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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한성부 (풍아)|황성 한성부]] [[경복궁 (풍아)|경복궁]] 태극전 | | [[황성 한성부 (풍아)|황성 한성부]] [[경복궁 (풍아)|경복궁]] 태극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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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6CB77" | '''대한제국 태자''' |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6CB77" | '''대한제국 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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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대한제국 제3대 황제''' | |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대한제국 제3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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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형제자매 | !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형제자매 | ||
| 4남 2녀 중 | | 4남 2녀 중 삼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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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황후 | !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황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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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계급 | !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계급 | ||
| [[대한제국군 (풍아)|대한제국 육해공군]] 대원수 | | [[대한제국군 (풍아)|대한제국 육해공군]] 대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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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B0129; color: #F6CB77" | 봉호 | |||
| 숙친왕(肅親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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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 생애 == | ||
=== | === 불운한 가정사 === | ||
1901년 8월 1일 [[무종 명황제 이유|태자]]와 태자비 최씨의 | 1901년 8월 1일 [[무종 명황제 이유|태자]]와 태자비 최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 ||
유년기 열종은 | 유년기 열종은 궁궐을 뛰어다니며 활달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열종은 총명하였지만 글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어린이의 모습을 보였다. 1915년 14세의 나이로 황족병적령(帝族兵籍令)에 따라 [[강학원 (풍아)|강학원 중등과]]에서 육군유년무관학교 예과에 편입했고 1919년 졸업 이후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열종은 무관 시절을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시기로 여길 정도로 군인 생활에 만족을 표했다. | ||
이렇듯 무관으로 성장하던 열종은 1922년 ‘건무 22년 독감’이라고 불린 스페인 독감으로 둘째 형인 [[장평친왕 이호|장친왕]]을 잃고, 1923년에는 큰 형인 [[효문태자 이용|효문태자]]를 잃는다. 연이은 형들의 죽음에 충격을 열종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같은 해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무종]]이 황권 강화를 위해 직접 국사를 주도하며 정계를 주도하던 노쇠한 [[원훈 (풍아)|원훈]]들과 맞서며 건강이 크게 악화하여 뇌졸증으로 쓰러지는 일까지 연달아 일어난다. 언듯 보기엔 가족들에게 연달아 닥친 안타까운 비극으로 보여지지만, 원훈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던 무종과 그런 아버지를 솔선수범하여 돕던 두 형들이 원인 불명의 이유로 급사하자, 두 형들이 먹은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는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도성과 궐 내부에는 원훈들의 암살 시도라는 괴소문이 열종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갔고, 열종은 형들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부황이 쓰러진 일 또한 원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열종이 평생에 걸처 열종에게 올린 사소한 충언에도 매우 편집증적으로 잔혹하게 대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 |||
=== 대리청정과 즉위 === | |||
부황이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맡은 열종은 여전히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원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여 원훈들을 증오하였지만, 수백년에 걸친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기엔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다는걸 알고 굉장히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열종은 원훈들이 자신을 암살할 수도 있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늘 호위를 대동하였고, 식사도 스스로 모든 조리 과정을 직접 참관했으며, 그렇게 만든 식사도 기미상궁이 먼저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지 않았다. | |||
이렇게 열종에게는 매우 길었던 3년의 시간이 지난 1926년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무종]]이 붕어하자 열종은 25세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다. | |||
=== 폐후 사건 === | |||
황위에 오른 열종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힘이 되어줄 세력을 찾고 서서히 힘을 결집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황족들이 황족병적령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기피하여 학업에 열중을 보이지 않은 것과 달리, 정통 무관 코스를 걸은 열종은 여전히 문관보다 열등한 대우를 받던 군부와 영웅주의에 경도된 청년세대의 지지를 확보한다. 이렇게 우군을 확보한 열종은 원훈들과 악연으로 이어진 혼인관계를 정리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 시작한다. | |||
