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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억 4,300만│세계 2위 {{글씨 크기|9|(1985년)}}<ref>196-70년대에는 소련에 근소하게 뒤지는 3위였으나, 1980년대 소련 경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장이 되면서 잠시 전체 국내총생산 2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몽골, 만주가 독립한 후 인구 수가 크게 줄면서 국내총생산도 줄어들어 해체 직전에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ref><br>$1억 8,300만│세계 5위 {{글씨 크기|9|(2003년)}}<ref>[[프랑스]]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정도였다. 다만 인구 수는 아련이 프랑스의 3배에 달했다.</ref>
| $2억 4,300만│세계 2위 {{글씨 크기|9|(1985년)}}<ref>196-70년대에는 소련에 근소하게 뒤지는 3위였으나, 1980년대 소련 경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장이 되면서 잠시 전체 국내총생산 2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몽골, 만주가 독립한 후 인구 수가 크게 줄면서 국내총생산도 줄어들어 해체 직전에는 4위권 밖으로 밀려났다.</ref><br>$1억 8,300만│세계 5위 {{글씨 크기|9|(2003년)}}<ref>[[프랑스]]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정도였다. 다만 인구 수는 아련이 프랑스의 3배에 달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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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로 인해 점차 체제의 한계를 맞이했으며, 1987년 집권한 집산회 개혁파의 지도자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헤이세이 개신]](平成開新)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공산권이 붕괴된 해인 1989년, [[신연맹헌법]](新連盟憲法)이 시행되면서 다당제와 의원내각제가 시행되며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마무리지었다. 1990년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의 [[아시아 사회민주당]](アジア社会民主党)이 이끄는 민주진영이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하며 [[대동아집산회]](大東亜集産会)의 일당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조선국 (유신)|조선]]과 [[만주국 (유신)|만주]]가 독립하자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으며, 1993년 처음으로 비공산당 계열인 [[동아신당]](東亜新党)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가 집권하며 자본주의적 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1980년대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로 인해 점차 체제의 한계를 맞이했으며, 1987년 집권한 집산회 개혁파의 지도자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헤이세이 개신]](平成開新)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공산권이 붕괴된 해인 1989년, [[신연맹헌법]](新連盟憲法)이 시행되면서 다당제와 의원내각제가 시행되며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마무리지었다. 1990년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의 [[아시아 사회민주당]](アジア社会民主党)이 이끄는 민주진영이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하며 [[대동아집산회]](大東亜集産会)의 일당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조선국 (유신)|조선]]과 [[만주국 (유신)|만주]]가 독립하자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으며, 1993년 처음으로 비공산당 계열인 [[동아신당]](東亜新党)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가 집권하며 자본주의적 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급격한 자본주의 도입으로 정치,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국가 유지가 어려워졌고, 2003년 마지막 가맹국이었던 [[대만]]이 [[오사카 조약]]을 통해 독립하게 되면서 아련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이끄는 일본국(日本国) 정부가 아련의 정부 조직을 계승했다.
그러나 급격한 자본주의 도입으로 정치,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국가 유지가 어려워졌고, 2003년 마지막 가맹국이었던 [[대만국 (유신)|대만]]이 [[오사카 조약]]을 통해 독립하게 되면서 아련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이끄는 일본국(日本国) 정부가 아련의 정부 조직을 계승했다.


== 상징 ==
==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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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경제 도입, 90년대의 침체 ===
=== 시장경제 도입, 90년대의 침체 ===
그러나 1990년 신사당 집권 이후 도이의 지지율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우선 1936년 이후 50년만에 다당제를 도입하다보니 원내가 10여개의 정당이 난립하며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독립 세력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면서 연맹 해체의 우려가 증폭되었고, 도이는 이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당장 1990년 헌법 개정으로 치러진 각 자치 정부 수반의 선거에서도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조선에서 우익 독립운동가 [[김대중 (유신)|김대중]](도요타 다이추)가 압승하여 자치정부 수반으로 지명되었고, 동일 치러진 조선국 자치 의회 선거에서도 독립을 주장하는 의원들이 전체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헌법상으로 각 지방의 평의회가 독립 투표를 결의한다면, 중앙정부에서 이를 막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내지 정부는 사실상 사면초가에 빠진 꼴이 되었다. 그 외에도 몽골에서 [[몽골인민당]]의 [[폰살마깅 오치르바트]](Пунсалмаагийн Очирбат)가 당선되는 등 독립세력이 각지에서 집권했다. 심지어 내지의 오키나와에서도 독립 세력이 상당한 의석 수를 확보하였다.
또한 독립 세력이 전체 475석 중 1/5에 가까운 76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각지 독립에 호의적이었던 일본공산당과 각지 무소속 의원까지 합치면 100석이 넘었다. 결과적으로 신사당은 독립 요구를 완전히 억누를 수 없었고 김대중의 친미노선에 따라 [[미국]]도 조선과 만주, 몽골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인 압력을 이기지 못한 아련은 결국 1991년 8월 15일, 일본 내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의 독립 투표를 시행했다.
전체 유권자<ref>투표 유권자 기준이 아니다.</ref> 50% 이상의 찬성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치러졌음에도 조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67.45%, 몽골에서 57.56%가 독립에 찬성하며 즉각 독립이 추진되었고 심지어 여론조사 상으로 부결이 예상된 만주에서도 51.69%로 독립 안건이 통과했다. 조선인과 만주족, 화인 유권자들이 크게 결집한 덕이었다. 유일하게 독립이 부결된 곳은 대만으로, 전체 표 중에서는 찬성이 약간 더 많았지만 투표율이 저조해 전체 유권자 대비로는 39.25%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몽골, 만주, 조선의 자치 정부는 즉각 내지 중앙정부와 독립협상을 시작했고, 1992년 연초 사실상 이 지역에서 중앙정부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3월 1일 조선이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이후 8일에 몽골, 31일에 만주가 독립하면서, 아련은 전체 영토의 85%와 전체 인구의 54%를 잃고 초강대국에서 지방 강대국 지위로 격하되었다. 1985년부터 꾸준히 2위를 차지한 총 GDP 규모도 독일에 밀려 4위권으로 하락했다. 이런 충격으로 인해 신사당 도이 내각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고, 1993년 신사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동아신당]](東亜新党)을 창당하며 신사당의 단독과반이 붕괴되었다. 이후 치러진 [[1993년]]의 조기 총선거인 [[제40회 아련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신사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민주동맹(民主同盟)<ref>무라야마의 아시아 사민당, 호소카와의 동아신당, 창가학회 계열인 공명당(公明党)의 연합. 이른바 "사동공 연합(社東公連合; 사토코 렌고)"으로도 불렸다.</ref>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집산회 및 신사당 계열이 집권이 실패하는 파란이 일어났다.
1993년 원내 표결을 통해 최초의 비 집산회 계열이자 최초의 민주진영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가 집권했다. 이 시기부터 1997년까지를 민주정권의 시기라고 부른다. 호소카와는 도이 개혁보다 나아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호소카와 개혁]](細川改革)을 단행했다.
그러나 주요한 산업 기반이었던 조선의 공업지대와 만주의 유전을 잃은 상태에서 급격한 자본주의화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여, 90년대 아련의 경제가 회복될 수 없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1993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55% 가량의 산업체가 정부의 소유로 되어있었으나, 호소카와 개혁으로 이 비중이 1995년까지 15% 수준으로 하락했다. 급격한 민영화로 공공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었고, 관료 시스템의 혼선이 빚어졌다. 또 일본은 저축률이 높아 대부분의 국민들이 상당한 수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급격한 민영화에 따른 환율 상승으로 인하여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초인플레이션이 유발되면서 한순간에 저축금은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호소카와 내각의 지지율은 3%까지 떨어졌고<ref>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모리 요시로]]는 '''"내각의 지지율이 소비세 수준이다."'''라고 비꼰 바 있다.</ref> 설상 가상으로 1995년 [[사가와 규빈 사건]](佐川急便事件)으로 도덕성마저 타격을 입으며 호소카와 내각은 2년만에 퇴진하게 되었다.
뒤를 이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역시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건사고로는 [[한신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과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地下鉄サリン事件)가 있다. 특히 도쿄 사린가스 테러는 민주정권의 신흥종교 규제 완화가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 오키나와에 주둔하게 된 미군에 의한 12세 여아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이는 [[아미안보조약]] 체결 등 친미 외교 기조를 이어나가던 민주정권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당]]과 집산회 계열 정당에 다시 정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여론도 상당했고, 실제로 1995년 치러진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 양당이 모두 부진하고 공산당이 크게 선방한 바 있다. 하지만 신사당은 이후 [[재건당]], 자민당, 민사당 등으로 나뉘어 이미지 전환을 꾀했고 세 정당의 연합이 1997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집고 신진당과 사민당의 정권연합을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하며 민주정권은 겨우 4년의 집권을 뒤로 하고 재정권교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 멸망 ===
=== 멸망 ===
90년대 경기 침체와 조선, 몽골, 만주의 연맹 탈퇴로 인해 점차 아련 체제를 종식해야한다는 여론이 대만과 일본 양측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선 대만의 경우, [[민주진보당 (유신)|민주진보당]](民主進歩党)의 뒤를 이은 여러 정당들이 대만 독립론(이른바 대독론)을 주장했다. 2000년 총선거에서 대만 독립진영은 일본공산당과 연대해 [[인민민주전선]](人民民主戦線)을 창당, 50석에 가까운 의석을 휩쓰는 쾌거를 거둔다. 인민민주전선이 독립에 대한 공산당과 대독주의자의 갈등으로 붕괴된 이후에도 대독주의자들을 대변하는 [[대만단결연맹]](台灣團結聯盟)은 2002년 총선거에서 22석을 차지해 4당에 등극하는 등 그 세력을 과시했다.
일본 내에서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모리 요시로]](森喜朗) 등의 방류계열 급진보수 정치인들이 일본 독립을 주장했다. 이들은 대만의 형편 없는 경제로 인해<ref>2002년 시점에서 대만의 1인당 GDP는 일본의 60% 수준에 불과했다.</ref> 일본의 세금이 대만으로 센다고 주장하며, 일본인의 세금을 일본인에게 써야 더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등의 온건파는 아련 체제의 유지를 주장했다. 야당 내에서 민주당은 아련 체제 유지 입장이었고 공산당은 전 국민투표를 제안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본 내에서도 일본독립론이 우세해지면서, 처음에는 팽팽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던 아련 유지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아련 유지파의 수장 [[가토 고이치]]가 민주당과 연합하고 모리 요시로를 몰아내려다 실패한 [[가토의 난]](加藤の乱, 혹은 [[YKK 항쟁]])이 일어나면서, [[자유민주당 (유신)|자유민주당]] 내 아련 유지파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가토의 세력을 모조리 제명한 채 치러진 2002년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과 민주사회당의 연합은 전체 의석의 3/5를 휩쓸며 압승을 거두었고, 민주당은 100석 남짓 의석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같은 날 치러진 [[대만국 (유신)|대만]]과 [[일본국 (유신)|일본]]의 정부수반 직접 선거에서도 각각 대독론과 일독론을 주장하는 [[천수이볜]](陈水扁)과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당선되었다. 역사가들은 사실상 이 선거로 아련이 끝장 났다고 평가한다.
천수이볜은 2003년 독립 국민투표를 제안했고, 고이즈미 역시 이를 받았다. 일본과 대만 양측에서 전체 유권자 50% 이상의 동의를 조건으로 한 독립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대만에서 독립 56.40%, 일본에서 독립 53.54%로 양국에서 모두 독립파가 승리했다.
2003년 5월, 양측에서 아련 연방 정부의 기능이 정지했다. 천수이볜이 이끄는 대만 자치정부는 총통부에서 대만국을 선포, 독립하였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비슷한 선언을 하였다. 아련 정부는 6월 5일 [[오사카 조약]](大阪条約) 발효를 통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며, 정부 조직은 협약에 따라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일본국 자치정부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로서 1936년 이래 67년간 이어진 아련은 종말을 고했다.'''
== 행정 ==
== 정치 ==
== 경제 ==
== 사회 ==
== 문화 ==
== 대중매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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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5일 (금) 10:29 기준 최신판

