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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의 창당과 분당== | ==남로당의 창당과 분당== | ||
여운형은 중도 좌파 스탠스를 취하였지만 극좌 성향의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공산당과 행동을 같이했다. 이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지지층이 겹친 것에서 기인했다.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심해지자,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박헌영의 남조선공산당은 합당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당이 남조선로동당이었다. 정당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완전한 공산주의 정당보다는 대중적인 정당을 목표로 두고 창당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도좌파부터 극좌까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있었던 탓에 내부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 여운형은 중도 좌파 스탠스를 취하였지만 공산당과 함께 좌익 성향 단체들의 연합인 [[민주주의민족전선]]<ref>우익 진영의 [[국민의회]] 창설에 대한 대응이었다.</ref>에 참여하는 등 극좌 성향의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공산당과 행동을 같이했다. 이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지지층이 겹친 것에서 기인했다.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심해지자,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박헌영의 남조선공산당은 합당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당이 남조선로동당이었다. 정당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완전한 공산주의 정당보다는 대중적인 정당을 목표로 두고 창당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도좌파부터 극좌까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있었던 탓에 내부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 ||
남로당 온건파를 대표하던 여운형과 강경파를 대표하는 박헌영은 서로를 경멸했고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북한의 총선거 거부 사태로 인해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과의 회담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려고 했지만, 박헌영의 안하무인격 태도는 남에게 얼굴 한 번 붉혀본 적 없는 여운형을 대노케 했다. 안그래도 과거 건준에서 박헌영이 보여준 행태들로 인해 박헌영에 대해 심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있었던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박헌영에게 절교를 선언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로 인해 여운형계와 백남운계가 남로당을 탈당하여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 남로당 온건파를 대표하던 여운형과 강경파를 대표하는 박헌영은 서로를 경멸했고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북한의 총선거 거부 사태로 인해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과의 회담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려고 했지만, 박헌영의 안하무인격 태도는 남에게 얼굴 한 번 붉혀본 적 없는 여운형을 대노케 했다. 안그래도 과거 건준에서 박헌영이 보여준 행태들로 인해 박헌영에 대해 심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있었던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박헌영에게 절교를 선언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로 인해 여운형계와 백남운계가 남로당을 탈당하여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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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은퇴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여운형은 당시 사실상 정부의 어용노조였던 한국노동총동맹이 아닌 독립적인 노동조합연맹을 원했고 1961년 근로자총연맹(근총)을 창설하였다. 근로자총연맹은 근로자의 복지 향상, 부조리 교정, 근로자 처우 개선 등을 목표로 하였으며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근로자총연맹의 초대 위원장이 된 여운형은 직접 강연을 다니며 노동자들의 노동의식 함양 등을 위해 힘썼다. | 여운형은 은퇴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여운형은 당시 사실상 정부의 어용노조였던 한국노동총동맹이 아닌 독립적인 노동조합연맹을 원했고 1961년 근로자총연맹(근총)을 창설하였다. 근로자총연맹은 근로자의 복지 향상, 부조리 교정, 근로자 처우 개선 등을 목표로 하였으며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근로자총연맹의 초대 위원장이 된 여운형은 직접 강연을 다니며 노동자들의 노동의식 함양 등을 위해 힘썼다. | ||
여운형은 근로자총연맹이 한국노동총동맹과 함께 한국의 양대 전국노조가 되길 바랐지만 오직 하나의 전국적 노동조합만을 인정하던 당시의 법으로 인해 정식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김대중 (아름다운 나라)|김대중 정부]] 시기 근로자 총연맹은 정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고 | 여운형은 근로자총연맹이 한국노동총동맹과 함께 한국의 양대 전국노조가 되길 바랐지만 오직 하나의 전국적 노동조합만을 인정하던 당시의 법으로 인해 정식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김대중 (아름다운 나라)|김대중 정부]] 시기 근로자 총연맹은 정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고 [[전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개칭하여 한국노동총동맹의 후신인 [[한국노동조합총동맹]]과 함께 한국에서 양대 노조를 이루게 되었다.<ref>전국노총은 여운형을 초대 위원장으로 예우한다.</ref> | ||
1967년 근총 위원장직에서 사퇴한 여운형은 자서전 등을 쓰며 말년을 보냈고 1981년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95세'''. | 1967년 근총 위원장직에서 사퇴한 여운형은 자서전 등을 쓰며 말년을 보냈고 1981년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95세'''. |
2023년 1월 11일 (수) 22:3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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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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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근로인민당 당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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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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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인민당의 초대 당수 여운형 呂運亨 / Lyuh Woon-hyung[1] | ||||
1886년 5월 25일 | ||||
1981년 12월 25일 | ||||
조선 (1886 - 1889) 대한제국 (1889 - 1910) 미군정 조선 (1945 - 1948) 대한민국 (1948 - 1981) | ||||
개신교 | ||||
3 | ||||
1, 2, 3 | ||||
제1~3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초대 근로인민당 당수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
개요
여운형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넘겨받고는 건국을 위해 건국준비위원회, 약칭 건준을 수립했다. 뒤이어 지방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를 각 도마다 설치했는데, 각 인민위원회 위원장에는 지역 명망가를 추대했다.[3] 또한 치안대와 국군준비대를 설치하여 치안 유지와 건군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남북에 주둔할 예정이었던 미군과 소련군은 건준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 상태에서 박헌영을 위시로 한 극좌 세력은 안재홍 등 건준 중도우파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건준에서의 세력을 넓혀갔다. 건준을 좌경화시킨 박헌영은 심지어는 건준위원장인 여운형의 동의도 없이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했다.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은 단 하루도 주권국가의 귄한을 행사하지 못한 채로 해산되어버렸다.
