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내각 李承晩内閣 | Rhee Syng-man Cabin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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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18일 | |||
출범 이전 | 이후 | ||
서재필 내각 | 손정도 내각 | ||
국무총리 | 이승만 / 제8대 | ||
부총리 | 이용익 / 국방총판 겸직 (1918~1920) 박용만 / 내무총판 겸직 (1920~1922) 손정도 / 건공총판 겸직 (1922~1925) | ||
주요 선거 | 8회 총선 (1918) | ||
9회 총선 (1919) | |||
10회 총선 (1923) | |||
여당 | |||
연립여당 | / 1918~1919 |
이승만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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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승만 국무총리 취임식[1] |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
정치
개화당에서 탈당한 후 이승만을 주축으로 한 대한국민회는 191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보수당과 연립해 집권하였고, 총재였던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국군 명장 출신 이용익이 부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과반 의석 확보 실패는 내각에게 있어 정치적 부담이 되었고, 이승만은 이듬해인 1919년 중추원을 해산하고 새 총선를 치렀다. 총선에서 국민회가 과반 의석을 획득하면서 이승만 내각의 정치적 기반은 안정되었다.
이승만 내각은 외교적 성과와 복지 정책을 통해 민심을 사로잡았으나 우두머리인 이승만의 독선적인 태도와 권력과 재정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서서히 지지를 잃었다. 이후 1923년에 치러진 10회 총선에서 여당인 대한국민회가 과반에 한 석 모자른 122석을 얻었다. 비록 결선투표에서 이승만이 총리로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총선에서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던 와중 의외의 부진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내각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0회 총선 이후 이승만 내각은 권력 누수를 겪었고 당내외의 사퇴 압박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1926년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그의 후임 국무총리으로는 당시 현직 부총리 겸 건공성총판이었던 손정도가 선출되며 손정도 내각이 출범했다.
사회
경제
국방
외정
부총리 겸 국방총판 이용익 |
이승만 내각은 대외적으로 적극적 팽창주의와 평화적 국제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였다.
총리인 이승만이 한국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든 장본인인만큼 기본적으로는 다소 팽창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이 직접 파리로 가 평화회담에 참여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이권 확보에 힘썼고, 그 결과 국제사회로부터 기존에 한국이 사실상 지배하던 간도를 한국 영토로 정식 인정받았으며 남만주에 대한 배타적 권리 역시 인정받았다. 또 만주의 친한 성향 군벌과 사상가들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만주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 내전 말기에는 러시아 적군이 백군을 밀어내며 동시베리아로 진출하자 체코 군단 지원을 명분으로 서방 국가들과 함께 간섭군을 편성, 동시베리아를 공격하여 시베리아 전쟁에 개입했다. 이루 다른 간섭국들이 차례로 철수할 동안에도 계속해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반면 지나친 팽창을 경계한 면도 있었다. 2차 극동전 당시 이름을 떨친 명장이자 이승만 내각의 첫 부총리 겸 국방성총판이었던 이용익은 수시로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였으며 팽창을 외치는 군국주의적 장교들을 직무에서 배제시켰다. 또 이승만 내각은 시베리아 전쟁을 마무리짓는 조약인 하바리우스크 조약 당시에도 트란스아무르 지방을 합병하거나 괴뢰국화하지 않고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과 반공 성향의 러시아인들이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을 건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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