아련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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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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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
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
Union of East Asian Soviet Socialist States
국기 국장
尊皇討奸
존황토간

(천황을 높이고 간신을 토벌한다, 1936~1949)
八紘一宇
팔굉일우

(온 천하가 하나의 집, 1949~2003)
상징
국가 기미가요
바다에 가면
국조
봉황
국화
벚꽃
위치
라트 연방 지도.png
1989년 기준 영토
1936년 2월 26일 ~ 2003년 6월 5일
(67년 3개월 10일)
성립 이전 성립 이후
일본제국 일본국
조선인민공화국
대만국
류큐공화국
(미승인국)
만주국 만주공화국
몽골 인민공화국 몽골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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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혁명 (쇼와 유신) 1936년 2월 26일
일본 소비에트 헌법 시행 1936년 12월 1일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 개국 1937년 1월 1일
헤이세이 개신, 다당제 시행 1989년 8월 20일
조선의 연맹 탈퇴 1992년 3월 1일
몽골의 연맹 탈퇴 1992년 3월 8일
만주의 연맹 탈퇴 1992년 3월 31일
오사카 조약, 해체 2003년 6월 5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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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쿄
최대 도시
면적 4,084,657km2 (1989년, 세계 7위[1])
421,802km2[2] (2003년)
내수면 비율
4.4%
접경 국가 소련
중국 (1989년 기준)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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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3억 1,200만명│세계 3위 (1985년)
1억 5,722만명│세계 6위 (2003년)
인구 밀도
170명/km2 (1985년)
362명/km2 (2003년)
민족 구성
일본인 48%│화인 24%│조선인 21%│만주인 2%│몽골인 2%│대만인 1% 등 (1985년)
국어 일본어
지역어 조선어, 만주어, 중국어, 오키나와어, 몽골어, 러시아어
종교 국교 공식적: 없음 (세속주의)
실질적: 국가 신토
분포 불교 35%│기독교 9%│회교 1%│기타/없음 55%[3] (1985년)
군대 대동아공영군
HDI 0.885│Very High (1989년)[4]
행정구역
[ 펼치기 · 접기 ]
행정 체계 연방제 요소를 가미한 중앙집권제
구성국 5개국 (일본, 조선, 대만, 만주, 몽골)
→ 2개국 (일본, 대만) (1992~2003)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천황제 사회주의, 양원제, 일당제, 사회주의 법
의원내각제, 다당제 (1989~2003)
천황[5]
쇼와 덴노 히로히토 (1936~89)
헤이세이 덴노 아키히토 (1989~2003)
역대 최고 지도자
국무경 (1936~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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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총리대신 (1989~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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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다카코 (1989-93)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3-95)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5-97)
하시모토 류타로 (1997-99)
오부치 게이조 (1999-2000)
모리 요시로 (2000-03)
입법부 대동아 최고평의회 (참의원, 중의원)
유일당 대동아집산회 → 다당제 전환[6]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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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국가자본주의[7], 부분적 집산주의, 노동자 자주관리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명목)
$2억 4,300만│세계 2위 (1985년)[8]
$1억 8,300만│세계 5위 (2003년)[9]
1인당
$7,800│세계 25위 (1985년)[10]
$11,400│세계 53위 (2003년)[11]
화폐 대동아 엔 (EAY,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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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GMT+09:00 (대동아 표준 시간대, AST)
차량 통행 방향 왼쪽 (좌측통행)
도량령 SI 단위
연호[12] 쇼와 (1936~1989)
헤이세이 (1989~2003)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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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일 1945년 9월 24일
대조수교일 1995년 8월 15일
주조대사관 경성시 종로구 율곡로 6
ccTLD
.ea
국가 코드
392, EA, JAP, JP
전화 코드
+81[13]

개요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일본어: 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은 1936년부터 2003년까지 동아시아에 위치해있던 사회주의 국가였다. 약칭 아련(亜連)으로도 알려져있다. 냉전시기 제3세계의 종주국가로 활약했던 국가로 알려져있다.

일련의 하급 군장교가 일으킨 2월 혁명(쇼와 유신)으로 성립되었으며, 소련, 몽골, 투바에 이은 세계의 네번째 사회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非마르크스주의 노선인 천황제 사회주의(天皇制社会主義)[14], 사회주의적 국가주의를 채택하여 소련과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지 않았다. 전후 아련은 미국과 소련을 이은 세번째 축으로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인도,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비동맹 사회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국가로 자리잡았다. 스즈키 모사부로(鈴木 茂三郎) 국무경의 집권 기간인 1955년부터 1965년까지는 친소련 반서방 외교를 표방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주요 정책이었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1965년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면서 서방 쪽에 기운 비동맹 사회주의 국가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내부적으로 공산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강력한 집산주의적 경제 체제를 유지했다.

1980년대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로 인해 점차 체제의 한계를 맞이했으며, 1987년 집권한 집산회 개혁파의 지도자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헤이세이 개신(平成開新)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공산권이 붕괴된 해인 1989년, 신연맹헌법(新連盟憲法)이 시행되면서 다당제와 의원내각제가 시행되며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마무리지었다. 1990년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의 아시아 사회민주당(アジア社会民主党)이 이끄는 민주진영이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하며 대동아집산회(大東亜集産会)의 일당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조선만주가 독립하자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으며, 1993년 처음으로 비공산당 계열인 동아신당(東亜新党)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가 집권하며 자본주의적 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급격한 자본주의 도입으로 정치,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국가 유지가 어려워졌고, 2003년 마지막 가맹국이었던 대만오사카 조약을 통해 독립하게 되면서 아련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이끄는 일본국(日本国) 정부가 아련의 정부 조직을 계승했다.

상징

국호

언어별 명칭
일본어 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 (だい とうあ ひょうぎ かいしゃ かい しゅぎ こっか れんめい)
영어 Union of East Asian Soviet Socialist States; UEA[15]
Union of Greater East Asian Socialist States; GEA[16]
화어 大東亞理事會社會主義國家連盟 (ㄉㄚˋ ㄉㄨㄥ ㄧㄚˋ ㄌㄧˇ ㄕˋ ㄏㄨㄟˋ ㄕㄜˋ ㄏㄨㄟˋ ㄓㄨˇ ㄧˋ ㄍㄨㄥˋ ㄏㄜˊ ㄍㄨㄛˊ)
조선어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
프랑스어 Union des États socialistes soviétiques d'Asie de l'Est
러시아어 Союз Восточно-Азиатских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Государств
스페인어 Unión de Estados Socialistas Soviéticos de Asia Oriental
아랍어 اتحاد الدول الاشتراكية السوفيتية في شرق آسيا

가장 잘 알려진 공식 국호는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으로, 1937년 대동아 사회주의 헌법 발효 이후 1994년까지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Union of East Asian Soviet Socialist States라고 불렀다. 평의회를 Soviet로 번역한 것인데, 소련과의 외교 관계가 긍정적이었던 1955년부터 1965년까지는 아련 내에서도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으나 1966년부터 공식적으로 Union of Greater East Asian Socialist States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요구했다.

