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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에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 (개화)|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는 [[녹우크라이나 헌법 (개화)|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법학자이자 우크라이나 | 극동에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 (개화)|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는 [[녹우크라이나 헌법 (개화)|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법학자이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개화)|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인 [[이반 하자만 (개화)|이반 하자만]]에게 헌법 초안을 작성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와 더불어 국민의회는 헌법 초안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국민의회에 헌법 제안안을 제출하도록 하기 위한 실무조직을 1917년 N월 N일에 창설하니 이 조직이 바로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였다. 제헌위원회의 의장은 [https://en.m.wikipedia.org/wiki/Mykhailo_Hrushevsky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의 제자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베네딕트 야코벤코 (개화)|베네딕트 야코벤코]]가 맡았다. | ||
[[볼로디스히드 (개화)|볼로디스히드]]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설치한 제헌위원회는 하자만으로부터 헌법 초안을 넘겨받았다. 헌법 전문 전체는 하자만이 썼지만 헌법 본문은 뼈대만 갖춰져 있던 상태였다. 제헌위원회는 하자만 및 국민의회와 소통하면서 헌법의 세부적인 사항을 채워나아갔고, 약 1개월 동안 23차례의 회의를 걸쳐 1917년 n월 n일 국민의회에 헌법 최종안을 제출하였다. 국민의회는 헌법의 몇몇 사소한 수정을 가한 후 안을 통과시켰고 그렇게 녹우크라이나 [[녹우크라이나 헌법 (개화)#1918년 헌밥|1918년 헌법]], 통칭 민족문화자치헌법이 제정되었다. 소임을 다한 제헌위원회는 헌법 공포 하루 전에 국민의회 대의원들의 축하 속에 국민의회 회의장에서 해산식을 가지고 해산되었다. | [[볼로디스히드 (개화)|볼로디스히드]]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설치한 제헌위원회는 하자만으로부터 헌법 초안을 넘겨받았다. 헌법 전문 전체는 하자만이 썼지만 헌법 본문은 뼈대만 갖춰져 있던 상태였다. 제헌위원회는 하자만 및 국민의회와 소통하면서 헌법의 세부적인 사항을 채워나아갔고, 약 1개월 동안 23차례의 회의를 걸쳐 1917년 n월 n일 국민의회에 헌법 최종안을 제출하였다. 국민의회는 헌법의 몇몇 사소한 수정을 가한 후 안을 통과시켰고 그렇게 녹우크라이나 [[녹우크라이나 헌법 (개화)#1918년 헌밥|1918년 헌법]], 통칭 민족문화자치헌법이 제정되었다. 소임을 다한 제헌위원회는 헌법 공포 하루 전에 국민의회 대의원들의 축하 속에 국민의회 회의장에서 해산식을 가지고 해산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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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는 의장 1인과 서기위원 1인을 포함해 총 10인의 위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열 명의 위원은 모두 극동 우크라이나인 |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는 의장 1인과 서기위원 1인을 포함해 총 10인의 위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열 명의 위원은 모두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 (개화)|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들 중 의장은 회의를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서기위원은 국민의회 서기국장인 [[유리 흘루슈코 (개화)|흘루슈코]]가 당연직으로 겸임해 사무를 처리했다. 국민의회 외교서기를 겸임하던 [[페트로 트베르도우스키 (개화)|트베르도우스키]]는 [[대한민국 (개화)|한국]]으로의 외교 업무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늦게 합류했다. | ||
제헌위원회의 위원을 맡은 이들 중 몇몇은 위원회의 해체 후에도 정계에 남아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유리 흘루슈코 (개화)|유리 흘루슈코]]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베네딕트 야코벤코 (개화)|베네딕트 야코벤코]]는 제9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페트로 트베르도우스키 (개화)|트베르도우스키]], [[페트로 호로비 (개화)|호로비]], [[ | 제헌위원회의 위원을 맡은 이들 중 몇몇은 위원회의 해체 후에도 정계에 남아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유리 흘루슈코 (개화)|유리 흘루슈코]]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베네딕트 야코벤코 (개화)|베네딕트 야코벤코]]는 제9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페트로 트베르도우스키 (개화)|트베르도우스키]], [[페트로 호로비 (개화)|호로비]], [[루캰 흘리보츠키 (개화)|흘리보츠키]]도 장관, 부총리, 최고의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보즈코, 레보뉴크 등 나머지 5인은 위원회 해산 후 정계에서 퇴장했고 제3차 극동전쟁 중의 기록 소실로 인해 성만 남고 이름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이후의 행적마저 현재까지도 거의 불명인 상태가 되었다. | ||
==여담== | ==여담== |
2024년 5월 3일 (금) 22:05 기준 최신판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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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명 | Установча рада Зеленої України [1] |
영어명 | Constituent Council of Green Ukraine |
창설일 | 1917년 월 일 |
해산일 | 1918년 월 일 |
의장 | 베네딕트 야코벤코 |
서기위원 | 유리 흘루슈코 |
목적 | 헌법 초안 작성 및 검토 |
개요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는 녹우크라이나의 헌법 제정을 위해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가 구성했던 헌법안 작성 및 검토 기관이다.
