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한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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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ref>[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10009_002 세종 3년 10월 9일]</ref>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12016_003 세종 3년 12월 16일]</ref>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대한제국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ref>[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10009_002 세종 3년 10월 9일]</ref>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12016_003 세종 3년 12월 16일]</ref>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대한제국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 증축과 중건 ====
==== 증축과 중건 ====
==== 대한제국 시기 ====
'''4. [[연산군 (한나라)|연산군]]'''<br>시간이 지나면서 종묘의 신실은 점차 채워져 연산군 1년에는
===== 전전 =====
 
===== 전후 =====
<center>['''태조|'''태종|세종|문종|세조|덕종|예종]</center><br>
 
과 같이 모든 대실(大室)이 가득찼고, 태조 1세, 태종 1세, 세종 1세, 문종·세조 1세, 덕종<ref>추존된 왕</ref>·예종 1세로 5세(5묘 원칙)가 가득차 다음 대인 성종을 모시는 데 문제가 발생하였다.<ref>5세는 세대 별로 셈한다.</ref> 예조에서는 원래 태종을 옮길 차례(친진親盡)이나 대업을 세운 태종을 옮길 수 없으므로 문종을 협실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옮기거나 묻지 않고 종묘에 계속 모시는 신위)가 탄생하였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ja_10110002_001 연산군 1년 10월 2일]</ref> 시간이 흐르면서, 불천지주는 대업을 이룬 군주에게 해당된다는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직계를 따라 모두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center>['''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center><br>
 
'''5. [[명종(조선) (한나라)|명종]]'''<br>중종이 승하했을 당시, 종묘는 다음과 같이 채워져 있었다.
 
<center>['''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center><br>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지주였으며 세조, 덕종/예종, 성종은 각각 1세대를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을 모실 공간이 없었다. 조선은 5묘제였으므로 불천지주는 옮기지 못하고, 그 이하도 아직 옮길 차례(친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종묘 증축이 이루어졌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ma_10104008_004 명종 1년 4월 8일]</ref> 이로써 종묘는 11칸이 되었으며, 조선 종묘가 지금처럼 크게 길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제도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으며 명백히 종묘 제도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종묘 제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러한 논란은 종묘가 한 번 불타는 선조 대에 가장 크게 일어났다.
 
'''6. [[선조(조선) (한나라)|선조]]'''<br>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한나라)|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 (한나라)|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ref> 지금의 한성 남산 혹은 [[동국대학교 (한나라)|동국대학교]] 한성캠퍼스 부근</ref>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한나라)|경복궁]], [[창덕궁 (한나라)|창덕궁]], [[창경궁 (한나라)|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한양을 수복한 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의 일부로서, 선조의 발제 하에 홍문관, 예조 등을 중심으로 조선 종묘의 기존 제도를 역대 왕조의 종묘 제도와 비교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2014_002 선조 40년 2월 14일]</ref>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 종묘는 수많은 변칙을 수용하면서 운용되었기에 이를 계기로 고제(특히, [[주나라]])를 회복할지, 혹은 지금까지 조선의 전통을 유지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2019_002 선조 40년 2월 19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3017_003 선조 40년 3월 17일] 홍문관의 발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07_003 선조 40년 4월 7일] 예조의 발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14_003 선조 40년 4월 14일] 예조가 정리한 대신들의 의견,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17_002 선조 40년 4월 17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22_004 선조 40년 4월 22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26_003 선조 40년 4월 26일]</ref>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이는 주나라 본래의 제도인 각 항렬<ref>5묘의 경우 시조·2소(2,4대)·2목(1,3대)</ref>을 다른 건물에 모시는 방식(일세일묘一世一廟)<ref>시조가 중앙에, 소(昭)는 좌편에, 목(穆)은 우편에 차례로 배열됨</ref>에서 벗어나 한명제(漢明帝)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희가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주나라 제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예조, 홍문관), 기존 제도가 오래되었고 종묘 외에 영녕전까지 모두 고쳐야 하며 지형을 살폈을 때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이항복, 심희수 등 대신)가 충돌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전(殿)이 없는 것 역시 논란이었다. 명·청 태묘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건물(전殿)과 신주를 모시는 건물(침寢)이 따로 있어서 제사 때마다 신주를 옮겨다 치렀다(전전후침前殿後寢). 조선의 경우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실내에서 바로 제사를 치렀다.
#조선의 종묘는 신주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서상(西上)제와 결합하여 같은 당(堂) 안에서 태조가 가장 뒤에 위치한 형세가 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선조는 결국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ref>"종묘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다. 태묘(太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당초에도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 무사한 가운데 한바탕 번잡한 변설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선조 40년 4월 26일)</ref> 다만 신주를 남향으로 고치는 것, 제사 공간을 넓히는 것 등의 작은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시 11칸짜리 종묘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조선) (한나라)|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 (한나라)|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한나라)|영조]] 2년([[1726년]])에 4칸을, [[헌종(조선) (한나라)|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명정 원년([[1970년]])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 650px; width: 100%; float: left; border: 2px solid #e3ba62; text-align: center"
| style="background:#fff" | <div style="margin: -5.0px -9.0px">[[파일:종묘 정전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정.webp|12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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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683235" | '''1909년 종묘 정전'''
|}
{{-}}
 