1926년 부황 [[무종 명황제 이유|무종]]이 | |||
열종은 | |||
1922년 열종은 황후로 개국공 [[박영효 (풍아)|박영효]]의 형인 개국백 박영교의 손녀 박찬의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당시 열종은 육군유년학교 시절부터 [[순명황후 (풍아)|사모하던 규수]]가 있었으나 황실의 어른인 [[성명황후 (풍아)|자현황태후]]<ref>조선 말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3단계가 되었으나, 칭제건원 이후에는 태후→황태후의 두단계로 다시 원복되었다.</ref>가 직접 주도한 간택이었기에 마지못해 따랐다. | 1922년 열종은 황후로 개국공 [[박영효 (풍아)|박영효]]의 형인 개국백 박영교의 손녀 박찬의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당시 열종은 육군유년학교 시절부터 [[순명황후 (풍아)|사모하던 규수]]가 있었으나 황실의 어른인 [[성명황후 (풍아)|자현황태후]]<ref>조선 말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3단계가 되었으나, 칭제건원 이후에는 태후→황태후의 두단계로 다시 원복되었다.</ref>가 직접 주도한 간택이었기에 마지못해 따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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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전일퇴가 지속되던 논쟁은 개국후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의 상소로 인해 다시금 수세에 몰린다. 당시 학부 고등교육과장이던 이병길은 혈기가 왕성하였고 "일본도 기관설이 주류설인데 바꾸려는 자들은 사심이 있는것. 우리의 충언을 군부는 우리를 역적 취급하는게 억울하다. 신하의 언로를 막은자는 연산과 같은 폭군이다. 근데 우리를 이런식으로 대우하면 서운하다"라는 요지의 매우 불충한 상소를 올렸고 상황은 반전된다. 원훈들은 "이병길이 성상을 향한 충심이 과도하여 실언했다"라는 변명으로 애써 이병길을 감쌌다. | 이렇게 일전일퇴가 지속되던 논쟁은 개국후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의 상소로 인해 다시금 수세에 몰린다. 당시 학부 고등교육과장이던 이병길은 혈기가 왕성하였고 "일본도 기관설이 주류설인데 바꾸려는 자들은 사심이 있는것. 우리의 충언을 군부는 우리를 역적 취급하는게 억울하다. 신하의 언로를 막은자는 연산과 같은 폭군이다. 근데 우리를 이런식으로 대우하면 서운하다"라는 요지의 매우 불충한 상소를 올렸고 상황은 반전된다. 원훈들은 "이병길이 성상을 향한 충심이 과도하여 실언했다"라는 변명으로 애써 이병길을 감쌌다. | ||
이병길의 상소가 올라오자 이때까지 논쟁을 통해 원훈들을 망신주며 서서히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열종은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고함을 내지른다. {{인용문|"《춘추(春秋)》의 의리에 역적을 비호하는 것도 또한 역적이라 하였다. 이병길은 제 조부의 공을 과신해 역심을 품었고 이병길을 옹호하는 자들의 말에도 불충이 들어났다. 이병길의 죄가 명백하니 의금사로 하여금 추국하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리고 민의원을 이용해 원훈들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이때 원훈들은 나름대로 저항을 | 이병길의 상소가 올라오자 이때까지 논쟁을 통해 원훈들을 망신주며 서서히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열종은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고함을 내지른다. {{인용문|"《춘추(春秋)》의 의리에 역적을 비호하는 것도 또한 역적이라 하였다. 이병길은 제 조부의 공을 과신해 역심을 품었고 이병길을 옹호하는 자들의 말에도 불충이 들어났다. 이병길의 죄가 명백하니 의금사로 하여금 추국하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리고 민의원을 이용해 원훈들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이때 원훈들은 나름대로 귀족원의 의원들을 통해 저항을 하였으나 열종은 기어코 군대를 동원하여 귀족원으로 접근하는 의원들에게 발포를 하며 내각을 전면 교체하는 한편 [[중추부 (풍아)|중추부]]의 의원들을 모두 파면하며 부황 무종이 소망한 황권 강화를 완수한다. | ||
이때 열종은 열종 인생에서 나타나는 편집증적 증세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원훈들과 관계된 가문이라면 하나라도 샅샅이 뒤지고 아에 대한에서 양반을 없애려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원훈들의 세력을 박멸하였다. | |||
=== 함평유신 === | === 함평유신 === | ||
=== 2차대전 === | === 2차대전 === | ||
=== 전후 === | === 전후 === | ||
=== 다시 이어지는 불운한 가정사 === | |||
=== 말년 === | === 말년 === | ||
== 평가 == | == 평가 == |
2025년 1월 20일 (월) 19: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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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오일 오늘인가 집집마다 창포주라 뱃노래 두어 가락에 멱라에서 빠져 죽은 굴원이 슬프구나 아마도 일년 중 좋은 계절에 생각나는 굴원인가. 풍아는 "조선 왕조가 현대까지 살아남았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
대한제국 대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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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종 홍황제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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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3대 황제 열종 홍황제 | 烈宗 弘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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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문(李𨯜) |
자 | 소순(素純) |
출생 | 1901년 8월 1일 |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의원 | |
붕어 | 1973년 12월 7일 (향년 72세) |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극전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태자 |
1923년 3월 29일 ~ 1926년 6월 19일 (3년) | |
대한제국 제3대 황제 | |
1926년 6월 19일 ~ 1973년 12월 7일 (4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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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열종 홍황제 이문(烈宗 弘皇帝 李𨯜)은 대한제국의 제3대 대황제이다.