약칭은 아련 혹은 동아련으로, 당시 아련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 내에서도 이러한 명칭이 줄곧 사용되었다. 영어 약칭은 이스트아시아의 약자인 EA를, 혹은 동아연방이라는 의미의 UAE를 사용했다. 그냥 동아시아, 혹은 East Asia라고만 칭하기도 했다.

아련의 모태가 된 국가인 일본(日本, Japan)이라는 비공식 국호도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소련이 러시아로 불렸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련 전체가 일본은 아니었지만, 일본계가 정치와 경제, 인구 수 등에서 모두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다당제 시행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사회주의적 요소가 소멸하고, 조선과 만주가 독립하며 더는 제대로 된 연맹 기능조차 할 수 없게 된 1994년부터는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제안으로 대동아 국가 연맹(大東亜国家連盟)으로 공식 국호를 변경했으며, 일본-대만 국가연합(日本 - 台湾国家連合)이라는 비공식 국호도 사용하였다. 이 국호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9년간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용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 국호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국가

국기

일장기
(1936~1957)
노농적기
(1957~2003)

1936년부터 1957년까지는 기존 일본 제국(日本帝国)의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구 제국과의 단절을 나타내고,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기 위해 1957년 새로운 국기가 제정되었다. 1955년 집권한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는 동아련만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여러 상징물을 추가하기를 원했고 소련의 국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새로운 국기를 고안해, 2년 후 절차를 거쳐 국기로 지정하였다.

1957년부터 지정된 새 국기는 공식 명칭으로 노농적기(労農赤旗; 로-노-아카하타)[17]로, 영어로는 단순히 "Rising Sun Flag with Hammer and Sickle"(낫과 망치가 그려진 욱일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고안자인 스즈키 모사부로의 이름을 따 스즈키의 깃발(鈴木の旗)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이 깃발은 스즈키가 축출된 1965년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1993년 이후로도 이념과 무관한 국가적 상징물로서 계속 사용되어 결국 멸망때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디자인을 보자면 낫과 망치가 일본의 오랜 상징인 욱일(旭日) 문양과 함께 그려진 국기이다. 구체적으로 디자인은 욱일기(旭日旗)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욱일기는 일본과 아련의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로 오래 사용되어왔으며, 나아가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을 상징하였다. 스즈키 국무경은 이를 "천하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팔굉일우) 아시아의 협화적 사회주의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였다. 상단에 그려진 빨간 선은 이러한 팔굉일우가 세기를 넘어서 1,000년 이상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된다.정작 100년도 못갔다 태양 안에 그려진 낫과 망치는 일본식으로 개조된 것으로, 톱니바퀴와 벼이삭이 그려져있다. 이는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한다.

여담으로, 그루지야 SSR(Грузинская ССР)의 국기에서 색상만 바꾼 것과 디자인이 거의 비슷하다.[18]

역사

2월 혁명의 배경

1867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개화를 이룬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서구식 의회제와 경제 체제를 도입해 빠르게 국제적 강국으로 올라섰으며, 1894-1895년의 청일전쟁과 1904-5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국제 사회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제국은 1895년 대만을, 1910년 조선을 합병하며 비서구권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체제의 모순도 가중되고 있었다. 우선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2,000년간 일본 경제를 부양하던 농업이 급격히 몰락, 인구의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또한 소작 제도도 폐지되지 않아,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응하여 데라우치 총리가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을 단행하자, 식량난이 가중되었고, 결국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여 쌀 소동(米騒動)이 일어났다. 쌀소동의 결과로 1920년대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라 불리는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허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하부구조의 불평등함을 그대로 둔 채로 상부에서의 정치 개혁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했다. 1920년대 내내 식량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쌀을 공출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 내의 쌀 값이 진정되었지만, 한편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며 일본의 농민들은 극도의 빈곤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진재공황(震災恐慌), 정경유착에 의한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 금본위제 복귀 여파와 금해금(金解禁)으로 인한 1930년의 쇼와공황(昭和恐慌) 등 공황이 연이어 발생하며 일본 경제는 침체되었다. 정치도 불안정해졌다. 1928년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立憲󠄁民政黨)과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 양당의 의석 차이가 1석에 불과하게 되면서 정권 불안 요소가 가중되었다.

이로 인한 사회 모순이 극대화되었고, 군부도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군부는 통제파(統制派)와 황도파(皇道派)로 양분되어있었다. 통제파는 다시 도조(東條英機)의 정통한 통제파와 이시와라(石原莞爾)의 만주파(満州派)로 나뉘었다. 만주파는 만주의 완충지대화와 비소련 정책을 견지하긴 하였으나 만주파와 중앙 통제파 모두 귀족주의, 보수주의, 친-자이바츠, 반서방주의, 지소련주의 등에서 일치를 보았다. 통제파는 중국, 미국과 전쟁을 하며 소련과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한다고 본 팽창주의자들이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반면, 황도파는 대표적으로 빈한한 지역이었던 도호쿠 지방의 청년 장교와 하급 군관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계급적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주의 쪽에 치우쳐지게 되었다. 이들은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결속주의를 옹호하고 사상가 기타 잇키(北一輝)가 내세운 순정사회주의(純正社会主義)[19]를 표방했다. 이들의 사상은 궁극적으로 극렬한 존황주의에 있었으며, 천황을 위해 자이바츠, 기득권, 통제파 군부 등의 기성 세력을 몰아내야한다는 존황토간(尊皇討奸) 이념을 내세웠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중국과 화친하고, 친서방을 표방하며, 소련을 정벌해야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통제파와 황도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점차 판도는 통제파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이끄는 황도파 장교들은 대체로 기득권의 아웃사이더였기에 관료직을 맡은 경험이 부족해 무능했으며, 이는 황도파가 통제파에 비해 군 수뇌부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아라키가 1934년 알코올 중독 문제로 육군대신직을 사임하고, 후임자이자 마찬가지로 황도파였던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도 츠지 마사노부(辻政信) 등 통제파의 모략으로 쫓겨나면서 중앙 관직에서 황도파가 배제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통제파의 전횡에 저항하기 위해 황도파는 1936년 2월 26일 급작스럽게 통제파를 숙청하는 2.26 사건(二・二六事件)을 기획했다. 2.26 사건은 후일 2월 혁명으로도 불리게 된다. 2.26 사건은 통제파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상황을 반전시켰다. 황도파 장교들은 총리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대신이자 전 총리대신,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대장대신이자 전 총리대신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외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등을 총살했다.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육군대신 등 제거 대상으로 지목되지 않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부 군 고위급 인사와 지치노부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親王) 등은 2.26 혁명을 지지하고 있었다. 쇼와 천황도 청년 장교들의 "의거"에 감복하여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로서 2.26 사건은 성공으로 마무리되었으며, 히로히토 덴노의 재가를 통하여 내각총리대신의 직책을 폐지하고 내각을 이끄는 새로운 기관의 장으로서 국무경을 신설, 마사키 진자부로를 장으로 앉혔다.

군사정권의 개혁, 쇼와 유신

2월 혁명 이후 군사정권의 개혁을 쇼와 유신(昭和維新)이라고 부른다. 공식적으로는 신체제운동(新体制運動)이라고도 하며, 신체제운동과 쇼와유신은 같은 사건을 의미한다.[20] 학자 별로 쇼와 유신의 기간을 다르게 잡지만 일반적으로 마사키의 집권이 시작된 1936년에 시작되어, 문민 총리가 집권하기 시작한 1945~46년 경에 종결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정권을 잡은 황도파 일원들은 모든 정당의 활동을 중지하고, 군사정권에 의한 국무 평의회가 국가를 주도하는 체제를 선언하였다. 국무경 마사키 진자부로도조 히데키 등 구 통제파 일원들을 숙청함과 동시에 자이바츠(財閥)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마사키의 국무 평의회는 미쓰비시(三菱), 스미모토(住友), 미쓰이(三井) 등 15~20여개의 주요 자이바츠 집단을 해체하고, 이를 국유화해 산업조합체를 설치, 집산주의(集産主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일체 사적 소유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이때 일본의 정책은 네프(NEP) 시대의 소련과 비슷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분류된다.

