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종 홍황제 이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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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李𨯜)
| 이문(李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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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순(素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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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8월 1일
| 1900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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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한성부 (풍아)|황성 한성부]] [[경복궁 (풍아)|경복궁]] 태의원
| [[황성 한성부 (풍아)|황성 한성부]] [[경복궁 (풍아)|경복궁]] 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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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12월 7일 (향년 72세)
| 1972년 12월 7일 (향년 7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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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한성부 (풍아)|황성 한성부]] [[경복궁 (풍아)|경복궁]] 태극전
| [[황성 한성부 (풍아)|황성 한성부]] [[경복궁 (풍아)|경복궁]] 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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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재위기간
! rowspan="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재위기간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6CB77" | '''대한제국 태자'''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E8CB2D" | '''대한제국 황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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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3월 29일 ~ 1926년 6월 19일 <small>(3년)</small>
| 1944년 9월 28일 ~ 1944년 10월 5일 <small>(7일)</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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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대한제국 제3대 황제'''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대한제국 제4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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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6월 19일 ~ 1973년 12월 7일 <small>(47년)</small>
| 1944년 10월 5일 ~ 1972년 12월 7일 <small>(28년)</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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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100px; 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본관
! style="width: 100px; 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본관
| 전주 이씨
| 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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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부모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부모
|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br>모후 성덕명황후 최씨
|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br>모후 성덕명황후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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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형제자매
| 4남 2녀 중 삼남
| 2남 2녀 중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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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황후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황후
| 정후 폐후 박씨<br>계후 순명홍황후 유씨
| 정후 순명열황후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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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자녀  
| 장남 [[연덕친왕 이택]]<br>차남 [[덕의친왕 이명]]<br>삼남 [[숙원친왕 이위]]<br>사남 [[광종 효황제 이영]]<br>오남 [[승희친왕 이적]]<br>장녀 [[경효공주 이미윤]]<br>차녀 [[경순공주 이미원]]<br>삼녀 [[경명공주 이미영]]
| 장남 [[광종 효황제 이영]]<br>차남 [[덕의친왕 이명]]<br>삼남 [[숙원친왕 이위]]<br>사남 [[연덕친왕 이택]]<br>오남 [[승희친왕 이적]]<br>장녀 [[경효공주 이미윤]]<br>차녀 [[경순공주 이미원]]<br>삼녀 [[경명공주 이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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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종교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종교
| 유교 <small>(성리학)</small>
| 유교 <small>(성리학)</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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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종'''(烈宗)
| '''숙조'''(肅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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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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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천신성흥덕의열희광숙명'''<br>(體天神成興德義烈熙光肅明)
| '''체천신성흥덕의열희광숙명'''<br>(體天神成興德義烈熙光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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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시호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시호
| '''문헌장영성인숭효홍황제'''<br>(文憲章寧成仁崇孝弘皇帝)
| '''문헌장영성인숭효열황제'''<br>(文憲章寧成仁崇孝烈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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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연호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연호
| '''[[함평 시대 (풍아)|함평]]'''(咸平, 1927~1973)
| '''[[천통 시대 (풍아)|천통]]'''(天統, 1945~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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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계급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계급
| [[대한제국군 (풍아)|대한제국 육해공군]] 대원수
| [[대한제국군 (풍아)|대한제국 육해공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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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봉호
! style="background: #E8CB2D; color: #BF1400" | 봉호
| 숙친왕(肅親王)
| 함친왕(咸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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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열종 홍황제 이문(烈宗 弘皇帝 李𨯜)은 [[대한제국 (풍아)|대한제국]]의 제3대 대황제이다.
숙조 열황제 이문(肅祖 烈皇帝 李𨯜)은 [[대한제국 (풍아)|대한제국]]의 제4대 대황제이다.
 
1900년 [[함평친왕 (풍아)|함평친왕]]의 적자로 태어나 1911년 통제영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고, 고속 승진을 거듭해 1943년 해군의 수장인 해군통제부장의 자리에 오른다.
 