'''7. [[고종 태황제 (한나라)|고종 태황제]]'''<br>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 건축 ===
=== 건축 ===
==== 정문 ====
==== 정문 ====

2024년 3월 24일 (일) 22: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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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사적 제2호

태묘
太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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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조선 태조 4년(1395)
주소 대한제국 종묘
한성부 종로구 종로 157
면적 200,545㎡
기능 대한제국 황실의 사당
관리주체 궁내부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Jongmyo Shrine
Sanctuaire de Jongmyo
국가·위치 대한제국 (한나라)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738
등재연도 1995년
등재기준 (iv)[1]
대한황조의 종묘 정전(宗廟 正殿) 전경

개요

종묘(宗廟)한성부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대한제국 역대 황제와 황비 및 추존된 황제와 황비,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이다. 면적은 186,786 ㎡. 황실에서는 태묘(太廟)라고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의 종묘

대한황조의 종묘
출처:문화재청#
EBS에서 제작한〈문화유산 코리아 - 황제도 갈 수 없는 길? 종묘〉 영상

역사

유교 국가에서 도읍에 갖춰져야 할 국가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궁궐, 종묘, 사직이 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사직은 땅과 곡식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종묘와 사직은 제례 공간으로서 엄격하게 정해진 조영 원리(이론)에 입각하여 조성해야 하는데, 이 원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한의 종묘는 중국에서의 제도 변화에 영향을 받거나, 고려 등 전조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 발전시키면서 현재는 중국, 베트남 등과 여러 면에서 다른 제도를 띠게 되었다.

우선, 도시 계획 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궁궐에서 남면하는 임금을 기준으로 왼쪽(동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서쪽)에는 사직을 두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법 등의 원리와 결합하여 중국 베이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격한 대칭성을 이루지 않고 각각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에 기대어 공간을 조성하면서 종묘가 경복궁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종묘의 조영 원리에는 먼저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라는 대원칙이 있다. 각각은 종묘에서 자신으로부터 몇 대까지(같은 항렬은 보통 1대로 친다.) 제사를 지내느냐를 나타낸다. 이에 맞추어 건물의 수나 신실(神室)의 수를 조정하여야 한다. 태조를 제외하고 대수(代數)가 다한 왕은 친진(親盡)이라 하여 신위를 종묘에서 빼내어 매안(埋安), 즉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세실(世室) 또는 불천위(不遷位), 즉 업적이 큰 왕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종묘에 제사지내는 제도나 별묘(別廟)를 조성하여 그곳에 신위를 옮겨 다시 모시는 제도 등 대안적인 제도들이 등장하였다. 조선의 종묘는 둘을 적절히 조합하는 형태를 띠어 결과적으로 매안되는 신위는 (처음부터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폐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7실이었으나 세실이 누적되면서 세 차례 종묘가 증축된 결과로 현재는 19실이라는 유례없는 긴 사당이 완성되었다. 현재 종묘는 대한제국 이후로 7묘 형태이다. 고려 종묘는 제도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주로 9실을 기준으로 여러차례 신위 목록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소목제와 서상제가 있다. 전통적인 소목제(昭穆制)는 시조묘(始祖廟)를 중심으로 1대, 3대 등 홀수째 세대는 목(穆), 2대, 4대 등 짝수째 세대는 소(昭)라 하여 좌우에 번갈아가며 별도의 사당을 배치하는 제도이다. 이는 시조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으나 세실을 위한 공간이 애매해지고 부지를 많이 차지하여 훗날 사당 건물을 하나만 두고 그 안에 신실을 여럿 두는 동당이실(同堂異室) 제도가 들어섰는데, 여기에서는 서쪽에서부터 (태조부터) 순서대로 신위를 모셔서 서상제(西上制)가 된다. 대한 종묘는 고려 종묘 때처럼 서상제이다.