2.생애
2.1.불운한 가정사
1901년 8월 1일 태자와 태자비 최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 열종은 궁궐을 뛰어다니며 활달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열종은 총명하였지만 글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어린이의 모습을 보였다. 1915년 14세의 나이로 황족병적령(帝族兵籍令)에 따라 강학원 중등과에서 육군유년무관학교 예과에 편입했고 1919년 졸업 이후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열종은 무관 시절을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던 시기로 여길 정도로 군인 생활에 만족을 표했다.
이렇듯 무관으로 성장하던 열종은 1922년 ‘건무 22년 독감’이라고 불린 스페인 독감으로 둘째 형인 장친왕을 잃고, 1923년에는 큰 형인 효문태자를 잃는다. 연이은 형들의 죽음에 충격을 열종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같은 해 부황 무종이 황권 강화를 위해 직접 국사를 주도하며 정계를 주도하던 노쇠한 원훈들과 맞서며 건강이 크게 악화하여 뇌졸증으로 쓰러지는 일까지 연달아 일어난다. 언듯 보기엔 가족들에게 연달아 닥친 안타까운 비극으로 보여지지만, 원훈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던 무종과 그런 아버지를 솔선수범하여 돕던 두 형들이 원인 불명의 이유로 급사하자, 두 형들이 먹은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는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도성과 궐 내부에는 원훈들의 암살 시도라는 괴소문이 열종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갔고, 열종은 형들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부황이 쓰러진 일 또한 원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열종이 평생에 걸처 열종에게 올린 사소한 충언에도 매우 편집증적으로 잔혹하게 대응하는 계기가 되었다.
2.2.대리청정과 즉위
부황이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맡은 열종은 여전히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원훈들의 음모라고 생각하여 원훈들을 증오하였지만, 수백년에 걸친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기엔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다는걸 알고 굉장히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열종은 원훈들이 자신을 암살할 수도 있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늘 호위를 대동하였고, 식사도 스스로 모든 조리 과정을 직접 참관했으며, 그렇게 만든 식사도 기미상궁이 먼저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지 않았다.
이렇게 열종에게는 매우 길었던 3년의 시간이 지난 1926년 부황 무종이 붕어하자 열종은 25세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다.
2.3.폐후 사건
황위에 오른 열종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힘이 되어줄 세력을 찾고 서서히 힘을 결집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황족들이 황족병적령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기피하여 학업에 열중을 보이지 않은 것과 달리, 정통 무관 코스를 걸은 열종은 여전히 문관보다 열등한 대우를 받던 군부와 영웅주의에 경도된 청년세대의 지지를 확보한다. 이렇게 우군을 확보한 열종은 원훈들과 악연으로 이어진 혼인관계를 정리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 시작한다.
1922년 열종은 황후로 개국공 박영효의 형인 개국백 박영교의 손녀 박찬의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당시 열종은 육군유년학교 시절부터 사모하던 규수가 있었으나 황실의 어른인 자현황태후[1]가 직접 주도한 간택이었기에 마지못해 따랐다.
