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 순황제 이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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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E3BA62; color: #B22222"  | '''대한제국 제4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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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9월 19일 ~ 1971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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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6일 (토) 12: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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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설중매"는 "현대까지 대한제국이 존속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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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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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3대 황제
혜종 순황제 | 慧宗 順皇帝
이름 이훈(李鑫)
출생 1915년 8월 3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붕어 1971년 8월 16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향년 51세)
즉위 1927년 2월 27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20년 9월 19일 ~ 1927년 2월 27일
대한제국 제4대 황제
1927년 2월 27일 ~ 1971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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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선종 효황제, 모후 공정효황후
형제자매 4남 2녀중 장남
황후 경신순황후
후궁 강빈 유씨, 숙빈 박씨, 혜빈 김씨
자녀 소황제 이철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강학원 고등과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해명(海暎)
묘호 헤종(惠宗)
존호 문정익원경순후양환수순후안흥비철
(文貞翼元景純厚襄桓修純厚安興比哲)
용정제막각철청달혜막직렬사밀현선
(容靖齊幕恪哲淸達慧幕直烈思密賢宣)
시호 도정무문돈견양효순황제
(悼正武文敦堅襄孝純皇帝)[1]
연호 연경(年景, 1928~1972)
계급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개요

대한제국의 제3대 황제. 휘는 훈(鑫)이며, 연호는 연경(年景), 묘호는 혜종(慧宗), 시호는 순황제(純皇帝)이다.

선종 효황제의 장자로 선종의 나이가 당시로써는 고령인 33세에 1915년 8월 3일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아버지 선종을 빼닮아 학문에 능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5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부황 선종과 함께 1927년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타고 귀족원으로 향하던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선종이 사망하고 혜종도 큰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혜종은 생존하였고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즉위 이후 황태자 시절 보여주었던 명석한 모습과는 달리 폭탄 테러로 인한 휴유증으로 인해 모르핀 중독에 빠져 국정에 소홀하게 된다. 국정 현안이 대립할 경우 카리스마 있는 중재자로 나선 조부 성조와 부황 선종과는 달리 혜종은 국정을 방치하였고, 절대적인 황제를 정점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던 대한국 국제 체제는 망가지게 된다. 이는 성조와 선종 이래 강력해진 군부에 대한 통제력의 부재로 이어졌고, 결국 5.16 사건을 통해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김좌진이 국정을 장악한다.

대소주전론저였던 김좌진은 무리하게 한소전쟁을 감행하지만 소련에 반격으로 대한제국은 패전한다. 이에 선종은 패전의 죄를 물어 김좌진을 숙청하고 압록강 방어선을 통해 전쟁영웅이 된 숙부 의화군을 수상으로 임묭하여 전후 처리를 일임한다. 의화군은 혜종에 의해 망가진 대한국 국제 체제를 보수하여 간신히 정국을 안정시켰고, 전후 냉전체제에 합류한 대한제국은 부흥에 성공하며, 의화군을 수상으로 밀어준 혜종은 영명한 군주로 칭송받는다.

생애

유년기

선종 효황제의 유일한 적장자로 선종의 나이가 당시로써는 고령인 33세에 1915년 8월 3일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아버지 선종을 빼닮아 학문에 능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5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부황 선종이 1927년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타고 귀족원으로 향하던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여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유년기 명석한 모습을 보여주어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본래 허약하여 잔병치레가 잦았다. 게다가 1927년 선종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중상을 입는다. 이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아 이전의 명석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우유부단함과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예술과 흡연, 모르핀 중독과 주색잡기에만 몰두했다.

무기력한 황제

혜종은 중상을 입은 탓에 즉위식을 4월 말에 거행하였다. 즉위 이후, 모르핀 중독에 빠진 혜종은 국사를 방치했고 국사는 전적으로 추밀원의 원훈들이 결정한 바에 의하여 처리되었고, 자연스레 측신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혜종의 치세 극초반은 측신들이 득세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1차 대전 전후의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태평성세가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고 그 바람이 미국을 건너 대한제국으로 건너오자 경제는 순식간에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종은 선대 황제들처럼 주도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내각에 일임한 체 고서의 수집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내각으로써도 이 전례 없는 경제적 광풍을 해결할 묘책이 딱히 존재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결국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럿 발생한다. 극소수 공산주의자들의 암살이나 폭동이 대표적이었으나 군부의 일부 소장파 장교들도 이러한 시도에 관심이 지대했다. 1931년 몽강사변을 시작으로 1932년의 2.15 사건과 같은 군부의 지휘 체계 무시나, 쿠데타 음모가 여럿 적발되었다. 그러나 이때마다 경시청과 특무대의 빠른 대처로 사건을 무마하였으나 이는 단지 임시 조치에 불과하여 1933년의 5.16 사건을 막지는 못했다.