창건과 정립

1. 태조 고황제
새 왕조의 태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 교서 제 1항이 바로 종묘와 사직의 제도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었으며[2], 이는 옛 제도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새 왕조의 종묘사직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태조는 처음부터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천도 계획이 미뤄지자,[3][4] 태조는 개경 내에서(당시 종묘는 성 밖에 있었다.) 새로운 입지를 찾아 지으려 하였다. 이마저도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하자.[5] 결국 기존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다.[6] 그러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천도가 확정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궁궐(경복궁), 사직과 함께 태조 4년 9월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7],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8][9]

제도적으로는 5묘(시조묘 + 당대 군주의 4대조)였으며, 고려 종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동당이실(同堂異室)[10], 서상(西上)[11] 제도를 취했다. 이 때 종묘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12]을 모셨다.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당시 여론 등을 반영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종묘를 한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경에 다시 종묘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대신 매번 대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13][14] 이러한 상황은 태종이 다시 한양에 환도하면서 해소되었다.

2.태종
태종은 조선 종묘의 건축적 특성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하였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화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15] 태종은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하겠지, 어찌 비난하고 웃겠느냐?"하고는 그대로 월랑(越廊)을 짓게 했다. 또한, 공신당이 비루하다 하여 크게 수리하였다.[16]

3.세종
세종은 조선 종묘의 시조묘를 확정하는 등 제도 상 주요 원칙을 마련하였다. 즉위 초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正殿)만 있었으나 세종 2년(1419년)에 정종(당시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17]이 되자, 예조에서 조사한 결과

  1. 목조를 시조묘로 삼고, 익조의 신위를 협실(夾室)에 옮길 것 (송나라 신종[神宗]의 예)
  2. 별묘를 지어 태조 4대조의 신위를 하나씩 이안(移安: 신위를 옮김)할 것 (당나라 덕종[德宗], 송나라 영종[寧宗]의 예)
  3. 별묘를 짓지 않고 매안(埋安: 땅에 신위를 묻음)할 것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원칙)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으며[18], 대신들의 최종 검토 결과 다음과 같이 (송나라 영종의 예를 따른) 의견이 모이자 세종은 이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1. 조선의 시조묘는 태조이다.
  2. 태조의 4대조는 별묘(영녕전永寧殿)에 모신다.

이로써 조선 종묘 제도의 중요한 원칙이 확립되었다.[19]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20]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21]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대한제국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증축과 중건

4. 연산군
시간이 지나면서 종묘의 신실은 점차 채워져 연산군 1년에는

[태조|태종|세종|문종|세조|덕종|예종]


과 같이 모든 대실(大室)이 가득찼고, 태조 1세, 태종 1세, 세종 1세, 문종·세조 1세, 덕종[22]·예종 1세로 5세(5묘 원칙)가 가득차 다음 대인 성종을 모시는 데 문제가 발생하였다.[23] 예조에서는 원래 태종을 옮길 차례(친진親盡)이나 대업을 세운 태종을 옮길 수 없으므로 문종을 협실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옮기거나 묻지 않고 종묘에 계속 모시는 신위)가 탄생하였다.[24] 시간이 흐르면서, 불천지주는 대업을 이룬 군주에게 해당된다는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직계를 따라 모두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


5. 명종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 종묘는 다음과 같이 채워져 있었다.

[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지주였으며 세조, 덕종/예종, 성종은 각각 1세대를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을 모실 공간이 없었다. 조선은 5묘제였으므로 불천지주는 옮기지 못하고, 그 이하도 아직 옮길 차례(친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종묘 증축이 이루어졌다.[25] 이로써 종묘는 11칸이 되었으며, 조선 종묘가 지금처럼 크게 길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제도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으며 명백히 종묘 제도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종묘 제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러한 논란은 종묘가 한 번 불타는 선조 대에 가장 크게 일어났다.

