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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혁명 (개화)|갑신혁명]] 이후 [[김윤식 (개화)|김윤식]], [[김홍집 (개화)|김홍집]], [[신기선 (개화)|신기선]], [[박정양 (개화)|박정양]] 등 갑신혁명을 지지한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1880년대 보수당은 집권당인 [[개화당 (개화)|개화당]]을 견제하는 한편 일부 당원들이 개화당 내각에 참여하는 등<ref>당 원로인 김윤식은 영의정에 상응하는 집정을 역임했고, 김홍집은 외무총판과 내무총판, 신기선은 군무총판 등의 각료직을 역임했다.</ref> 개화당에 견제와 협력을 동시에 하였다. 1893년에 실시된 [[제1회 대한민국 중추원 의원 선거 (개화)|초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100석 중 19석을 얻어 56석을 얻은 개화당에 이은 제2정당이자 유일한 야당이 되었다. [[고종 (개화)|고종]]의 [[아관파천 (개화)|아관파천]] 이후 일부 타협적 척사파가 창당한 [[보국당 (개화)|보국당]]과 손을 잡고 개화당에 맞선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 [[갑신혁명 (개화)|갑신혁명]] 이후 [[김윤식 (개화)|김윤식]], [[김홍집 (개화)|김홍집]], [[신기선 (개화)|신기선]], [[박정양 (개화)|박정양]] 등 갑신혁명을 지지한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1880년대 보수당은 집권당인 [[개화당 (개화)|개화당]]을 견제하는 한편 일부 당원들이 개화당 내각에 참여하는 등<ref>당 원로인 김윤식은 영의정에 상응하는 집정을 역임했고, 김홍집은 외무총판과 내무총판, 신기선은 군무총판 등의 각료직을 역임했다.</ref> 개화당에 견제와 협력을 동시에 하였다. 1893년에 실시된 [[제1회 대한민국 중추원 의원 선거 (개화)|초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100석 중 19석을 얻어 56석을 얻은 개화당에 이은 제2정당이자 유일한 야당이 되었다. [[고종 (개화)|고종]]의 [[아관파천 (개화)|아관파천]] 이후 일부 타협적 척사파가 창당한 [[보국당 (개화)|보국당]]과 손을 잡고 개화당에 맞선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 ||
이완용 내각이 영국에 | 이완용 내각이 영국에 제주도 (개화)|김윤식]]를 조차해주었다가 민심이 개화당에 등을 돌린 제3회 총선 (개화)|김윤식]]에서 보수당과 보국당은 중추원 의석의 과반을 넘겼고, 보국당원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보수당과 행동을 같이한 황현을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 (개화)|김윤식]]를 수립하였다. 1899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해 한국 공사관이 공격받자 보수당은 개화당과 함께 개입을 망설이는 황현을 압박하였고 한국이 의화단 진압 (개화)|김윤식]]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 ||
1901년 황현이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보수당의 | 1901년 황현이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보수당의 김홍집 (개화)|김윤식]]이 제4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김홍집 내각 (개화)|김윤식]]은 의화단 사건의 진압을 마무리한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통합정보기관인 천사희화점 (개화)|김윤식]]을 비밀리에 창설하였다. 이후 보수당이 제4회 총선에서 보국당과 연립하여 과반을 확보하면서 김홍집은 연임에 성공하였다. 1904년 김홍집 내각은 일본과 함께 러시아에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가해 제2차 극동전쟁 (개화)|]]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전쟁에서 승리해 (…) 하지만 전쟁 중 막대한 전비 지출로 경제가 어려워졌고 결정적으로 김홍륙 독다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심 이반이 발생, 제5회 총선 (개화)|]]에서 개화당에 패하여 정권을 넘겨주었다. | ||
10년 넘게 야당으로 있으며 내리막길을 걷던 보수당은 개화당이 | 10년 넘게 야당으로 있으며 내리막길을 걷던 보수당은 개화당이 서재필 (개화)|]]계의 자유당 (개화)|]]과 이승만 (개화)|]]계의 국민회 (개화)|]]로 분열되자 국민회와 손잡고 1918년 다시 한번 연립내각 (개화)|]]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9년 총선에서 국민회가 단독과반을 달성하자 보수당은 내각에서 쫓겨났다. 10년 넘게 의석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보수당은 더이상의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1919년 총선에서 고작 네 명만이 당선되는 참패를 당하자 이듬해인 1920년 합당 결의를 통해 국민회에 흡수되었다. | ||