전쟁과 평화

5.16 사건으로 내각을 해산시키고 혜종의 암묵적인 추인하에 권력을 잡은 김좌진은 대한제국을 하나의 병영으로 탈바꿈 시켰다. 김좌진은 서백리 출병 당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가 철저한 규율과 감투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 소련이 산업화를 진행하기 전에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고 1939년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한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은 결국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한소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김좌진의 환상과 다르게 전황은 흘러간다. 해전에서는 제국 해군이 큰 우위를 점했지만 지상전에서는 제국 육군이 소련군에게 대적하기 어려웠다. 결국 개전 이후 빠르게 소련군을 타격하고 시베리아를 정복한다는 김좌진의 계획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제국군은 소련 육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어 연해주와 몽강을 빼앗기고 한반도 마저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렸다. 그러나 의화군이 패닉에 빠진 김좌진을 대신하여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을 총동원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수호하고,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던 소련의 필요성에 의해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이 수탈하던 물적-인적 자원도 급감해 한국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고, 패전으로 인해 민심이 요동쳤다.

혜종은 한소전쟁의 패전으로 인한 책임을 김좌진에게 돌렸다. 김좌진을 내란죄로 사형시키고 믿음직한 황족이자 측근인 의화군을 총리로 기용하여 소련의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하여 1945년까지 의화군 중심의 총력전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의화군은 어린 시절부터 기존의 대한제국식 입헌군주제로는 전제황권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고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혜종을 설득하여 계엄령을 거두고 의회제를 정비하는 한편 정치적 담론을 개방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형성을 예견한 의화군은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베를린 봉쇄가 해소되던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여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기초를 다졌다. 또한 독자적 핵개발에 착수, "오얏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으로 1959년 대한제국은 4번째 핵보유국이 된다. 이러한 의화군의 개혁으로 대한제국의 민심은 안정되었고, 혜종 또한 의화군에 의해, 어질고 자비로운 군주로 미화되었다.

말년

1965년 혜종은 나이 50세에 경신순황후에게 훗날의 황제가 될 아들을 얻는다. 혜종은 어렵게 얻은 늦둥이 아들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 소황제가 태어난 즉시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1966년 4월 21일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황태자로 정식 책봉했다.

혜종은 열과 성을 다해 황태자의 교육에 힘을 썼고, 황태자도 어릴 때부터 총명함을 들어내어 혜종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청년기부터 골초였던 혜종은 1971년 초에 폐암 4기로 진단 받았고, 6개월 만인 1971년 8월 16일 붕어하고 만다.

묘호는 내각에 의해 혜종(惠宗), 강종(康宗), 신종(神宗)이 상주되었고, 혜종(惠宗)이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혜종 사후 섭정을 맡은 경신순황후는 이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고, 결국 절충안으로 은혜로울 혜(惠)자가 아닌 슬기로울 혜(慧)자를 올려 대행 황제의 묘호는 혜종(慧宗), 시호는 순황제(順皇帝)로 결정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가계

  • 증조부 : 경조 인황제(景祖 仁皇帝, 1824년 ~ 1873년)
  • 증조모 : 철순인황후(哲純仁皇后, 1822년 ~ 1878년)
  • 정비 : 경신순황후(敬神順皇后, 1913년 ~ 1998년)
    • 아들 : 소황제(少皇帝, 1965년 ~ 1974년)
  • 후궁 : 강빈 유씨(康嬪 柳氏)
  • 후궁 : 숙빈 박씨(淑嬪 朴氏)
    • 딸 : 복중 사망 (1941년)
  • 후궁 : 혜빈 김씨(惠嬪 金氏)

어록

국제 신의상 어떨까 싶지만, 뭐 괜찮겠지.
1939. 5. 14. 한소전쟁의 개전을 묵인하며
전쟁은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시작했으면 철저하게 해야 한다.
밀류친스크의 점령 소식을 듣고
제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에 있다. 경들은 기꺼이 신민보다 앞장서서 분격(분노)을 새로이 하며,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 적국의 비망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1939. 8. 압록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숙부, 제발 나를 좀 살려주세요.
김좌진을 사형 시킨후 의화군에게 총리직을 부탁하며
우리 태자를 잘 부탁하네
한경군(훗날의 고조)에게 태자를 당부하며[2]

대중 매체에서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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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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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혜종문정익원경순후양환수순후안흥비철용정제막각철청달혜막직렬사밀현선도정무문돈견양효순황제(惠宗文貞翼元景純厚襄桓修純厚安興比哲容靖齊幕恪哲淸達慧幕直烈思密賢宣悼正武文敦堅襄孝純皇帝)이다.
  2. 그러나 한경군은 혜종의 당부를 무시하고 태자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