1936년 12월, 일본 평의회 헌법(일명 일본 소비에트 헌법)이 시행되었다. 주요한 내용은 주요 기업 및 산업체의 국가 소유, 귀족원 폐지 및 참의원 설치, 천황의 상징적 지위 격상, 일체 정당 활동 금지, 언론 사전 검열제도 강화, 조선 및 대만에 자치권 부여 등이 있었다. 이에 따라 1936년 12월 첫번째 평의회 선거가 치러졌고 제한적이긴 하였지만 처음으로 조선과 대만에서 각각 30명, 15명의 평의회 의원이 선출되었다. 소집된 평의회 의원들은 1937년 새로운 헌법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 즉 아련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1936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쇼와 유신은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으로 일본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국무경(1940~43년 재임)을 중심으로 한 신체제운동이 전개되어 모든 정당의 활동이 금지됨에 따라 민주주의가 퇴보했으며, 자유발언도 제한되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 등 사회주의적 개혁에 반대하던 여남은 관료 및 군인, 정치인들은 관념우파(観念右派)로 분류되어 전원 숙청되었다. 반면 조선과 대만에서 자치권이 부여되었고, 1937년에 이어 1941년의 선거에서는 일본 내지와 같은 조건을 통하여 평의회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천황의 권한은 겉으로는 강화되었으나 기타 잇키가 주장한 "기관으로서의 천황"으로서의 면이 더 강해지게 되었다. 즉, 천황은 에도 시대의 상징적 존재와 같은 지위 이상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적으로 천황 숭배와 결속주의적인 면은 강해졌지만 역으로 천황이 군통수권과 의회해산권 등을 잃으며 완전히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쇼와 천황은 개인적으로 이를 나쁘지 않게 보았으며, 청년 장교들의 근황주의 정신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군국주의적인 면은 강화되었다. 정치적으로 기반이 취약했던 황도파는 각 지방의 유지들을 억압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통제적 정책을 펼쳐야했고, 이는 중앙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도조 등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던 통제파와 달리 황도파는 기타 잇키, 오카와 등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하급장교가 주가 되었던 탓에 오히려 중앙집권제가 공고화된 1940년대 이후로는 이것이 문민통치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농업 면에서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농업을 확대, 농촌 공동체를 강화하고 국가 주도의 농업 통제 정책윽 시행했다. 국가의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자원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농민을 대규모 집단으로 통합, 각 지역에 협종 조합과 공동 농장을 설립해 노동력을 통해 효율적으로 생산하도록 했다. 또한, 농산물 가격과 유통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도록 했다. 1936년 반포된 헌법에 따라 소작제도는 폐지되었으며, 모든 토지는 국가로 귀속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생활은 급격하게 개선되었으며, 농업 생산량이 증대됨에 따라 고질적이었던 식량난을 해소하는데도 성공했다. 동시에 농업 생산을 군사적 목적과 직접 연결해 전시 상황에서는 농업 생산을 군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산업 면에서는 소련의 경제 정책을 받아들여, 국가 주도로 공업을 체계적으로 재편하고 국가 주도의 공업 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군수 물자와 자원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가 직접 관리하여 군사 생산력을 극대화했으며, 민간 경제를 통제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통해 모든 산업 활동을 국가 계획에 따라 조정했다. 중요한 변화는 종전에 계획되고 있던 중일전쟁(日中戦争)을 취소했다는 점이다. 군부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원자재를 무역으로 확보해 본토의 공업 생산을 지원했다. 나아가 조선 북부 지역에 대대적으로 공업 지대를 건설해 만주로의 진출 발판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1940년대에 들어서 대부분의 사적 소유가 자연스럽게 철폐되었으며, 대부분의 작업장에서 산업별 협동조합체가 설립, 국가가 감독하는 노동자 자주관리(自主管理) 제도를 통해 집산주의가 실현되었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중국과의 친선 관계가 강화되었고 중일전쟁에 대한 계획도 철폐되었다. 또 미국, 영국, 프랑스와도 이전에 비해 호의적인 관계를 추구하고자 했는데, 이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쇄국주의적인 정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에 미국은 이를 반겼다. 아련은 공산주의에 가까운 정치경제 정책을 추구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주의를 표방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결속을 강조하는 순정사회주의와 공화제를 목표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일맥상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권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과 만주를 독립시키고자 한 공산주의자들은 아련의 잠재적인 적이었고 일본공산당은 지하에서 계속 활동하며 반정부 테러를 저질러댔다. 아련은 이 때문에 소련 정벌을 기획하고 있었고, 실제로 1939년 북방 출병(北方出兵)을 단행하였다.

북방 출병은 공산주의 정권을 결단내고 북방의 광활한 대지를 확보한다는 기획이었다. 1939년 4월,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21] 장군이 이끄는 관동군(関東軍)과 만주군(滿洲國軍)은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와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몽골 일대를 기습적으로 습격, 순식간에 몽골 인민공화국을 멸망시키고 블라디보스토크, 울란바토르(Улаанбаатар) 등의 주요 거점을 차지했다. 또 강력한 해군을 앞세워 캄차카(Камча́тский) 반도와 사할린(Сахали́н) 섬 전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부실한 일본군의 역량으로 선전은 여기까지가 끝이었으며, 소련군의 반격으로 1939년 8월까지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캄차카 반도를 빼앗기고 몽골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이 더 힘을 냈다면 조선까지 그대로 밀어버리고 일본을 결단낼 수 있었겠으나, 소련군 역시 대숙청(Ежовщина)으로 인해 역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더구나 나치독일의 위협이 가시화되면서 소련과 일본은 1939년 11월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경을 조정했다. 이에 따라 몽골을 일본이 차지하는 대신 일본이 군사고문단과 기술을 소련 측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마사키 국무경이 사임하고, 황도파에 가까웠으나 대외관에서 통제파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집권하게 된다.

아련은 국민당군과 함께 공산당군에 대한 토벌 작전을 전개했으며, 그 결과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양해로 아련은 중국의 통치가 잘 닿지 않고 있던 몽강(蒙疆) 지역(내몽골)을 자국의 영토로 하였으며, 중국과의 무역 협정을 통하여 동반 경제 성장을 도모하였다. 한편 1940년, 아련은 만주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함으로서 몽골, 만주, 조선, 일본, 대만을 잇는 세계 영토 면적 7위의 방대한 대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은 그 어떤 진영에도 편승하지 않았다. 북방정벌이 몇년 더 미뤄졌다면, 일본이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소련을 쳤을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하지만 소련과 협약을 맺은 이상 전쟁을 할 유인도,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아련은 후방에서 각 국가를 지원하는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맡았고, 이러한 "전시 케인스주의"(Military Keynesianism)[22]를 통하여 경제를 소생시켰다. 소련-독일 전쟁에서는 소련에 기본적인 물자와 기술을 조약에 따라 지원하긴 했으나, 적극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아련은 사실상 독일의 패전이 결정된 1944년 연말에서야 연합국에 가담해 1만 5,000명 정도의 소규모 인원만 파병하는데 그쳤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사회로 나아가다

1943년 고노에 국무경이 일신상 이유로 물러난 이후 황도파의 야나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가 집권했고, 이듬해 야나가와가 서거하면서 오타바 히데요시(小畑英良)가 4대 국무경으로 취임해 1946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통제파와 달리 황도파는 문민적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소좌, 소령 등 계급이 낮은 하급무장들이 국무경이나 요직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1940년대를 거치며 군부의 통치가 약화되고 있었다. 오타바가 사임한 1946년에 처음으로 문민 국무경인 황도파의 사상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가 1949년까지 3년간 권력을 잡게 된다. 오카와는 군국주의자였으나 한편으로 민간인으로서 이전의 지도자들에 비해 군부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받지 않고 있었으며, 이때부터 점차 아련은 문민 통치로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48년, 황도파의 사상적 지주인 기타 잇키가 영면했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최소한 40만 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했다.[23] 10여년간 아련을 뒤에서 조종해온 실권적 사상가의 사망으로 아련은 타격을 입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아련이 기타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49년에는 오카와 국무경이 건강상의 이유로[24] 사임하며, 혁명의 원로들이 모두 권력에서 은퇴하게 된다.

1949년 새로이 선출된 국무경인 가타야마 데쓰(片山哲)로, 구 사회대중당(社会大衆党) 출신 인사였다. 가타야마는 이전 국무경과 달리 사회주의자였으나 평화주의자였고, 일본 기독교단(日本基督教団)에 소속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25] 가타야마는 기독교 윤리에 기반하여 만민평등과 세계평화의 사상을 관철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그는 조선과 대만, 만주, 몽골에 거주하는 인민들의 권익을 내지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였으며, 노동조합의 설립도 상대적으로 자유화하였다. 나아가 그는 점진적으로 정당 활동을 허가하고 평의회 선거의 복수 후보자 입후보를 허용하는 개혁안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은 정부 내에서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으나 일부는 관철되었다.

가타야마는 대외적으로 평화주의 외교를 천명, 제3세계 비동맹(非同盟) 사회주의 중립국가로서 자국의 지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도와 비슷한 노선을 추구하고자 한 것.[26] 이에 따라 그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자와할랄 네루(जवाहरलाल नेहरू) 등과 함께 비동맹 기구를 설립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3세계 사회주의 국가의 리더로서 아련을 내세우고자 했다. 또한, 필리핀과 베트남 등지에서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원,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가타야마의 지위도 점차 낮아졌다. 특히 1950-51년에는 생산량이 300% 감소하고 생필품 가격이 700% 증가하는 대규모의 물자난 현상이 일어났다. 이를 전후공황(戦後恐慌)이라 부른다. 전후공황은 다른 국가에서의 전후 경제난과 비슷한 양상을 띄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은 배후 물자 지원국으로 소련과 유럽 국가에 지원할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대규모로 유효 수요를 창출하고, 고용을 늘렸다. 그러나 전쟁이 종결되며 정부 지출이 급속하게 축소되었고, 기존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군국주의적인 전시 케인스주의로 경기를 유지했던 일본은 이러한 타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950년대 이런 모순이 중첩되며 경제 공황이 닥치게 된 것. 결국 사회적 모순이 극대화되면서 또다시 노동자들의 쟁의가 빗발치기 시작했고 지하 정당으로 활동하던 일본공산당(日本共産党)을 비롯한 극좌 정당이 상당한 지지를 모으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고립이 심화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이 취하고 있는 정책은 파시즘(Fascism)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정당 활동의 일체 금지, 천황에 대한 숭배, 전체주의적인 국가 체제 등에서 파시즘적인 요소가 다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소련 역시 역사적인 이유로 아련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소련 입장에서는 아련이 엳전히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허용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련 내에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유도하여, 아련을 제대로 된 공산주의 국가로 전환해야한다는 주장도 내부적으로 제기되었다. 결국, 첨예해지는 냉전(冷戰)의 상황에서 동아연맹은 소련이 이끄는 제2세계에도, 미국이 이끄는 제1세계에도 속하지 못하며 겉돌았다. 제3세계도 아련을 멀리했는데, 이들은 아련이 조선, 대만, 몽골 등을 식민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일본이 내부적으로는 경제적인 혼란을, 외부적으로는 고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때의 시대를 아련의 과도기적인 침체기로 평가한다.