해군통제부장 취임 이후 반전파였던 숙조는 지속적으로 대미단독강화 및 중국 전선 철수를 주장하며 사촌 형인 안종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 1944년 9월 안종으로부터 일본 해군과 함께 레이테만에서 옥쇄하라는 명령을 받은 함친왕은 자신을 따르는 해군해병과, 육군 장성들과 공모하여 정변을 일으켜 한성과 경복궁을 장악하며 실권자로 급부상 한다.
 
함친왕은 후사가 없던 안종을 압박하여 황태제로 책봉되었고, 7일 뒤에는 선양을 통해 보위에 오른다. 즉위 직후 물밑에서 진행중이던 연합국과의 강화협상을 채결하며 연합국으로 편을 갈아타며 대한제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전후 미국의 압력으로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새로운 국제를 공포하나, 당시 의정이었던 이승만과의 극한 대치 끝에 1948년 국가안보를 빌미로 계엄을 선포, 헌법을 정지하고 민의원을 해산하며 정당정치 그 자체를 철저히 금지하고 신시대운동과 토지개혁,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개발독재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숙조의 노력으로 천통 말기 제국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천통시대를 상징하는 폭압적 전제정의 장기간 지속으로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한다. 게다가 미국과 데탕트를 둘러싼 이견, 장성한 황태제를 단지 폐후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서인하고 동궁에 방치하여 죽음으로 내몰자 숙조에 대한 민심은 나락으로 향한다. 결국 1973년 12월 6일 숙조에 대한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한다. 숙조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저격 휴유증으로 인해 다음날인 12월 7일 황군수도병원에서 향년 76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 생애 ==
== 생애 ==
=== 불운한 가정사 ===
1900년 [[함평친왕 (풍아)|함평친왕]]의 적자로 태어나, 1914년 함평친왕 사후 차대 함친왕에 책봉되었다. 유년기에는 무에 출중하였고, 해군에 관심을 가지어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해군의 일원으로 복무하던 숙조는 황족 출신의 군인이자, 실전에 능하다는 평판을 받았고, 비록 대동아전쟁의 개전에 반대했지만, 국부군 함대를 궤멸시키고 상해 상륙을 성공시키며 일약 전쟁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1901년 8월 1일 [[무종 명황제 이유|태자]]와 태자비 최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 열종은 궁궐을 뛰어다니며 활달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열종은 총명하였지만 글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어린이의 모습을 보였다. 1915년 14세의 나이로 황족병적령(帝族兵籍令)에 따라 [[강학원 (풍아)|강학원 중등과]]에서 육군유년무관학교 예과에 편입했고 1919년 졸업 이후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열종은 무관 시절을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시기로 여길 정도로 군인 생활에 만족을 표했다.
1943년 숙조는 안종의 신임으로 해군의 수장인 해군통제부장에 올랐으나 줄곳 중국 전선의 확장을 반대하고 북만주에서의 군정 공고화를 주장하던 숙조는 해군의 무의미한 소모를 줄이겠다는 명분으로 육해군의 중국 전선 철수를 주장한다. 1944년 12월 한소전쟁 직후 [[사종 순황제 이준|사종 순황제]]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충격으로 급사하였고 황태제로써 계승서열 1위인 숙조는 연호를 천통으로 하여 즉위했다. 즉위 이후 막후 교섭을 이어오던 미국과의 강화협상을 끝내고