역사
극동에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는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법학자이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인 이반 하자만에게 헌법 초안을 작성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와 더불어 국민의회는 헌법 초안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국민의회에 헌법 제안안을 제출하도록 하기 위한 실무조직을 1917년 N월 N일에 창설하니 이 조직이 바로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였다. 제헌위원회의 의장은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의 제자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베네딕트 야코벤코가 맡았다.
볼로디스히드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설치한 제헌위원회는 하자만으로부터 헌법 초안을 넘겨받았다. 헌법 전문 전체는 하자만이 썼지만 헌법 본문은 뼈대만 갖춰져 있던 상태였다. 제헌위원회는 하자만 및 국민의회와 소통하면서 헌법의 세부적인 사항을 채워나아갔고, 약 1개월 동안 23차례의 회의를 걸쳐 1917년 n월 n일 국민의회에 헌법 최종안을 제출하였다. 국민의회는 헌법의 몇몇 사소한 수정을 가한 후 안을 통과시켰고 그렇게 녹우크라이나 1918년 헌법, 통칭 민족문화자치헌법이 제정되었다. 소임을 다한 제헌위원회는 헌법 공포 하루 전에 국민의회 대의원들의 축하 속에 국민의회 회의장에서 해산식을 가지고 해산되었다.
구성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의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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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위원회 기념사진. 아래는 사진 속 각 인물의 위치에 따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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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첸코 | 로마넨코 | 하예우스키 | 레보뉴크 | 호로비 |
흘루슈코 | 보즈코 | 의장 야코벤코 | 흘리보츠키 | 트베르돕스키 |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는 의장 1인과 서기위원 1인을 포함해 총 10인의 위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열 명의 위원은 모두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들 중 의장은 회의를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서기위원은 국민의회 서기국장인 흘루슈코가 당연직으로 겸임해 사무를 처리했다. 국민의회 외교서기를 겸임하던 트베르도우스키는 한국으로의 외교 업무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늦게 합류했다.
제헌위원회의 위원을 맡은 이들 중 몇몇은 위원회의 해체 후에도 정계에 남아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유리 흘루슈코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베네딕트 야코벤코는 제9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트베르도우스키, 호로비, 흘리보츠키도 장관, 부총리, 최고의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보즈코, 레보뉴크 등 나머지 5인은 위원회 해산 후 정계에서 퇴장했고 제3차 극동전쟁 중의 기록 소실로 인해 성만 남고 이름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이후의 행적마저 현재까지도 거의 불명인 상태가 되었다.
여담
- 제헌위원회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작고 고풍스러운 건물은 현재 녹우크라이나 헌법역사관으로 지정되어 녹우크라이나 헌법의 역사를 보여주는 아담한 박물관이 됐다. 박물관 1층에 제헌위원회 단체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고, 제헌위원회에 대한 꽤나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 상술된 녹우크라이나 헌법역사관이 위치한 거리 이름 역시 제헌위원회를 기리기 위해 2004년 제헌위원회 거리로 개칭되었다.
각주
- ↑ 발음 : 우스타노우차 라다 젤레노이 우크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