스즈키의 십년 천하

1950년대 혼란의 여파로 인해 가타야마의 리더십이 약해짐에 따라, 내부적으로 다양한 차기 대권주자들이 부상하게 된다. 당시 정권은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를 중심으로 한 친소파(親ソビエト派),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를 중심으로 한 비동맹파(非同盟派),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중심으로 한 친미파(親味派) 등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스즈키가 권력투쟁에서 승리, 1955년 신임 국무경으로 선출된다.

스즈키는 이전의 권력자들과 달리 소련에 유화적이고 서방에 적대적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의 영향을 받아들인 정권 내 좌파였다. 그는 그가 국무경 직위에서 퇴임한 1965년까지 총 10년간 소련의 지배 구조를 본딴 좌익적인 정치, 경제, 외교 체제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스즈키 개신(鈴木改新), 공식적으로는 일본 사회주의에서의 길(日本における社会主義への道, 속칭 )이라고 한다. 개신은 개혁하여(改) 새로이한다(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소련 공산당(КПСС)과 같은 유일당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 아련은 특정한 정당 없이 무당파로 평의회와 정부가 구성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으나, 스즈키는 소련과 같이 정치 전반을 영도하는 유일당의 존재가 조직적인 정부 구성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1955년 연말 1936년 이후 처음으로 허가된 정당이자 유일당인 대동아집산회(大東亜集産会, Collectivist Party of East Asia)를 창당하고, 국무경이 회장 직위를 당연직으로 겸하게 했다. 다만 대동아집산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정당이라기보다도 보다 통일된 평의회 의원 및 정치인들의 활동을 조직하기 위한 정치회파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평의회를 개편하여 참의원과 중의원의 임기를 보다 엄밀하게 정하였으며, 참의원은 3년에 한번 절반씩 선출하고, 중의원은 4년에 한번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그 이전까지는 중의원의 임기가 고정되있지 않아서 국무경 마음대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재소집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또한, 보통선거제가 확립되어 1956년 선거부터 18세 이상 성인 남녀 모두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고 조선인, 만주인, 몽골인, 대만인에게도 평등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또, 이전까지 중앙집권제에 가까웠던 행정 구조를 개편하여 조선과 몽골, 만주, 대만에 비교적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다만, 소련의 중앙집권제를 본따왔기 때문에 여전히 권력은 도쿄로 집중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조선과 몽골, 만주, 대만 전체를 통솔하는 자치의회가 설립되면서 자치권이 격상되었고, 예산권도 교통, 에너지와 관련된 일부가 자치정부로 이관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판받는 부분을 회피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 대만, 몽골에서 각 민족의 고유 정체성을 강조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조선어 수업 시수가 확대되었고 청장년 문맹인을 대상으로 한 만주 문자, 조선 문자, 몽골 문자 수업도 개설되었다. 무엇보다 관공서에서 50년만에 조선어와 중국어, 만주어 사용이 허가되었다. 아예 조선이나 만주를 UN에 별도 가입시키고자 하기도 하였으나 내외적으로 반발이 심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스즈키는 조선과 만주, 몽골, 일본, 대만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방파제로서 동아시아 민족(東アジア民族)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아래 통합되어야한다고 보았으며, 일본 민족주의 단체들을 오히려 탄압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강력한 공산주의(共産主義) 정책을 추진했다. 그 이전까지도 아련은 상당수의 사업체가 정부 소유이긴 하였으나 여전히 국가자본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반면, 스즈키는 공산주의를 목표로 하여 대규모 사업체의 개인 소유를 규제하고, 역점 사업에 대한 정부의 소유를 강조하여 1965년까지 전체 산업체의 80~85%에 달하는 생산시설을 국유화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 중반에는 사실상 소매 사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산업이 국유화되어있었다. 다만, 각료들과 국민들의 반발로 일체 산업을 국유화하는 공산주의적 개헌은 실패하였다.

소련을 본뜬 연 단위의 경제 개발 정책을 입안했고, 일본을 벗어나 국토 전체를 아우르는 중공업 집단을 건설하였다. 이는 연맹 전역의 급격한 공업화를 불러일으켰다. 1955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인의 73%, 만주인의 82%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1965년에는 이 수치가 각각 44%, 61%로 하락했다. 반면 공업 종사자 비율은 조선에서 50%, 만주에서 35%를 차지하였다. 게이조(京城)는 오사카에 이은 연맹 제3의 도시로 부상하였고 만주의 수도 신쿄(新京)는 제4의 도시가 되었다. 동시에 조선, 만주, 일본, 몽골을 잇는 대규모 철도 프로젝트도 기획했다. 전일본 철도 공사(全日本鉄道公社)에 의해 진행된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1959년 시작되어 스즈키가 물러난 1965년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어 1977년 완공되었다. 이에 따라 울란바토르, 신쿄, 헤이조, 게이조를 잇는 대륙 철도가 구축되었고, 규슈의 후쿠오카(福岡), 고베(神戸)와 남조선의 가타야마(釜山)를 잇는 항만운수 노선의 구축으로 물류 산업의 혁신이 일어났다.

외교적으로는 소련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소련을 지지했고,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도 중립을 취하며 사실상 소련의 손을 들어줬다.[27]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참관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필리핀 전쟁(フィリピン戦争, 1959-75년)에서 공산주의 해방군인 신인민군(NPA)을 지원하였다. 소련과의 경제적인 교류도 확대되었는데, 조선만주에서 시베리아를 잇는 대륙 횡단철도가 건설되었다.

한편 그 외에도 구체자의 폐지와 한자 신체자의 도입 등 여러 업적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즈키의 공산주의 정책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필리핀 전쟁 지원으로 절대적인 정부 예산이 제한받게 되었다. 거듭된 공산주의적 정책으로 인하여 거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사실상 폐지되었기에 민간 투자의 유인이 사라져 경제가 경직되었으며, 공산주의 특유의 관료제적 비효율성도 드러났다. 친소 정책으로 인하여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 중국으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에 차질을 빚게 되어 물가가 상승했다. 또, 1950년대 내내 국가 주도의 대규모 중공업 산업에 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경제 전반에 있어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오요이(大慶, 다칭) 지방의 유전을 개발해 에너지 단가를 낮추고자 했으나 이내 소비량이 생산량을 뛰어넘게 됨에 따라 한계를 드러냈다. 에너지 비용 상승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제조 단가가 높아지며 수출에도 타격을 입었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최대 무역 파트너였던 미국과 중국이 일본의 친소련 정책으로 거래를 꺼리게 되며 경제적 손실이 커졌다.

1963년, 1952년 이후 11년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연 10%가 넘던 높은 경제 성장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스즈키식 공산주의의 종언처럼 여겨졌다. 이듬해인 1964년에도 0.2% 경제 성장으로 사실상 제자리 걸음을 하며 책임론이 거세졌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혼란이 거세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련의 완전한 공산화를 노린 일부 신좌파 조직들이 활동했다. 대표적으로 민청(民青, 전체 이름은 일본민주청년동맹)[28], 공산동(共産同, 전체 이름은 공산주의자동맹, 이른바 분트)[29], 혁공동(革共同, 전체 이름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30]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아나혁련(アナ革連, 전체 이름은 아나키스트 혁명연합), 무당파 급진파(ノンセクト・ラジカル, 이른바 논섹트 래디컬) 등이 활동하며 반정부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니시오의 개혁주의

이런 불만이 누적되며 1965년 연초 친미파의 거두이자, 가타야마의 수제자인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가 보수적인 평의회 의원과 중앙 각료들을 동원하여 스즈키를 축출했다. 이를 스즈키 내림(鈴木降ろし)이라고 부른다. 전반적으로 스즈키 내림은 1년 전에 있었던 니키타 흐루쇼프(Никита Хрущёв)의 축출과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니시오 스에히로가 배후 조종을 통해 중앙위원회 각료 과반의 동의를 얻은 채 스즈키가 대만으로 3주 휴가를 가있던 참에 군의 지지까지 받아 미리 스즈키의 해임안을 처리한 것이다. 스즈키는 쿠데타라며 반발하였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장기여행을 빌미로 소련으로 이주하여 죽을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는데, 사실상 망명으로 생각된다.