이렇듯 무관으로 성장하던 열종은 1922년 ‘건무 22년 독감’이라고 불린 스페인 독감으로 둘째 형인 [[장평친왕 이호|장친왕]]을 잃고, 1923년에는 큰 형인 [[효문태자 이용|효문태자]]를 잃는다. 연이은 형들의 죽음에 충격을 열종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같은 해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무종]]이 황권 강화를 위해 직접 국사를 주도하며 정계를 주도하던 노쇠한 [[원훈 (풍아)|원훈]]들과 맞서며 건강이 크게 악화하여 뇌졸증으로 쓰러지는 일까지 연달아 일어난다. 언듯 보기엔 가족들에게 연달아 닥친 안타까운 비극으로 보여지지만, 원훈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던 무종과 그런 아버지를 솔선수범하여 돕던 두 형들이 원인 불명의 이유로 급사하자, 두 형들이 먹은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는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도성과 궐 내부에는 원훈들의 암살 시도라는 괴소문이 열종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갔고, 열종은 형들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부황이 쓰러진 일 또한 원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열종이 평생에 걸처 열종에게 올린 사소한 충언에도 매우 편집증적으로 잔혹하게 대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헌법 제정 이후 현조는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일촉즉발의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흔들리지 않는 막후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이를 통해 사종 시대 섭정인 명친왕과 5.16 사건으로 훼손된 황권을 회복되어, 입헌군주제 국가임에도 프랑스의 대통령과도 비견될 수 있는 외견적 입헌군주제로 거듭나게 했다.
=== 대리청정과 즉위 ===
부황이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맡은 열종은 여전히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원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여 원훈들을 증오하였지만, 수백년에 걸친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기엔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다는걸 알고 굉장히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열종은 원훈들이 자신을 암살할 수도 있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늘 호위를 대동하였고, 식사도 스스로 모든 조리 과정을 직접 참관했으며, 그렇게 만든 식사도 기미상궁이 먼저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지 않았다.


이렇게 열종에게는 매우 길었던 3년의 시간이 지난 1926년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무종]]이 붕어하자 열종은 25세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현조는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60년 대한제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외에도 현조는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ref>공식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발음명은 네아토가 된다. </ref>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현조의 재임기인 1969년 대한제국은 서독을 추월해서 2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미국, 소련 다음 가는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 폐후 사건 ===
황위에 오른 열종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힘이 되어줄 세력을 찾고 서서히 힘을 결집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황족들이 황족병적령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기피하여 학업에 열중을 보이지 않은 것과 달리, 정통 무관 코스를 걸은 열종은 여전히 문관보다 열등한 대우를 받던 군부와 영웅주의에 경도된 청년세대의 지지를 확보한다. 이렇게 우군을 확보한 열종은 원훈들과 악연으로 이어진 혼인관계를 정리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 시작한다.


1922년 열종은 황후로 개국공 [[박영효 (풍아)|박영효]]의 형인 개국백 박영교의 손녀 박찬의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당시 열종은 육군유년학교 시절부터 [[순명황후 (풍아)|사모하던 규수]]가 있었으나 황실의 어른인 [[성명황후 (풍아)|자현황태후]]<ref>조선 말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3단계가 되었으나, 칭제건원 이후에는 태후→황태후의 두단계로 다시 원복되었다.</ref>가 직접 주도한 간택이었기에 마지못해 따랐다.  
== 생애 ==
=== 출생과 유년기 ===
1899년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 태황제]]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1912년 12세의 나이에 형 [[선종 효황제 이청|선종 효황제]]에 의해 환친왕(桓親王)에 봉해졌다. 형인 선종이 점잖고 선비의 기질이 강했다면, 현조는 아버지 성조를 빼어닮아 문()에 능할뿐더러 무인 기질이 강하고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녔다.  


