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인민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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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인민공화국 제2대 대통령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Augusto Pinochet
본명 아우구스토 호세 라몬 피노체트 우가르테
(Augusto José Ramón Pinochet Ugarte)
출생 1915년 11월 25일
칠레 발파라이소
사망 2016년 12월 11일 (향년 101세)
칠레 산티아고
국적 칠레
묘지 산티아고 영웅묘지
재임기간 칠레 인민공화국 제2대 대통령
1982년 5월 15일 ~ 1990년 5월 11일
서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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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루시아 피노체트
학력 칠레 육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가톨릭무종교 (국가 무신론)
소속 정당 무소속[1]
소속 단체 인민연합
사상 피노체트주의 (프람주의)
군사 경력
병과 보병
복무 칠레군
1931년 ~ 1998년
최종 계급 원수
참전 칠레 혁명

개요


《나의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86)

칠레의 군인, 정치인. 칠레 혁명을 주도한 군인으로, 본래 비정치적인 군인이었으나 미국의 쿠데타 사주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좌익으로 전향한 후 인민연합을 지지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혁명 후 제대하여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총 8년간 칠레 인민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생애

군인 시절

피노체트는 1915년 프랑스계 가문의 아들로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칠레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다양한 군사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장교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1970년대 초반, 그는 칠레 육군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그가 정치적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군은 매우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성향이었는데, 피노체트는 몇 안되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은 군인이었다. 그는 1973년 6월의 쿠데타 시도를 손수 진압하기도 했을만큼 국가에만 충성했고, 아옌데 대통령도 그를 신임하였다. 1973년 8월 23일, 피노체트는 아옌데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다.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다

당시 칠레의 대통령은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였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아옌데의 당선으로 인해 칠레는 정치적·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아옌데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는 보수 세력과 미국 정부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치러진 총선거에서 아옌데를 지지하는 인민연합이 탄핵 저지선을 돌파하며 선전해 보수 세력이 위기에 휩쌓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의 비공식적인 지원을 받은 반대 세력은 아옌데 정부의 붕괴를 노렸다.

극우 파시즘 성향 군인들이 주축이 된 쿠데타 시도는 9월 11일 일어났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스스로 이 "군사혁명"이 성공하기 불가능하며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쿠데타가 실패하면 도주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국경지대에 집을 구해놓고 며칠간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극우 성향 군인들이 피노체트까지 숙청 대상에 넣으려고 하자, 분노한 피노체트는 산티아고로 돌아와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라는 연설을 한 후 칠레군을 총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고 아옌데 대통령의 신변을 보호했다.

피노체트는 내친김에 친위혁명을 일으켜 군사혁명에 동조한 기독교민주당 등의 야당을 강제 해산하고 보수 파시스트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는 미국의 반발을 샀으나, 민중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이후 아옌데 정권에서 쭉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던 피노체트는 1982년 군적을 정리하고 대통령 출마를 준비한다. 그의 과거 군사 행보를 비판하는 공산당 내 좌파에서 독자적으로 후보를 배출했으나, 양자구도 하에서 피노체트는 68%를 얻어 손쉽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사회주의적 정책

피노체트의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강력한 좌파 공산주의였다. 그는 헤르베르트 프람의 이론에 따르는 벵센 자유대학교 출신의 경제학자들, 이른바 벵센 보이즈(Vincennes Boys)라고 불리는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상호부조 원칙, 집단농장화, 완전한 국유화, 경제적 반우파투쟁을 주요 골자로 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주요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완전한 사적 소유의 철폐: 아옌데는 사회주의자였으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그의 정책은 주요 기간사업의 국유화에 그쳤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이것이 반동파당의 하부구조로서 기능한다고 보아 1983년 헌법을 수정해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전면부정하고 컴퓨터 연산에 기반한 전국적 계획경제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칠레는 완전한 공산주의 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 집단농장 설치: 기독교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부농을 해체하고 농민들의 노예적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농민들의 토지 소유 권리를 부정하고 집단농장 제도를 도입했다.
  • 상호부조: 각 지역에서 시행되는 국가 주도 복지에 더해 도덕적, 윤리적 투쟁과 결합한 "작은 공동체 단위에서의 사회주의 투쟁"을 강조했다. 피노체트는 농민과 노동자, 원주민과 백인 등 여러 집단이 조화롭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상호부조 공동체를 강조했는데, 이로 인해 칠레는 프람주의가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로 평가받는다.
  • 원주민 우대정책: 의원의 최소한 10%가 원주민에게 배정되게 하였으며, 경제적 권리로서는 취업에 있어 원주민들의 우선적 권리를 보장했다. 1987년, 피노체트는 산티아고에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만행과 원주민의 투쟁을 전시한 "칠레 원주민 역사 박물관"을 개관했다.
  • 폭넓은 권리 인정: 칠레는 세계 최초로 제한 없는 동성결혼과 성전환을 허용한 국가가 되었으며, 의료용 약물이 허용되었고 전면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었다. 세계 최초의 성중립 화장실이 그의 임기에 산티아고에 설치되었다. 또, 그는 성별평등부, 원주민권리부, 환경부 등 여러 부처를 신설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극렬히 반대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태평양 상공에서 헬기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급진적 좌파 정책들은 미국의 제재를 야기해 칠레 경제에 초기에는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으나, 라트 연방의 지원과 칠레 경제의 특징은 구리 수출 주도의 생산력 증대로 인하여 1980년대 중반 이후 경제 회복과 고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개인이 부당히 재산을 잃거나 살해, 혹은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반대파 탄압

