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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팔라비 2세는 주치의들로부터 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ref>미국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이란의 사회 혼란이 극에 치닫기 시작한 1978년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ref> 그는 이후 꾸준하게 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처방된 약은 단지 병세가 악화하는 속도를 늦출 뿐 아니라 그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결국 1978년 쯤 되어서는 팔라비 2세는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고 수상과 황비, 황태자가 나랏일을 돌봐야 했다. | 1975년, 팔라비 2세는 주치의들로부터 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ref>미국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이란의 사회 혼란이 극에 치닫기 시작한 1978년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ref> 그는 이후 꾸준하게 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처방된 약은 단지 병세가 악화하는 속도를 늦출 뿐 아니라 그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결국 1978년 쯤 되어서는 팔라비 2세는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고 수상과 황비, 황태자가 나랏일을 돌봐야 했다. | ||
그가 1980년에 받은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국 팔라비 2세는 | 그가 1980년에 받은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국 팔라비 2세는 1982년 테헤란의 호화스런 궁전에서 암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테헤란 외곽의 팔라비 영묘에 묻혔다. <ref>그의 아버지인 [[팔라비 1세]]도 그 영묘에 묻혀있다.</ref> | ||
그의 시신은 | |||
==여담== | ==여담== |
2022년 10월 14일 (금) 14:3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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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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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샤한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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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제2대 샤한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محمدرضا شاه پهلوی | Mohammad Reza Pahlav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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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9년 10월 26일 |
이란 숭고국 테헤란 | |
사망 | 1982년 7월 27일 (향년 62세) |
이란 제국 테헤란 | |
국적 | 이란 제국 |
임기 | 이란국 샤 |
1941년 9월 16일 ~ 1967년 10월 25일 | |
이란 제국 샤한샤 | |
1967년 10월 26일 ~ 1979년 5월 25일 | |
이란 제국 파디샤[1] | |
1979년 5월 26일 ~ 1982년 5월 25일 | |
신장 | 193cm |
아버지 | 레자 샤 팔라비 |
자녀 | 레자 키루스 팔라비 등 |
종교 | 시아파 이슬람교 (세속) |
개요
이란 제국의 2대 샤한샤. 이란의 경제건설을 주도한 인물이다.
생애
생애 초기
1919년, 테헤란에서 군 장교였던 레자 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그의 아버지인 레자 칸이 이란 팔라비 왕조의 샤로 즉위하자 세자가 되었다.
1931년, 르로시 학교에 입학하여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다. 르로시는 프랑스계 학교였고 이 영향으로 팔라비 2세는 평생에 걸쳐 프랑스를 동경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어린 시절부터 서구권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한 서구 문명은 그가 훗살 백색혁명을 일으키며 부르짖은 '위대한 문명(Great Civilization)'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영어, 독어, 불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배우기도 했다. 1936년,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귀국한 그는 테헤란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임관 후 대위까지 국왕인 아빠 빽으로 빠르게 진급했다.
급작스런 즉위
팔라비 1세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아들 모하마드를 군주로 키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런 시간적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큰 위기를 맞이했다. 이란은 연합국괴 추축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연합국은 이란에 군수물자 통행권을 요구하였다. 이란은 거부했고 1941년, 영국군과 소련군이 이란을 침공하자 이란 정부는 항복했다. 이 때 영국이 팔라비 1세를 반강제로 퇴위시키고 모하마드 레자를 왕위에 앉혔다.
명군의 모습
갑작스럽게 이란의 군주가 된 팔라비 2세는 즉위 후 수 년 간, 이란을 점령한 영국과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이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제약하려던 모하마드 모사데크 수상과의 파워게임을 벌여 결국에는 그를 실각시켰다. 이후 그는'백색혁명'이라는 이름의 근대화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치세 40여 년 간, 이란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전국에 도로와 철도가 놓였고 산업이 다각화되었다. 어린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얻었으며 여성들은 속박에서 벗어났다. 국민소득과 국부는 빠르게 증가했고 도시들은 신식으로 정비되었다. 군사력은 유래없이 강력해졌으며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미국의 비호를 바탕으로 이란은 서아시아 최강국으로 거듭났다.
암군의 모습
팔라비 2세는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이슬람 성직자를 강하게 탄압했다. 1977년 있었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팔라비 2세는 무력 진압을 명령했고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란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과실은 특정 계층에게 집중되었다. 정부 관료들과 그들과 연관된 사업가들은 큰 이익을 챙겼지만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작았다. 또한 팔라비 2세는 축재에도 열심이었어서 당시 팔라비 황실의 재산은 세계 그 어떤 왕실의 재산보다도 많았다.[2] 팔라비 2세는 고가의 자동차와 비행기(!)를 모으는 돈이 매우 많이 드는 취미가 있었고 그의 대관식 때에는 현재 가치로 천억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투병과 죽음
1975년, 팔라비 2세는 주치의들로부터 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3] 그는 이후 꾸준하게 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처방된 약은 단지 병세가 악화하는 속도를 늦출 뿐 아니라 그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결국 1978년 쯤 되어서는 팔라비 2세는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고 수상과 황비, 황태자가 나랏일을 돌봐야 했다.
그가 1980년에 받은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국 팔라비 2세는 1982년 테헤란의 호화스런 궁전에서 암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테헤란 외곽의 팔라비 영묘에 묻혔다. [4]
여담
- 결혼을 세 번 했다. 두 번째 부인과는 부인의 불임으로 인해 이혼했다.
- 각종 비행기를 모으는 게 취미였다.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 또한 좋아했다고.
억 소리 나는 취미다
평가
현재까지도 이란은 팔라비 가문이 황실인 황제국이기 때문에 교과서나 TV 프로그램, 공식석상 등에서는 보통은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다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나름 자유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어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