이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부패하고 흑막에서 조선을 조종하던 원훈들을 미워하던 열종은 원훈의 손녀였던 폐후를 껄끄러워 했다. 게다가 열종이 친정을 시작하고 폐후의 친가를 견제하고 왕권을 세우고자 하자 일에 격렬히 반대하며 파국을 맞는다. 결국 열종은 황후를 폐서인 하려 했지만, 황후의 작은할아버지인 박영효를 비롯한 대신들이 거의 애걸하며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유년기 강학원 재학 시절 현조는 부황 성조와 형 선종이 학문에 고루고루 탁월했던것과 달리 대부분의 과목에서 중상위권의 성적을 받았으나 역사와 정치학, 법학, 행정학, 지리학, 군사학에서는 부황 성조를 능가할 정도로 매우 출중한 성적을 받았고, 전통 무술과 기병술에 능했다. 이렇듯 현조 또한 제왕의 자격이 충분했으나, 당시 형이자 황태자인 선종이 건강했고, 현조 또한 형의 황태자로써의 의무와 빡빡한 생활을 지켜보며 자라왔기에 황태자 자리에 미련이 없었고, 혹시라도 생길 오해를 막기 위해 육군무관학교가 아닌 해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열종과 폐후 박씨의 사이는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참다 못한 열종은 황후를 폐서인하기로 결심한다. 1929년 말, (함평 9년), 열종은 당시 열종은 황후의 폐위 사유를 "신성불가침의 황제를 비난한 죄, 황제대권을 방해한 죄, 역적을 옹호한 죄"를 들어 황후를 끝내 폐위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신권을 견제하던 열종은 황후를 폐서인하며 왕권을 과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 촉망받는 해군 장교 ===
=== 경오환국 ===
1911년 현조는 해군무관학교 예과 41기로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는 4호생도로써 참전하여 대한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1915년에는 해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써의 삶을 걷게 된다. 현조는 임관 초기 경순양함 낙동함과 한탄함에서 근무하면서 황족과 다른 생활방식을 몸에 익혔다. 1918년에는 해군육전대를 이끌고 연해주 동안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선종으로부터 훈2등 자응장을 수여받고 부위로 특진하기도 했다. 이렇듯 전간기 현조는 해군의 촉망받는 엘리트이자, 유력한 황족으로써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귀족원의 황족의원으로 임명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열종은 마지막으로 원훈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통치권 논쟁을 일으킨다. [[대한제국 국제 (풍아)|대한제국 국제]]는 일본제국 헌법을 모방하여 제정되었기에 일본의 헌법 주류 학설인 천황기관설처럼 황제기관설이 주류 학설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 (풍아)|군부]]는 황제기관설을 배척하고 황제주권설을 숭상하여 정부와 갈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종은 군부를 통해 통치권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1931년 장성급 무관들은 일제히 황제기관설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원훈들은 군부의 주장에 소극적으로 반박했으나, 기세를 잡은 군부는 이를 반역이라며 대차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원훈들이 수세에 몰리자 열종의 측근들은 이를 틈타 원훈들에 대한 탄핵을 주청하나, 모 아니면 도가 되는 형국에 처한 원훈들도 적극적으로 반격하며 건곤일척의 논쟁으로 비화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현조는 해군의 요직을 두루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거친다. 1929년에는 최연소 부령으로 승진했고 1931년에는 최연소 정령으로 1934년에는 참장으로 승진하며 제국 해군의 최연소 진급 기록을 연이어 갱신하였고, 진해 진수부 사령관을 거쳐 해군대학교장과 제2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7년에는 부장으로 승진하여 제2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일전일퇴가 지속되던 논쟁은 개국후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의 상소로 인해 다시금 수세에 몰린다. 당시 학부 고등교육과장이던 이병길은 혈기가 왕성하였고 "일본도 기관설이 주류설인데 바꾸려는 자들은 사심이 있는것. 우리의 충언을 군부는 우리를 역적 취급하는게 억울하다. 신하의 언로를 막은자는 연산과 같은 폭군이다. 근데 우리를 이런식으로 대우하면 서운하다"라는 요지의 매우 불충한 상소를 올렸고 상황은 반전된다. 원훈들은 "이병길이 성상을 향한 충심이 과도하여 실언했다"라는 변명으로 애써 이병길을 감쌌다.
=== 전쟁영웅 ===
1939년 1월, 육군참모총장(陸軍参謀総長)에 황족이자 제2대 명친왕인 [[은정군 (이화에서)|은정군]]이 취임하자 1932년 2월 해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현조를 해군 최고의 군령권자인 통제부총장에 취임시켰고,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1939년 5월 한소전쟁이 발발하자 현조는 대장으로 승진,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총장에 임명되어 소련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비밀도시 빌류친스크를 포격하고, 육군과 해군육전대의 혼성 부대로 이들 도시를 점령하여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이병길의 상소가 올라오자 이때까지 논쟁을 통해 원훈들을 망신주며 서서히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열종은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고함을 내지른다. {{인용문|"《춘추(春秋)》의 의리에 역적을 비호하는 것도 또한 역적이라 하였다. 이병길은 제 조부의 공을 과신해 역심을 품었고 이병길을 옹호하는 자들의 말에도 불충이 들어났다. 이병길의 죄가 명백하니 의금사로 하여금 추국하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리고 민의원을 이용해 원훈들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이때 원훈들은 나름대로 귀족원의 의원들을 통해 저항을 하였으나 열종은 기어코 군대를 동원하여 귀족원으로 접근하는 의원들에게 발포를 하며 내각을 전면 교체하는 한편 [[중추부 (풍아)|중추부]]의 의원들을 모두 파면하며 부황 무종이 소망한 황권 강화를 완수한다.