남로당의 창당과 분당
여운형은 중도 좌파 스탠스를 취하였지만 공산당과 함께 좌익 성향 단체들의 연합인 민주주의민족전선[4]에 참여하는 등 극좌 성향의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공산당과 행동을 같이했다. 이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지지층이 겹친 것에서 기인했다.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심해지자,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박헌영의 남조선공산당은 합당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당이 남조선로동당이었다. 정당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완전한 공산주의 정당보다는 대중적인 정당을 목표로 두고 창당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도좌파부터 극좌까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있었던 탓에 내부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남로당 온건파를 대표하던 여운형과 강경파를 대표하는 박헌영은 서로를 경멸했고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북한의 총선거 거부 사태로 인해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과의 회담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려고 했지만, 박헌영의 안하무인격 태도는 남에게 얼굴 한 번 붉혀본 적 없는 여운형을 대노케 했다. 안그래도 과거 건준에서 박헌영이 보여준 행태들로 인해 박헌영에 대해 심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있었던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박헌영에게 절교를 선언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로 인해 여운형계와 백남운계가 남로당을 탈당하여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사회민주주의자
이후 여운형은 박헌영을 공개비판하고 스스로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여운형은 근민당 강령을 제정할 때 근민당을 노동자ㆍ농민만의 정당이 아닌 전국민의 정당이며 당의 목적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 아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조화라고 규정했다. 현대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탄생이었다.
이후 이승만, 김구와 협력해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 협조하고 민주국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때 근민당의 조봉암이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승만이 3선 개헌의 운을 띄우자 여운형은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김구 암살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고 이승만과 민주국민당은 그 기회에 3선 개헌을 통과시켰다. 이에 여운형과 근민당은 야권 통합을 주도하여 이승만에 대응하려고 하였으나 근민당 최고위원 김언봉이 김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면서 여운형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다음 1956년 근민당 당수직을 사임하는 동시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말년의 노동운동
여운형은 은퇴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여운형은 당시 사실상 정부의 어용노조였던 한국노동총동맹이 아닌 독립적인 노동조합연맹을 원했고 1961년 근로자총연맹(근총)을 창설하였다. 근로자총연맹은 근로자의 복지 향상, 부조리 교정, 근로자 처우 개선 등을 목표로 하였으며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근로자총연맹의 초대 위원장이 된 여운형은 직접 강연을 다니며 노동자들의 노동의식 함양 등을 위해 힘썼다.
여운형은 근로자총연맹이 한국노동총동맹과 함께 한국의 양대 전국노조가 되길 바랐지만 오직 하나의 전국적 노동조합만을 인정하던 당시의 법으로 인해 정식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김대중 정부 시기 근로자 총연맹은 정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고 전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개칭하여 한국노동총동맹의 후신인 한국노동조합총동맹과 함께 한국에서 양대 노조를 이루게 되었다.[5]
1967년 근총 위원장직에서 사퇴한 여운형은 자서전 등을 쓰며 말년을 보냈고 1981년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95세.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 박헌영과는 한 때 사상적 동지였지만 상술한 사건들로 인해 관계가 끝장나버렸다. 이후 박헌영이 평양으로, 연길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파리로 가 그곳에서 죽으면서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박헌영이 파리에서 보낸 말년에 급진적 혁명사상을 버리고 온건 민주사회주의자로 전향한 터라 만났으면 화해했을 수도 있다.
- 이승만과는 처음에는 대립하다가 후에는 이승만의 민국당과 여운형의 근민당이 연립하는 등 협력하였지만 이승만의 3선 개헌으로 인해 다시 대립하였다. 둘 다 정계를 은퇴한 1976년에 화해하였으며 이승만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 조봉암과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온건 좌파라는 점에서 행동을 함께 했다. 여운형은 조봉암을 자신의 분신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 종류 | 연도 | 소속정당 | 득표율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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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 1948 | 틀:막대 42.8% 대구 |
당선 |
초선 | |
총통 선거 | 1948 | 틀:막대 27.61% | 낙선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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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 1951 | 틀:막대 48.1% 대구갑 |
당선 |
재선 | |
총통 선거 | 1953 | 틀:막대 26.3% | 낙선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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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 1956 | 틀:막대 45.9% 대구갑 |
당선 |
3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