니시오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스즈키와 같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오히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반공 친미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으로 이전의 스즈키와 대비되는 유화적, 보수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외교 노선이었다. 그의 외교 노선은 가타야마 데쓰의 비동맹 노선과 일맥상통했으나, 친미에 가까운 부분이 두드러졌다. 그는 앙골라 내전(Guerra Civil Angolana)을 비롯한 제3세계의 전쟁에서 대체로 미국의 편을 들었으며, 소련의 아프리카 외교 노선을 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1973년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실책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 관해서는 미국의 영향력을 감퇴시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지지했으며, 필리핀 전쟁에서도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속 신인민군을 지원했다. 만약 니시오가 신인민군의 지원을 끊었다면, 내전에서 정부군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

그는 "우애"(友愛)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중국, 일본, 인도 등을 잇는 동아시아의 비동맹 노선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는 동아연맹이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와 미국의 제국주의로부터 동아시아의 자주를 지켜나가는 새로운 축이 된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가타야마 데쓰의 평화주의 노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아시아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적 전환을 중단하고 일부 시장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였다. 이는 "아시아식 사회주의"(アジア式社会主義)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소련식 사회주의(공산주의), 유럽식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미국식 사회주의(뉴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동아시아만의 사회주의"가 있다는 논리에서 시작한 이 주장은 소련식 공산주의와 니시오의 경제정책을 구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특히, 1968년에 도입된 신경제기구(新経済機関; SKK)는 아시아식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핵심이었다. 이 개혁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시장 원리를 제한적으로 도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개혁의 세부 내용으로는 우선 기업 자율성 확대가 있다. 니시오는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지는 않았으나, 기업들이 생산량과 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과거에는 중앙 정부가 모든 생산 계획과 자원을 배분했지만, 신경제기구 이후 기업들은 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라 운영 방식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는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노동자 자주관리 정책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간 소비 분야에서는 수요와 공급을 기반으로 한 시장 매커니즘을 도입했다. 일부 소비재와 서비스 분야에서 시장 가격제가 도입되었다. 이는 기업들이 수익성을 고려하여 생산 활동을 조정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소비자들은 더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을 강화하고자 한 가타야마 데쓰, 소련과의 경제 협조를 강조한 스즈키 모사부로와 달리 니시오는 서방과의 무역을 추구했다.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서방 국가로부터 기술과 자원을 도입함으로써 경제적 발전을 도모했다. 이러한 정책은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유도했고, 나아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발전된 경제로 자리 잡게 했다. 한편 농업 부문에서도 집단 농장개인 농장의 병행 운영이 가능해졌다. 집단 농장의 생산성이 낮았던 점을 고려하여, 소규모 개인 농장 운영자들에게도 생산과 판매의 자유를 허용했다. 이는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농민들의 경제적 동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농가 소득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300% 증가했으며 특히 농업 의존도가 높았던 조선에서의 국민소득이 크게 증가했다.

정치적으로는 외양상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는 공산동, 혁공동 등 극좌적 대학생 집단을 가혹하게 탄압했고 나리타 공항(成田空港) 건설 문제로 가장 극좌 운동권이 시끄러웠던 1966년 한해에만 1,500명의 대학생이 긴급 체포, 구속되었다. 1965-1981년 16년간 약 20,000명이 체포되고 200명 이상이 처형되었으며, 이는 국민과 독립 세력 및 극좌 세력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체제 불안정 요소 제거에 성공하며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는 1968년 이후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유연한 정책을 도입했다. 그는 억압적 통치를 완화하며 정치적 안정과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했다. 주요한 슬로건은 살게하고, 잊어라(生きて、忘れて)이다. 이 슬로건은 국민들이 체제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한,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과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제하면서도 국민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유를 허용하는 전략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점진적 자유화도 함유하는 표현이었다. 과거처럼 극단적인 스탈린주의(スターリン主義)적 억압은 피하고,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처벌은 지속하지만 동시에 문화와 일상생활에서는 더 많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것이었다.

스즈키의 산물인 대동아집산회는 여전히 국가의 모든 주요 의사 결정을 통제했지만, 그 역할은 축소되었다. 따라서 집산화의 역할은 내부적으로 실용주의적이고 안정 지향적이며 실용적 관료 중심의 통치를 강화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졌다. 문화적으로 동아연맹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문화적 환경을 누렸다. 195~60년대와 달리, 문학, 예술, 학문 분야에서 체제 비판적인 의견이 일정 범위 내에서 허용되었다.[31] 이는 체제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체제에 대한 불만을 부분적으로 해소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유항산유항심이라는 슬로건 하에 후생적으로도 주택, 의료, 교육 등 사회적 서비스를 강화했으며,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체제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말해, 니시오 스에히로는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민주화를 모색하지는 않았으나, 국민들에게 부분적인 정치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체제 전환의 압력을 줄였다.

그러나 반작용도 없지 않았다. 니시오의 보수적 개혁 노선으로 인해 초기에는 경제적 부흥이 일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다. 관료주의 특유의 경직성이 두드러졌고, 관료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국가가 점차 동력을 잃었다. 또한, 니시오의 통치력도 저하되었다. 1972년 이후 80대의 고령에 접어든 니시오는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았으나 주요 관료들이 그의 은퇴를 만류하여, 1970년대 이후로는 사실상 아련이 집단지도체제로 통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4년과 1979년의 석유 파동(オイルショック)으로 인해 중공업 산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1965년 이후 지속되던 경제적 부흥도 사실상 멈췄고 마이너스 성장에 돌입했다. 이는 잠잠해진 극좌 운동권이 다시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소련-아련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몽골, 조선 독립 운동도 활성화되었으며 1974년 한해에만 게이조에서 7건의 폭탄 테러 및 테러 미수 사건이 있었다.

니시오 사후, 혼란의 80년대

1981년 니시오 스에히로 국무경이 90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1965년 이래 16년간 아련 권력의 중심에 있던 니시오 국무경이 사망하면서 대동아집산회와 정부 내 파벌 싸움은 첨예해졌다. 상징적인 지도자가 사망했기에, 분열이 가속화된 것이다. 때문에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지속적으로 최고지도자가 교체되던 혼란스러운 시기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는 더욱 강한 공산주의적 정책을 내세워야한다는 나리타 도모미(成田知巳) 중심의 맑스파, 다당제 실시 및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한 에다 사쓰키(江田五月) 등의 리버럴파, 케인스주의적인 정책을 지지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중심의 본류파,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중심의 보수강경파, 그 외에 제3세력으로 존재한 미키 다케오(三木武夫)의 세력이나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수구파 등 다양했다.

1981년 니시오의 급사 이후 임시로 고모토 토시오가 신임 국무경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미키 다케오의 측근으로 당내 중도좌파였던 번촌파(番町波)의 수장이었다. 그러나 정부 내 기반이 취약했던 고모토는 임시 국무경 이상의 지위를 얻을 수 없었고 노회한 정치가 후쿠다 다케오가 새로운 국무경으로 취임, 1984년까지 재임하였다. 후쿠다 다케오는 긴축적인 재정 정책을 펼쳐 복지를 축소하고, 아련의 복지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재정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미 나이 70이 넘은 후쿠다의 정권 장악력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으며 1984년 80대에 접어듦에 따라 후세대 양성을 이유로 하여 2선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후쿠다와 함께 정권을 거의 양분하고 있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신이 직접 국무경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집산회 내에서 강력한 파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고령의 나이에도 계속 자신이 국무경이 되어야한다는 일념 하에 다른 측근이 국무경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84년 후쿠다의 퇴임으로 치러진 내부 표결에서 유력 정치인이었던 스즈키 젠코(鈴木善幸)는 이 점을 노리고 다나카의 측근이었던 니카이도 스스무(二階堂進)를 국무경으로 추천하고자 했다. 이는 다나카의 파벌을 분란시키려는 의도였다. 다나카가 반발하면서 니카이도의 국무경 옹립이 저지되고 타협 후보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가 국무경으로 선출되었으나, 니카이도의 낙마는 다나카의 파벌을 크게 분열시켰다. 다나카의 독단적 정치 행보로 인해 다나카 치하에서 국무경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등은 다나카와 결별한다.

이러한 혼란상으로 인해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다케시타 노보루 등으로 지속적으로 국무경이 교체되었고, 여기에 리크루트 사건(リクルート事件) 사건으로 유력 정치인들이 구속되거나 은퇴하는 등의 환란이 가중되었다.

정치적 혼란은 경제적 불황으로 이어졌는데, 1980년대는 30년에 걸친 꾸준한 아시아의 고도 성장이 끝나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침체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우선 지미 카터 행정부(Jimmy Carter Administration)의 폴 볼커(Paul A. Volcker) 연준의장이 단행한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아련이 외채를 갚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외채를 빌려 팽창적인 재정 정책으로 중공업 성장을 도모하던 아련의 입장에서 미 연준(FED)의 고금리 정책의 타격은 컸다. 고금리에 대응해, 일본 정부는 달러에 대비한 엔화의 약세를 이용하기 위해 수출 주도의 경제로 체제를 개편하고자 했으나 정치권의 혼란과 폐쇄적인 금융 정책, 내부 수요에 편중된 국영 기업의 전략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1980년대 말에는 경제 개방 정책과 수출 위주의 경제 구조 개편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으로 리크루트 사건 등의 부패가 잇따르면서 관료제에 대한 반감도 심화되었다. 리크루트 사건은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등의 유력 정치가들이 국영 토건기업 리크루트에 연줄을 이용해 부정 수수를 한 사건을 의미하며, 이 일로 아베와 다케시타의 여러 보좌진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는 국영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정경유착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이어졌다. 결국, 1987년 다케시타의 사임 이후 경제 구조 개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대중의 요구가 되었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을 강화됨에 따라 중재자의 지위를 잡고 싶었던 아련의 지위도 약화되었다. 게다가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를 내세우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Советская война в Афганистане)에서 기타주의 성향의 무자헤딘(مجاهد)을 지원하는 바람에 소련과의 관계가 끝도 없이 나빠졌다. 그렇다고 하여 미국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도이 개혁과 다당제 전환