그러나 한소전쟁의 전황은 현조의 맹활약과 달리 대한제국에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도적인 육군력을 바탕으로 요동에서 한국 육군에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결국 개전 이후 승승장구 하는것 처럼 보였던 한국군은 순식간에 패퇴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변으로 도주하였고, 소련의 위협으로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이때 황제인 [[사종 순황제 이준|사종 순황제]]는 패전으로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자신을 끌어내릴거라 생각하여 주색잡기에 빠져있었고, 당시 총리대신인 김좌진과 육군 수뇌부는 소련의 압도적인 힘에 패닉에 빠졌다. 이에 현조는 원수부회의에서 이들과 멱살잡이를 벌인 끝에 조카인 사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원수부장에 취임, 친척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은정군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 청소년과 노약자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압록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열종은 열종 인생에서 나타나는 편집증적 증세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원훈들과 관계된 가문이라면 하나라도 샅샅이 뒤지고 아에 대한에서 양반을 없애려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원훈들의 세력을 박멸하였다.
그리고리 쿨리크와 주코프가 통제하는 소련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한러전쟁때나 쓰일 구식 대포와 해군의 전함들과 항모, 순양함의 포격까지 총동원한 대한제국군은 간신히 압록강 방어선을 사수한다. 때마침 소련은 폴란드 침공 계획으로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키고 있어, 한국 전선에서의 추가적인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은 국체의 사수를 위해 종전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독일의 중재하에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 함평유신 ===
=== 천통유신 ===
=== 2차대전 ===
=== 2차대전 ===
=== 전후 ===
===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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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1일 (일) 20:5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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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오월오일 오늘인가 집집마다 창포주라
뱃노래 두어 가락에
멱라에서 빠져 죽은 굴원이 슬프구나
아마도 일년 중 좋은 계절에 생각나는 굴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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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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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조 열황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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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4대 황제
숙조 열황제 | 肅祖 烈皇帝
이름 이문(李𨯜)
소순(素純)
출생 1900년 8월 1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의원
붕어 1972년 12월 7일 (향년 72세)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의원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제
1944년 9월 28일 ~ 1944년 10월 5일 (7일)
대한제국 제4대 황제
1944년 10월 5일 ~ 1972년 12월 7일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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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
모후 성덕명황후 최씨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남
황후 정후 순명열황후 유씨
자녀 장남 광종 효황제 이영
차남 덕의친왕 이명
삼남 숙원친왕 이위
사남 연덕친왕 이택
오남 승희친왕 이적
장녀 경효공주 이미윤
차녀 경순공주 이미원
삼녀 경명공주 이미영
종교 유교 (성리학)
묘호 숙조(肅祖)
존호 체천신성흥덕의열희광숙명
(體天神成興德義烈熙光肅明)
시호 문헌장영성인숭효열황제
(文憲章寧成仁崇孝烈皇帝)
연호 천통(天統, 1945~1972)
계급 대한제국 육해공군 대원수
봉호 함친왕(咸親王)