==성향== | ==성향== |
2024년 6월 20일 (목) 20:32 판
보수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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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명 | 保守黨 |
영문명 | Conservative Party |
창당일 | 1884년 7월 8일 |
전신 | 온건개화파 |
해산일 | 1919년 8월 19일 / 대한국민회에 흡수합당 |
역대 총리 | 김홍집 / 제3대 • 1901~1906 |
당수 | 김윤식 / 초대 조중응 / 말대 |
이념 | 보수주의 동도서기론 공화주의[2] (1895~)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국민의원 | 4석 / 250석 (1.6%)[3] |
당색 | 녹색 (#4A8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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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과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으로 동도서기론과 온건 문명개화론을 기반으로 하였다. 제4대 국무총리 김홍집이 보수당 소속으로 총리직을 역임했다.
역사
갑신혁명 이후 김윤식, 김홍집, 신기선, 박정양 등 갑신혁명을 지지한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1880년대 보수당은 집권당인 개화당을 견제하는 한편 일부 당원들이 개화당 내각에 참여하는 등[4] 개화당에 견제와 협력을 동시에 하였다. 1893년에 실시된 초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100석 중 19석을 얻어 56석을 얻은 개화당에 이은 제2정당이자 유일한 야당이 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일부 타협적 척사파가 창당한 보국당과 손을 잡고 개화당에 맞선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완용 내각이 영국에 제주도 (개화)|김윤식]]를 조차해주었다가 민심이 개화당에 등을 돌린 제3회 총선 (개화)|김윤식]]에서 보수당과 보국당은 중추원 의석의 과반을 넘겼고, 보국당원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보수당과 행동을 같이한 황현을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 (개화)|김윤식]]를 수립하였다. 1899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해 한국 공사관이 공격받자 보수당은 개화당과 함께 개입을 망설이는 황현을 압박하였고 한국이 의화단 진압 (개화)|김윤식]]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901년 황현이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보수당의 김홍집 (개화)|김윤식]]이 제4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김홍집 내각 (개화)|김윤식]]은 의화단 사건의 진압을 마무리한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통합정보기관인 천사희화점 (개화)|김윤식]]을 비밀리에 창설하였다. 이후 보수당이 제4회 총선에서 보국당과 연립하여 과반을 확보하면서 김홍집은 연임에 성공하였다. 1904년 김홍집 내각은 일본과 함께 러시아에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가해 제2차 극동전쟁 (개화)|]]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전쟁에서 승리해 (…) 하지만 전쟁 중 막대한 전비 지출로 경제가 어려워졌고 결정적으로 김홍륙 독다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심 이반이 발생, 제5회 총선 (개화)|]]에서 개화당에 패하여 정권을 넘겨주었다.
10년 넘게 야당으로 있으며 내리막길을 걷던 보수당은 개화당이 서재필 (개화)|]]계의 자유당 (개화)|]]과 이승만 (개화)|]]계의 국민회 (개화)|]]로 분열되자 국민회와 손잡고 1918년 다시 한번 연립내각 (개화)|]]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9년 총선에서 국민회가 단독과반을 달성하자 보수당은 내각에서 쫓겨났다. 10년 넘게 의석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보수당은 더이상의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1919년 총선에서 고작 네 명만이 당선되는 참패를 당하자 이듬해인 1920년 합당 결의를 통해 국민회에 흡수되었다.
성향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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