1987년 리크루트 사건과 관련이 없는 리버럴파의 일원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국무경으로 취임한다. 니시오 노선에 있지 않은 사람이 국무경이 된 것은 22년만이다. 도이는 본래 나리타 도모미의 맑스파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80년대 이후 리버럴파로 전향한 사회민주주의자였다. 도이는 1980년대 말 아련의 모순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소련의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본따, 정치적으로 자유화를 앞당기고 경제적으로 시장주의를 일부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도이 개혁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으로는 검열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국민 계몽 및 선전을 위한 정부의 역할은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자유 언론 제도가 허용되어 수많은 자유 언론사가 설립되었다. 당시 최대의 지하 정당이었던 일본공산당(日本共産党)의 위원장 무라카미 히로무(村上 弘)과 협상하여, 공산당이 무장을 해제하고 합법 단체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점진적 조치를 취했다. 또한 당시 숟하게 정부와 교전을 벌이던 조선과 만주, 몽골 일대의 독립 세력과도 휴전 협정을 맺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이종찬(李鍾贊) 주석, 조선인민혁명군(朝鮮人民革命軍)의 김정일(金正日) 사령관과 3자 휴전 협상을 이끌어냈으며, 소련에 상주하며 몽골 해방을 목표로 하던 몽골인민당(Монгол Ардын Нам)과도 공산당과 비슷한 협약을 맺었다. 이로서 거의 20년만에 아련은 정치적 반대파의 테러로부터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고, 1988 나고야 올림픽(名古屋オリンピック)도 성황리에 마쳤다.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고질적으로 제기되어왔던 사회문제였던 관료제를 해소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만성적 불황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1986년까지만 하더라도 아련의 전체 사업체 중 75~80% 가량이 정부의 소유였다. 도이 다카코는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복지 제도를 지키면서도, 시장의 효율성을 추가하여야 복지가 장기 지속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1987년 철도청을 민영화(JR의 설립)한데 이어 거대 사업체 대부분에 대한 민영화가 이루어졌다. 1989년 기준으로 국영 기업의 비중은 전체 사업체의 60% 수준으로 떨어졌다. 초기에는 이러한 경제 개혁이 큰 효과를 발휘해, 1988년 한해에 GDP 성장률은 12.0%를 기록했고 1989년에는 다소 떨어지긴 했으나 6.7%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었다.

1989년 쇼와 천황(昭和)이 붕어했다. 이는 쇼와 유신을 기치로 세워진 국가의 종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도이는 이 점을 빌어 헤이세이 개신(平成改新)이라는 새로운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새로운 천황인 아키히토(明仁)의 연호 헤이세이의 새로운 개혁이라는 의미로, 1936년 다당제 폐지 이후 무려 53년만에 다당제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1989년 8월 20일, 중참 표결에서 만장일치로 "대동아집산회의 유일당 지위를 포기하는" 안건이 통과됨에 따라, 집산회 외의 정당도 등록 및 활동이 가능해졌다. 법이 통과된지 11분만에 일본공산당이 내무성에 정당 등록을 하며 집산회의 일당독재 체제가 종식되었다.

동시에 국무경(国務卿) 직위를 폐지하고, 일반적인 내각제 국가와 같은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의 직책을 도입했다. 이는 사실상 대통령제나 다름 없던 국무경제를 의원내각제로 개헌하고자 함이었다. 이에따라 1989년 9월 1일 마찬가지로 만장일치로 내각제의 도입이 결정되었고, 의회 임시 표결을 통해 도이 다카코 국무경이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단, 구 제국과 달리 천황에게 내각총리대신 임명권이 없었고 평의회가 직접 임명하는 것으로 헌법을 정하였다.

1989년 연말 대동아집산회는 유일당 지위를 잃음에 따라 자진하여 당명 개정과 강령 교체를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신사당(新社党)으로 개편되었다. 다당제가 허용됨에 따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를 비롯한 다수의 개혁파가 아시아 사회민주당(アジア社会民主党)을 창당해 집산회에서 이탈했고, 이에 따라 신사당의 당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국내 우익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김대중(金大仲)과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 김정일(金正日)의 합의로 조선공산당과 한독당이 통합한 조선독립당(朝鮮独立党)이 창당되었다.

1990년 첫번째 자유선거가 치러졌다(제39회 아련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도는 사실상 기존 체제의 유지를 천명한 도이 다카코의 신사당 대 무라야마 도미이치아시아 사회민주당,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의 민주의 바람(民主の風)이 대표한 민주 진영으로 양분되었다. 초기에는 민주진영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민주진영은 조선 및 몽골 독립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비치는데 실패했다. 또 거대 지하 정당인 일본공산당과의 연대도 실패하며 반체제 표가 분산되었다. 결정적으로 오자와 이치로의 부정적 대외 이미지[32]로 인해 점차 지지율이 하락해, 예상과 달리 신사당이 단독과반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단, 조선독립당까지 포함하면 민주진영이 어찌되었든 개헌 의석을 확보하는 절반의 승리를 거두긴 하였다. 1990년 정식 절차를 통하여 도이는 초대 국무총리대신으로 지명된다.

도이 개혁의 평가는 엇갈린다. 보수파는 이 개혁이 조선과 몽골의 독립 세력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실패한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긍정파는 그나마 도이 개혁으로 인해 아련이 동유럽과 같은 "파국적 레짐 체인지"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한다. 2019년 도이 개혁 30주년을 맞이한 AHK의 여론조사에서 긍정평가자는 37%, 부정평가자는 42%, 무응답자는 21%로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33]

시장경제 도입, 90년대의 침체

그러나 1990년 신사당 집권 이후 도이의 지지율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우선 1936년 이후 50년만에 다당제를 도입하다보니 원내가 10여개의 정당이 난립하며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독립 세력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면서 연맹 해체의 우려가 증폭되었고, 도이는 이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당장 1990년 헌법 개정으로 치러진 각 자치 정부 수반의 선거에서도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조선에서 우익 독립운동가 김대중(도요타 다이추)가 압승하여 자치정부 수반으로 지명되었고, 동일 치러진 조선국 자치 의회 선거에서도 독립을 주장하는 의원들이 전체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헌법상으로 각 지방의 평의회가 독립 투표를 결의한다면, 중앙정부에서 이를 막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내지 정부는 사실상 사면초가에 빠진 꼴이 되었다. 그 외에도 몽골에서 몽골인민당폰살마깅 오치르바트(Пунсалмаагийн Очирбат)가 당선되는 등 독립세력이 각지에서 집권했다. 심지어 내지의 오키나와에서도 독립 세력이 상당한 의석 수를 확보하였다.

또한 독립 세력이 전체 475석 중 1/5에 가까운 76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각지 독립에 호의적이었던 일본공산당과 각지 무소속 의원까지 합치면 100석이 넘었다. 결과적으로 신사당은 독립 요구를 완전히 억누를 수 없었고 김대중의 친미노선에 따라 미국도 조선과 만주, 몽골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인 압력을 이기지 못한 아련은 결국 1991년 8월 15일, 일본 내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의 독립 투표를 시행했다.

전체 유권자[34] 50% 이상의 찬성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치러졌음에도 조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67.45%, 몽골에서 57.56%가 독립에 찬성하며 즉각 독립이 추진되었고 심지어 여론조사 상으로 부결이 예상된 만주에서도 51.69%로 독립 안건이 통과했다. 조선인과 만주족, 화인 유권자들이 크게 결집한 덕이었다. 유일하게 독립이 부결된 곳은 대만으로, 전체 표 중에서는 찬성이 약간 더 많았지만 투표율이 저조해 전체 유권자 대비로는 39.25%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몽골, 만주, 조선의 자치 정부는 즉각 내지 중앙정부와 독립협상을 시작했고, 1992년 연초 사실상 이 지역에서 중앙정부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3월 1일 조선이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이후 8일에 몽골, 31일에 만주가 독립하면서, 아련은 전체 영토의 85%와 전체 인구의 54%를 잃고 초강대국에서 지방 강대국 지위로 격하되었다. 1985년부터 꾸준히 2위를 차지한 총 GDP 규모도 독일에 밀려 4위권으로 하락했다. 이런 충격으로 인해 신사당 도이 내각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고, 1993년 신사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동아신당(東亜新党)을 창당하며 신사당의 단독과반이 붕괴되었다. 이후 치러진 1993년의 조기 총선거인 제40회 아련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신사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민주동맹(民主同盟)[35]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집산회 및 신사당 계열이 집권이 실패하는 파란이 일어났다.

1993년 원내 표결을 통해 최초의 비 집산회 계열이자 최초의 민주진영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가 집권했다. 이 시기부터 1997년까지를 민주정권의 시기라고 부른다. 호소카와는 도이 개혁보다 나아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도입하는 호소카와 개혁(細川改革)을 단행했다.