개요

숙조 열황제 이문(肅祖 烈皇帝 李𨯜)은 대한제국의 제4대 대황제이다.

1900년 함평친왕의 적자로 태어나 1911년 통제영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고, 고속 승진을 거듭해 1943년 해군의 수장인 해군통제부장의 자리에 오른다.

해군통제부장 취임 이후 반전파였던 숙조는 지속적으로 대미단독강화 및 중국 전선 철수를 주장하며 사촌 형인 안종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 1944년 9월 안종으로부터 일본 해군과 함께 레이테만에서 옥쇄하라는 명령을 받은 함친왕은 자신을 따르는 해군해병과, 육군 장성들과 공모하여 정변을 일으켜 한성과 경복궁을 장악하며 실권자로 급부상 한다.

함친왕은 후사가 없던 안종을 압박하여 황태제로 책봉되었고, 7일 뒤에는 선양을 통해 보위에 오른다. 즉위 직후 물밑에서 진행중이던 연합국과의 강화협상을 채결하며 연합국으로 편을 갈아타며 대한제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전후 미국의 압력으로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새로운 국제를 공포하나, 당시 의정이었던 이승만과의 극한 대치 끝에 1948년 국가안보를 빌미로 계엄을 선포, 헌법을 정지하고 민의원을 해산하며 정당정치 그 자체를 철저히 금지하고 신시대운동과 토지개혁,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개발독재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숙조의 노력으로 천통 말기 제국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천통시대를 상징하는 폭압적 전제정의 장기간 지속으로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한다. 게다가 미국과 데탕트를 둘러싼 이견, 장성한 황태제를 단지 폐후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서인하고 동궁에 방치하여 죽음으로 내몰자 숙조에 대한 민심은 나락으로 향한다. 결국 1973년 12월 6일 숙조에 대한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한다. 숙조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저격 휴유증으로 인해 다음날인 12월 7일 황군수도병원에서 향년 76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생애

1900년 함평친왕의 적자로 태어나, 1914년 함평친왕 사후 차대 함친왕에 책봉되었다. 유년기에는 무에 출중하였고, 해군에 관심을 가지어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해군의 일원으로 복무하던 숙조는 황족 출신의 군인이자, 실전에 능하다는 평판을 받았고, 비록 대동아전쟁의 개전에 반대했지만, 국부군 함대를 궤멸시키고 상해 상륙을 성공시키며 일약 전쟁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1943년 숙조는 안종의 신임으로 해군의 수장인 해군통제부장에 올랐으나 줄곳 중국 전선의 확장을 반대하고 북만주에서의 군정 공고화를 주장하던 숙조는 해군의 무의미한 소모를 줄이겠다는 명분으로 육해군의 중국 전선 철수를 주장한다. 1944년 12월 한소전쟁 직후 사종 순황제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충격으로 급사하였고 황태제로써 계승서열 1위인 숙조는 연호를 천통으로 하여 즉위했다. 즉위 이후 막후 교섭을 이어오던 미국과의 강화협상을 끝내고

신헌법 제정 이후 현조는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일촉즉발의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흔들리지 않는 막후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이를 통해 사종 시대 섭정인 명친왕과 5.16 사건으로 훼손된 황권을 회복되어, 입헌군주제 국가임에도 프랑스의 대통령과도 비견될 수 있는 외견적 입헌군주제로 거듭나게 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현조는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60년 대한제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외에도 현조는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1]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현조의 재임기인 1969년 대한제국은 서독을 추월해서 2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미국, 소련 다음 가는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1899년 성조 태황제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1912년 12세의 나이에 형 선종 효황제에 의해 환친왕(桓親王)에 봉해졌다. 형인 선종이 점잖고 선비의 기질이 강했다면, 현조는 아버지 성조를 빼어닮아 문(文)에 능할뿐더러 무인 기질이 강하고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녔다.