이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부패하고 흑막에서 조선을 조종하던 원훈들을 미워하던 열종은 원훈의 손녀였던 폐후를 껄끄러워 했다. 게다가 열종이 친정을 시작하고 폐후의 친가를 견제하고 왕권을 세우고자 하자 일에 격렬히 반대하며 파국을 맞는다. 결국 열종은 황후를 폐서인 하려 했지만, 황후의 작은할아버지인 박영효를 비롯한 대신들이 거의 애걸하며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열종과 폐후 박씨의 사이는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참다 못한 열종은 황후를 폐서인하기로 결심한다. 1929년 말, (함평 9년), 열종은 당시 열종은 황후의 폐위 사유를 "신성불가침의 황제를 비난한 죄, 황제대권을 방해한 죄, 역적을 옹호한 죄"를 들어 황후를 끝내 폐위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신권을 견제하던 열종은 황후를 폐서인하며 왕권을 과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2.4.경오환국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열종은 마지막으로 원훈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통치권 논쟁을 일으킨다. 대한제국 국제는 일본제국 헌법을 모방하여 제정되었기에 일본의 헌법 주류 학설인 천황기관설처럼 황제기관설이 주류 학설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황제기관설을 배척하고 황제주권설을 숭상하여 정부와 갈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종은 군부를 통해 통치권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1931년 장성급 무관들은 일제히 황제기관설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원훈들은 군부의 주장에 소극적으로 반박했으나, 기세를 잡은 군부는 이를 반역이라며 대차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원훈들이 수세에 몰리자 열종의 측근들은 이를 틈타 원훈들에 대한 탄핵을 주청하나, 모 아니면 도가 되는 형국에 처한 원훈들도 적극적으로 반격하며 건곤일척의 논쟁으로 비화된다.
이렇게 일전일퇴가 지속되던 논쟁은 개국후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의 상소로 인해 다시금 수세에 몰린다. 당시 학부 고등교육과장이던 이병길은 혈기가 왕성하였고 "일본도 기관설이 주류설인데 바꾸려는 자들은 사심이 있는것. 우리의 충언을 군부는 우리를 역적 취급하는게 억울하다. 신하의 언로를 막은자는 연산과 같은 폭군이다. 근데 우리를 이런식으로 대우하면 서운하다"라는 요지의 매우 불충한 상소를 올렸고 상황은 반전된다. 원훈들은 "이병길이 성상을 향한 충심이 과도하여 실언했다"라는 변명으로 애써 이병길을 감쌌다.
이병길의 상소가 올라오자 이때까지 논쟁을 통해 원훈들을 망신주며 서서히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열종은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고함을 내지른다.
"《춘추(春秋)》의 의리에 역적을 비호하는 것도 또한 역적이라 하였다. 이병길은 제 조부의 공을 과신해 역심을 품었고 이병길을 옹호하는 자들의 말에도 불충이 들어났다. 이병길의 죄가 명백하니 의금사로 하여금 추국하도록 하라." |
라고 명을 내리고 민의원을 이용해 원훈들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이때 원훈들은 나름대로 귀족원의 의원들을 통해 저항을 하였으나 열종은 기어코 군대를 동원하여 귀족원으로 접근하는 의원들에게 발포를 하며 내각을 전면 교체하는 한편 중추부의 의원들을 모두 파면하며 부황 무종이 소망한 황권 강화를 완수한다.
이때 열종은 열종 인생에서 나타나는 편집증적 증세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원훈들과 관계된 가문이라면 하나라도 샅샅이 뒤지고 아에 대한에서 양반을 없애려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원훈들의 세력을 박멸하였다.
2.5.함평유신
2.6.2차대전
2.7.전후
2.8.다시 이어지는 불운한 가정사
2.9.말년
3.평가
4.여담
5.가계
6.어록
요순을 본받고 싶다면 선현을 따르라 했다. 짐은 성종대왕을 본받아 종사를 평안히 하겠다. 황후 박씨를 폐서인하며 |
7.대중 매체에서
8.관련 문서
9.둘러보기
- ↑ 조선 말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3단계가 되었으나, 칭제건원 이후에는 태후→황태후의 두단계로 다시 원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