레임, 뉴욕시 젊은 유권자층의 폭발적 지지를 등에 업고 [[민주당]]의 뉴욕주 상원의원 후보가 된다. 이어진 본선에서는 [[공화당]]의 버나뎃 카스트로를 상대로도 낙승한다.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600px; margin-left: auto; margin-right:auto;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center;" |-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v8pPch2n1nI|600px}}</div><div style="margin: -11.0px 0px"></div> |- | style="color:#0d164a; background:#f3f3f3" | '''뉴욕주 상원의원 출마 당시 영상''' |- |} 34살의 케네디는 단숨에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한다. [[아메리칸 프린스|상원]]이 된 후 사법위원회와 소비자보호 관련 위원회를 중심으로 온건하고 무난한 의정 활동에 집중하며 착실히 경력을 쌓아간다. 사생활에서는 캘빈 클라인 홍보 디렉터로 일하던 캐롤린 베셋을 만나 교제 끝에 [[1996년]] [[9월]], [[아메리칸 프린스|조지아주]]의 한 작은 섬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이 결혼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2000년 대통령 선거 경선=== [[1999년]] 하반기부터 이미 정가에서는 "케네디가 나설 것인가"라는 질문이 화두였다. 상원의원으로서 5년 넘게 무난하면서도 흠 잡히지 않는 행보를 보여온 그는, [[아메리칸 프린스|클린턴 스캔들]] 이후 지친 유권자들에게 '''젊고 깨끗한 이미지'''로 소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카드로 꼽혔다. 반면 당내 주류와 조직력, 대부분의 현직 의원·주지사들의 사전 지지 선언은 이미 [[아메리칸 프린스|앨 고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아메리칸 프린스|고어]] 캠프는 [[아메리칸 프린스|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호황을 자신의 성과로 내세웠고, 케네디 캠프는 세대교체 프레임으로 맞불을 놓았다. * '''아이오와 코커스''' 오랜 기간 공들여온 노동조합과 당원 조직력에서 [[아메리칸 프린스|고어]]가 앞섰다. 케네디 캠프는 아이오와 특유의 코커스 방식<ref>당원 대면 투표</ref>에 익숙하지 않았고, 조직 동원력에서 열세를 보이며 [[아메리칸 프린스|고어]] 51%, 케네디 46%로 승을 내준다. 다만 예상보다 훨씬 좁혀진 격차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케네디 캠프는 자신감을 얻는다. *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아메리칸 프린스|뉴잉글랜드]] 지역 특유의 인지도와 친근감, 그리고 무당파 유권자들의 대거 참여가 케네디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TV 토론에서 케네디는 특유의 편안한 화법으로 "워싱턴에서 20년을 보낸 사람과, 새로운 눈으로 워싱턴을 바꿀 사람 중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라는 발언으로 호평을 받았고, 결국 케네디 49% - 고어 45%로 역전에 성공하며 초반 승부의 흐름을 가져온다. [[아메리칸 프린스|슈퍼 화요일]]에는 [[아메리칸 프린스|캘리포니아]], [[아메리칸 프린스|뉴욕]], [[아메리칸 프린스|오하이오]], [[아메리칸 프린스|매사추세츠]] 등 대의원 수가 많은 주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아메리칸 프린스|뉴욕]]은 케네디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만큼 압도적 우위<ref>케네디 61%, 고어 37%</ref>를 기록했고, [[아메리칸 프린스|매사추세츠]]와 [[아메리칸 프린스|코네티컷]] 등 인근 뉴잉글랜드 주에서도 선전했다. 반면 [[아메리칸 프린스|고어]]는 [[아메리칸 프린스|테네시]] 인근 남부권과 [[아메리칸 프린스|미주리]]·[[아메리칸 프린스|미네소타]] 등 중서부에서 조직력을 앞세워 대의원을 착실히 쌓아갔다. 결국 슈퍼화요일은 케네디 52%, 고어 48%로 근소하게 앞서며 1위로 마감한다. [[3월]] 중순부터 [[4월]]까지는 남부 경선이 이어졌는데 이 구간은 [[아메리칸 프린스|고어]]의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아메리칸 프린스|조지아]], [[아메리칸 프린스|사우스캐롤라이나]], [[아메리칸 프린스|루이지애나]] 등에서 [[아메리칸 프린스|고어]]가 잇달아 승리하며 격차를 다시 좁혔고, 한때 두 후보의 누적 대의원 차이는 채 100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박빙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 언론에서는 1980년 카터-케네디 경선 이후 가장 치열한 민주당 경선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경선의 최종 분수령은 [[아메리칸 프린스|캘리포니아]]였다. 대의원 수만 400명이 넘는 최대 승부처였던 만큼 양 캠프 모두 총력전을 펼쳤는데, 케네디는 [[아메리칸 프린스|실리콘밸리]]와 [[아메리칸 프린스|할리우드]] 인사들의 조직적 지원, 그리고 젊은 층 투표 독려 전략을 앞세워 근소하지만 확실한 승리<ref>케네디 53%, 고어 46%</ref>를 거둔다. 같은 날 치러진 [[아메리칸 프린스|뉴저지]], [[아메리칸 프린스|뉴멕시코]] 경선까지 케네디가 가져가며 사실상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다. [[아메리칸 프린스|고어]]는 경선 종료 사흘 뒤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깨끗한 승복을 선언했고, 8월 로스앤젤레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직접 케네디 지지 연설자로 나서 "우리는 오늘 새로운 세대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기려 합니다"라는 발언으로 당내 통합의 상징적 장면을 연출한다. 