유년기 강학원 재학 시절 현조는 부황 성조와 형 선종이 학문에 고루고루 탁월했던것과 달리 대부분의 과목에서 중상위권의 성적을 받았으나 역사와 정치학, 법학, 행정학, 지리학, 군사학에서는 부황 성조를 능가할 정도로 매우 출중한 성적을 받았고, 전통 무술과 기병술에 능했다. 이렇듯 현조 또한 제왕의 자격이 충분했으나, 당시 형이자 황태자인 선종이 건강했고, 현조 또한 형의 황태자로써의 의무와 빡빡한 생활을 지켜보며 자라왔기에 황태자 자리에 미련이 없었고, 혹시라도 생길 오해를 막기 위해 육군무관학교가 아닌 해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촉망받는 해군 장교

1911년 현조는 해군무관학교 예과 41기로 입학하여 해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는 4호생도로써 참전하여 대한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1915년에는 해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써의 삶을 걷게 된다. 현조는 임관 초기 경순양함 낙동함과 한탄함에서 근무하면서 황족과 다른 생활방식을 몸에 익혔다. 1918년에는 해군육전대를 이끌고 연해주 동안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선종으로부터 훈2등 자응장을 수여받고 부위로 특진하기도 했다. 이렇듯 전간기 현조는 해군의 촉망받는 엘리트이자, 유력한 황족으로써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귀족원의 황족의원으로 임명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현조는 해군의 요직을 두루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거친다. 1929년에는 최연소 부령으로 승진했고 1931년에는 최연소 정령으로 1934년에는 참장으로 승진하며 제국 해군의 최연소 진급 기록을 연이어 갱신하였고, 진해 진수부 사령관을 거쳐 해군대학교장과 제2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7년에는 부장으로 승진하여 제2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하였다.

전쟁영웅

1939년 1월, 육군참모총장(陸軍参謀総長)에 황족이자 제2대 명친왕인 은정군이 취임하자 1932년 2월 해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현조를 해군 최고의 군령권자인 통제부총장에 취임시켰고,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1939년 5월 한소전쟁이 발발하자 현조는 대장으로 승진, 해군의 수장인 통제부총장에 임명되어 소련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비밀도시 빌류친스크를 포격하고, 육군과 해군육전대의 혼성 부대로 이들 도시를 점령하여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한소전쟁의 전황은 현조의 맹활약과 달리 대한제국에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도적인 육군력을 바탕으로 요동에서 한국 육군에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결국 개전 이후 승승장구 하는것 처럼 보였던 한국군은 순식간에 패퇴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변으로 도주하였고, 소련의 위협으로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이때 황제인 사종 순황제는 패전으로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자신을 끌어내릴거라 생각하여 주색잡기에 빠져있었고, 당시 총리대신인 김좌진과 육군 수뇌부는 소련의 압도적인 힘에 패닉에 빠졌다. 이에 현조는 원수부회의에서 이들과 멱살잡이를 벌인 끝에 조카인 사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원수부장에 취임, 친척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은정군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 청소년과 노약자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압록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리고리 쿨리크와 주코프가 통제하는 소련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한러전쟁때나 쓰일 구식 대포와 해군의 전함들과 항모, 순양함의 포격까지 총동원한 대한제국군은 간신히 압록강 방어선을 사수한다. 때마침 소련은 폴란드 침공 계획으로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시키고 있어, 한국 전선에서의 추가적인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은 국체의 사수를 위해 종전을 바라고 있었다. 결국 독일의 중재하에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천통유신

2차대전

전후

다시 이어지는 불운한 가정사

말년

평가

여담

가계

어록

요순을 본받고 싶다면 선현을 따르라 했다. 짐은 성종대왕을 본받아 종사를 평안히 하겠다.
황후 박씨를 폐서인하며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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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식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발음명은 네아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