그러나 주요한 산업 기반이었던 조선의 공업지대와 만주의 유전을 잃은 상태에서 급격한 자본주의화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여, 90년대 아련의 경제가 회복될 수 없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1993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55% 가량의 산업체가 정부의 소유로 되어있었으나, 호소카와 개혁으로 이 비중이 1995년까지 15% 수준으로 하락했다. 급격한 민영화로 공공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었고, 관료 시스템의 혼선이 빚어졌다. 또 일본은 저축률이 높아 대부분의 국민들이 상당한 수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급격한 민영화에 따른 환율 상승으로 인하여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초인플레이션이 유발되면서 한순간에 저축금은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호소카와 내각의 지지율은 3%까지 떨어졌고[36] 설상 가상으로 1995년 사가와 규빈 사건(佐川急便事件)으로 도덕성마저 타격을 입으며 호소카와 내각은 2년만에 퇴진하게 되었다.

뒤를 이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역시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건사고로는 한신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과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地下鉄サリン事件)가 있다. 특히 도쿄 사린가스 테러는 민주정권의 신흥종교 규제 완화가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 오키나와에 주둔하게 된 미군에 의한 12세 여아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이는 아미안보조약 체결 등 친미 외교 기조를 이어나가던 민주정권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당과 집산회 계열 정당에 다시 정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여론도 상당했고, 실제로 1995년 치러진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 양당이 모두 부진하고 공산당이 크게 선방한 바 있다. 하지만 신사당은 이후 재건당, 자민당, 민사당 등으로 나뉘어 이미지 전환을 꾀했고 세 정당의 연합이 1997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집고 신진당과 사민당의 정권연합을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하며 민주정권은 겨우 4년의 집권을 뒤로 하고 재정권교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멸망

90년대 경기 침체와 조선, 몽골, 만주의 연맹 탈퇴로 인해 점차 아련 체제를 종식해야한다는 여론이 대만과 일본 양측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선 대만의 경우, 민주진보당(民主進歩党)의 뒤를 이은 여러 정당들이 대만 독립론(이른바 대독론)을 주장했다. 2000년 총선거에서 대만 독립진영은 일본공산당과 연대해 인민민주전선(人民民主戦線)을 창당, 50석에 가까운 의석을 휩쓰는 쾌거를 거둔다. 인민민주전선이 독립에 대한 공산당과 대독주의자의 갈등으로 붕괴된 이후에도 대독주의자들을 대변하는 대만단결연맹(台灣團結聯盟)은 2002년 총선거에서 22석을 차지해 4당에 등극하는 등 그 세력을 과시했다.

일본 내에서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모리 요시로(森喜朗) 등의 방류계열 급진보수 정치인들이 일본 독립을 주장했다. 이들은 대만의 형편 없는 경제로 인해[37] 일본의 세금이 대만으로 센다고 주장하며, 일본인의 세금을 일본인에게 써야 더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등의 온건파는 아련 체제의 유지를 주장했다. 야당 내에서 민주당은 아련 체제 유지 입장이었고 공산당은 전 국민투표를 제안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본 내에서도 일본독립론이 우세해지면서, 처음에는 팽팽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던 아련 유지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아련 유지파의 수장 가토 고이치가 민주당과 연합하고 모리 요시로를 몰아내려다 실패한 가토의 난(加藤の乱, 혹은 YKK 항쟁)이 일어나면서, 자유민주당 내 아련 유지파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가토의 세력을 모조리 제명한 채 치러진 2002년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과 민주사회당의 연합은 전체 의석의 3/5를 휩쓸며 압승을 거두었고, 민주당은 100석 남짓 의석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같은 날 치러진 대만일본의 정부수반 직접 선거에서도 각각 대독론과 일독론을 주장하는 천수이볜(陈水扁)과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당선되었다. 역사가들은 사실상 이 선거로 아련이 끝장 났다고 평가한다.

천수이볜은 2003년 독립 국민투표를 제안했고, 고이즈미 역시 이를 받았다. 일본과 대만 양측에서 전체 유권자 50% 이상의 동의를 조건으로 한 독립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대만에서 독립 56.40%, 일본에서 독립 53.54%로 양국에서 모두 독립파가 승리했다.

2003년 5월, 양측에서 아련 연방 정부의 기능이 정지했다. 천수이볜이 이끄는 대만 자치정부는 총통부에서 대만국을 선포, 독립하였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비슷한 선언을 하였다. 아련 정부는 6월 5일 오사카 조약(大阪条約) 발효를 통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며, 정부 조직은 협약에 따라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일본국 자치정부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로서 1936년 이래 67년간 이어진 아련은 종말을 고했다.

행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중매체에서


  1. 소련, 캐나다, 미국, 중국, 브라질, 호주 다음이다.
  2. 전체 면적의 85%를 차지하던 만주, 몽골, 조선이 1992년 독립하면서 해체 직전에 영토가 대폭 줄어들었다.
  3. 신토가 종교에 포함되지 않은 통계로, 실질적으로는 국민의 60% 이상이 토착 종교인 신토를 믿었다. 기독교 신자의 90% 이상이 조선인이었으며, 불교도는 화인과 몽골인이 과반 이상을 차지해 민족별로 믿는 종교가 상이하게 나타났다.
  4. 해체 직전에는 자본주의화로 인한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이 수치가 상당히 낮아졌다.
  5. 법 상으로 천황은 국가원수가 아니었으며 상징적인 지위였다. 1936년 이후 군통수권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에도 막부 시대의 상징적, 종교적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1989년 개헌을 통해서도 바뀌지 않았다.
  6. 다당제 전환 이후에도 집산회가 이름을 바꾼 신사당이 1993년까지 집권했다. 1993년 선거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동아신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집산회 계열 정당의 집권이 마무리되었다. 다만, 하시모토 류타로모리 요시로를 중심으로 한 구 집산회 보수파가 일본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당세를 회복, 아련 해체 직전에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7. 때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에 가까워질 때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소련처럼 원천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았다. 단, 1955년 스즈키의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1980년대 후반까지 전체 산업체의 80% 이상이 정부 소유였기에 사실상 공산주의 체제나 다름이 없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8. 196-70년대에는 소련에 근소하게 뒤지는 3위였으나, 1980년대 소련 경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장이 되면서 잠시 전체 국내총생산 2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몽골, 만주가 독립한 후 인구 수가 크게 줄면서 국내총생산도 줄어들어 해체 직전에는 4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9. 프랑스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정도였다. 다만 인구 수는 아련이 프랑스의 3배에 달했다.
  10.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으로, 중진국의 최고~선진국의 최저 사이였다.
  11. 포르투갈과 비슷한 수준으로, 중진국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 자본주의화 혼란의 영향으로 지하경제가 활성화되어 비공식적인 수입원이 높았기 때문에 실질 소득은 이보다는 높아서 최소한 스페인(20,000달러 대 초반) 수준은 되었다.
  12. 1989년부터는 서력기원을 병행해 사용했다.
  13. 아련 해체 이후 일본이 이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
  14. 그 성격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그 성격과 아련의 사회구성체에 대해서는 국가자본주의, 군주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혹은 파시즘이라는 의견까지 다양한 분석이 공존하고 있다.
  15. CIA미국 국무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명칭
  16. 아련 외무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명칭
  17. 직역하자면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깃발"이라는 뜻이다.
  18. 정작 제작자인 스즈키는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19. 순수하며(純) 바른(正) 사회주의를 의미하며, 순정(純情) 소설과는 그 한자가 다르다.
  20. 다만 정치, 경제, 외교, 국방 전체를 아우른 유신에 비해 신체제운동은 정치적인 성격을 한정하는 용어에 가깝다.
  21. 본래 만주파 소속이었지만, 2.26 혁명 이후 전향하였다.
  22. 전시에 국가 주도의 강력한 통제 경제를 통하여 유효수요가 창출되어 경기가 부흥된다고 보는 케인스 학파(Keynesian)의 가설을 의미한다.
  23. 다이쇼 덴노(大正天皇)의 장례식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례식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이를 상당히 언짢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4.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인한 정신병력이 심해졌다.
  25. 아소 다로(麻生太郎)와 더불어 일본 역사상 유이한 기독교 지도자이다.
  26. 전임자 오카와가 인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도 어느정도의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7. 1936년 이후 일본이 전통적으로 중국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중국을 처음으로 외교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행보는 중국에게 있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8. 최대 지하 정당이었던 일본공산당의 지하 청년 조직으로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구했다.
  29. 민청에서 이탈한 극좌 공산주의 조직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했다. 청년 극좌 조직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졌으나 1960년과 1968년 2차례에 걸쳐 분열되어 전기파, 반기파, 적군파 등으로 쪼개졌다.
  30. 반스탈린주의 계열 극좌파 조직으로 이후 중핵파, 4인터파, 혁마르파 등으로 분열되었다.
  31. 물론 천황에 대한 비판이나 각지 독립에 대한 의견 표출은 허용되지 않았다.
  32. 그도 그럴것이 구태 다나카의 파벌에 있다가 니카이도 옹립구상으로 격노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쿠데타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나 심통이 나서 민주진영에 붙은 인물이었다.
  33. 연령 별로는 20~30대에서 긍정평가가 높았던 반면(긍정 53%, 부정 17%) 60~70대에서는 부정평가가 높았다(부정 47%, 긍정 29%).
  34. 투표 유권자 기준이 아니다.
  35. 무라야마의 아시아 사민당, 호소카와의 동아신당, 창가학회 계열인 공명당(公明党)의 연합. 이른바 "사동공 연합(社東公連合; 사토코 렌고)"으로도 불렸다.
  36.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모리 요시로"내각의 지지율이 소비세 수준이다."라고 비꼰 바 있다.
  37. 2002년 시점에서 대만의 1인당 GDP는 일본의 60% 수준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