피노체트는 강경한 반대파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파시스트와 우익 기독교도들을 강하게 억눌렀다. 그는 슈타지를 본딴 DINA(국가정보국)를 창설하고 파시스트로 의심되는 이들을 숙청했다. 이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은 총 3,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을 실종자(desaparecido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칠레에서 완전히 친미 파쇼의 기세를 꺾어놓았다는 입장과, 불필요한 공포정치였다는 비판이 충돌하고 있다.

1986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형식적으로나마 허용되고 있던 인민연합 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화하고, "일국 일당"[2] 원칙에 따라 인민연합을 칠레의 유일당으로 선포했다. 그는 대선에 유일한 후보자로 출마해 99.4%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정적을 제거할 때 괴이한 방법을 쓴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고환을 터트리거나 콜라병에 앉게 해 항문파열을 유도하는 잔혹한 고문은 물론, 파시스트들의 사지를 결박한 채 헬기에 태워 태평양 한복판에서 떨어트리는 수법으로 악명을 얻었다. 이는 후대 공산주의 성향 네티즌들이 파시스트들을 향해 "공짜 헬리콥터 시승식"(free helicopter ride)이라고 비꼬는 것의 모티브가 된다.

외교 정책

남미 전역이 친미 군사독재 정권임을 감안해 명시적으로 제1세계에 가담하지는 않았던 전임자와 달리, 피노체트는 강력한 친코민테른 정책을 추진했다. 인민연합은 1982년 코민테른 가입 신청을 했으며, 1983년 옵저버 자격으로 가입이 승인된 후 1990년 정식 회원으로 승격되었다.

피노체트는 남아메리카의 사회주의적 통합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이웃 국가로의 "혁명 수출"을 지원했다. 또한 1983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공을 열어줄 것을 요청한 영국의 요구를 거절하여, 영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대참패[3]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퇴임 후

1990년, 대통령 3선을 시도하지 않고 물러났다.[4] 퇴임 이후로는 산티아고에서 조용히 생활하였으며, 당의 원로로서 가끔 목소리를 내는 일 외에는 공개 활동을 자제했다. 평론가들은 이것이 그의 소극적인 성격과 관련되어있다고 보고 있다. 말년에 치매 증세를 앓은 그는 2016년 101세의 나이로 조용히 타계했다. 그의 장례는 3일간 국장으로 치러졌다.

평가

독재자?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인민연합)
1981 - 2016 정계 입문
사망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율 (득표수) 당선 여부 비고
1982 대통령 선거 칠레 무소속 5,052,116 (67.40%) 당선 (1위) 초선
1986 대통령 선거 7,850,571 (99.37%) 재선

어록

¡¡Oigan bastardos rebeldes!! ¡¡Quédate ahí!! ¡¡Iré en un tanque y los mataré a todos!!
야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아!!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탱크를 타고가서 네놈들을 다 죽여버리겠어!!
1973년 9월 11일 칠레 군부 쿠데타 당시.
Hasta ayer, Chile estaba ante un precipicio. ¡Pero hoy damos un paso adelante!
칠레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낭떠러지 앞에 서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앞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혁명 성공 이후의 연설 中.

여담

  • 2006년 칠레인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칠레인" 2위로 선정되었다.[5]
  • 생전에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나의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라는 찬양가요도 만들어졌다. 정작 피노체트 본인은 이 노래가 마르크스주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 인민연합 소속이었으나 인민연합 가맹 정당 중에 특정 정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임 도중에는 칠레 공산당과 가까운 사이였고 명예 당원증을 퇴임 후 수여받기도 했다.
  2.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이 존재해야한다"라는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의 혁명이론.
  3. 아르헨티나 측에서 전사자가 300명 밖에 나오지 않은 반면, 영국 측은 전사자 5,400명, 포로 12,500명에 에드워드 왕자까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결과를 거두었다.
  4. 워낙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본인이 희망했다면 영구집권도 가능했다.
  5. 1위는 옛 상관 살바도르 아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