6. 선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 (한나라)|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26]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한양을 수복한 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의 일부로서, 선조의 발제 하에 홍문관, 예조 등을 중심으로 조선 종묘의 기존 제도를 역대 왕조의 종묘 제도와 비교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27]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 종묘는 수많은 변칙을 수용하면서 운용되었기에 이를 계기로 고제(특히, 주나라)를 회복할지, 혹은 지금까지 조선의 전통을 유지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28]

  1.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이는 주나라 본래의 제도인 각 항렬[29]을 다른 건물에 모시는 방식(일세일묘一世一廟)[30]에서 벗어나 한명제(漢明帝)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희가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주나라 제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예조, 홍문관), 기존 제도가 오래되었고 종묘 외에 영녕전까지 모두 고쳐야 하며 지형을 살폈을 때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이항복, 심희수 등 대신)가 충돌하였다.
  2. 제사를 지내는 전(殿)이 없는 것 역시 논란이었다. 명·청 태묘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건물(전殿)과 신주를 모시는 건물(침寢)이 따로 있어서 제사 때마다 신주를 옮겨다 치렀다(전전후침前殿後寢). 조선의 경우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실내에서 바로 제사를 치렀다.
  3. 조선의 종묘는 신주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서상(西上)제와 결합하여 같은 당(堂) 안에서 태조가 가장 뒤에 위치한 형세가 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선조는 결국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31] 다만 신주를 남향으로 고치는 것, 제사 공간을 넓히는 것 등의 작은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시 11칸짜리 종묘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년)에 4칸을, 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명정 원년(1970년)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1909년 종묘 정전

7. 고종 태황제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건축

정문

종묘 어정

향대청 일원

어숙실

정전 주변

악공청

영녕전 주변

신주 배치도

정전

영녕전

중앙
서쪽 협실
동쪽 협실

종묘제례

종묘 묘현례

관람 안내

이야깃거리

기원과 맥

한국사의 시조묘

한국사의 유교적 종묘

신라

발해

고려

여담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의 사당 목록

같이보기


  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2. 태조실록의 즉위 교서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전조(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3. 태조 1년 8월 13일
  4. 태조 1년 9월 3일
  5. 태조 1년 9월 30일
  6. 태조 1년 10월 13일
  7. 이 "대실"(태실 - 영인본에는 "대"인바, 해당 편집자는 이를 "태"로 수정했다.)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신주를 모시는 곳은 "석실"로서 이는 실록에는 5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처음에는 5인용이었다.
  8. 태조 4년 9월
  9. 왕위를 미리 예상했는지 정도전이 24칸으로 정전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성계가 더 늘려 달라고 졸라서 반 칸을 더 늘려 24칸 반으로 제일 처음부터 지었다는 설이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인 1990년대까지는 사실 마냥 매우 유명했다.
  10. 후한 명제(明帝) 이후 보급된 양식, 단일 건물에 신위를 모아 모시되, 각 신위는 분리된 방(신실)에 모시는 것
  11.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음, 원래는 소목제(昭穆制) - 시조 신위를 중앙에, 2대/4대를 소위(昭位), 1대/3대를 목위(穆位)로 좌우로 나누어 배열
  12. 태종 11년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격상 태종 11년 4월 22일
  13. 정종 1년 6월 27
  14. 예시1예시1
  15. "동서 이방(東西耳房)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종묘 제도가 아닙니다. 후일(後日)에 상국(上國)의 사신(使臣)이 보게 되면 어떻다 하겠습니까?"
  16. 태종 10년 5월 13일
  17.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이 당시에는 아직 태종이 생존한 상태였다.
  18. 세종 3년 4월 26일
  19. 세종 3년 7월 28일
  20. 세종 3년 10월 9일
  21. 세종 3년 12월 16일
  22. 추존된 왕
  23. 5세는 세대 별로 셈한다.
  24. 연산군 1년 10월 2일
  25. 명종 1년 4월 8일
  26. 지금의 한성 남산 혹은 동국대학교 한성캠퍼스 부근
  27. 선조 40년 2월 14일
  28. 선조 40년 2월 19일, 선조 40년 3월 17일 홍문관의 발의, 선조 40년 4월 7일 예조의 발의, 선조 40년 4월 14일 예조가 정리한 대신들의 의견, 선조 40년 4월 17일, 선조 40년 4월 22일, 선조 40년 4월 26일
  29. 5묘의 경우 시조·2소(2,4대)·2목(1,3대)
  30. 시조가 중앙에, 소(昭)는 좌편에, 목(穆)은 우편에 차례로 배열됨
  31. "종묘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다. 태묘(太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당초에도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 무사한 가운데 한바탕 번잡한 변설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선조 40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