케네디는 전당대회에서 러닝메이트로 [[아메리칸 프린스|루이지애나]] 상원의원 [[존 브로 (아메리칸 프린스)|존 브로]]를 공식 지명하며, 뉴욕 중심의 진보적 이미지에 남부·중도 성향을 더해 본선 확장성을 꾀한다. ==평가==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통령]] 중 한 명이자, 정치인 이전에 하나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인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세 살의 나이에 겪고, 훗날 본인 역시 [[존 F. 케네디 주니어 대통령 암살 사건|재임 중 암살]]당하면서 [[아메리칸 프린스|케네디 가문]]을 둘러싼 비극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치적으로는 [[아메리칸 프린스|뉴욕주]] 상원의원 시절부터 온건한 중도 성향과 깨끗한 이미지, 뛰어난 대중 친화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민주당]]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아메리칸 프린스|20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현직 부통령 [[아메리칸 프린스|앨 고어]]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세대교체의 상징이 되었고,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아메리칸 프린스)|본선]]에서도 승리해 40세의 나이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클린턴 시대 이후 분열된 민주당을 재통합하고 젊은 유권자들을 정치에 적극 참여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업적보다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취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암살당하면서 자신의 국정 철학과 정책을 충분히 실현할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실제 성과보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미국 정치는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가"를 논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는 아버지 [[존 F. 케네디]]와 유사한 평가 구조이기도 하다. 대중적 인기는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이미지, 자연스러운 화술, [[아메리칸 프린스|케네디 가문]]의 후광까지 더해져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셀러브리티로 통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의 교제설은 끊임없이 언론의 관심을 받았으며,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백악관의 영화배우", "아메리칸 프린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의 죽음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당시와 비교되는 대규모 추모 물결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관 앞에서 경례하던 사진과 대통령 취임 선서 장면, 그리고 암살 직전의 연설 영상은 미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기록물로 남았으며,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특히 "세 살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40세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운명을 맞았다."라는 문장은 그의 삶을 가장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두고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재임 기간이 지나치게 짧아 정책적 성과를 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가장 큰 가능성을 남긴 대통령", "가장 사랑받은 대통령", "가장 안타까운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실제 업적보다 상징성과 비극성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아버지 [[존 F. 케네디]]와 자주 함께 언급된다. 결국 그는 미국 정치사에서 대통령인 동시에 하나의 신화로 남았다. 세대를 뛰어넘는 대중적 인기, 케네디 가문의 상징성,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기록, 그리고 재임 중 암살이라는 비극적 최후가 결합되며, 후대에는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미국이 가장 사랑했던 대통령', '영원히 젊은 대통령', '케네디 신화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거 이력== ==여담==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olor (원본 보기) 틀:Youtube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글씨 크기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민주당 (미국) (원본 보기) 틀:아메리칸 프린스 (원본 보기) 틀:역대 미국 대통령 (아메리칸 프린스)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존 F. 케네디 주니어 (아메리칸 프린스)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