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wallbelllle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Nwallbelllle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
43번째 줄: | 43번째 줄: | ||
|} | |} | ||
'''알바니아 임시 정부'''(<small>[[알바니아어]]:</small> Qeveria e Përkohshme e Shqipërisë <small>체베리아 에 퍼르코흐슈메 에 슈치퍼리서</small>) 혹은 체말리 | '''알바니아 임시 정부'''(<small>[[알바니아어]]:</small> Qeveria e Përkohshme e Shqipërisë <small>체베리아 에 퍼르코흐슈메 에 슈치퍼리서</small>) 혹은 '''체말리 정부'''(<small>[[알바니아어]]:</small> Qeveria Qemali <small>체베리아 체말리</small>)는 [[1912년]] [[12월 4일]] [[블로러 의회]]에 의해 구성된 [[알바니아]]의 첫번째 정부이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알바니아의 수상|수상]]과 [[블로러 회의]]의 의장 또한 겸임했다. 임시 정부는 [[블로러]]에 임시 수도를 두었으며, 열강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 ||
14개월 동안 임시 정부는 사실상 알바니아의 미래를 열강의 손에 맡겼고, 이 때문에 임시 정부는 소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임시 정부의 소극적인 행보는 일부 인민과 정치인, 귀족 집단과 괴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초기에 [[블로러]], [[베라트]], [[피어]] 등 4,000km²에 불과한 영토만을 통치할 뿐이며, 오스만 군대 잔당의 행정과도 혼용되었다. [[런던]]에서의 회의로 알바니아의 독립이 결정되었고, [[런던 조약 (1913년)|런던 조약]]과 [[피렌체 조약]]을 통해 알바니아의 국경이 결정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알바니아는 [[알바니아인]]이 다수인 서부 [[코소보]], 서부 [[마케도니아]], 남부 [[이피로스]] 등의 영토를 잃었으나, 열강은 외교적·군사적 위협을 통해 결정된 경계 내부에 있는 타국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외부적 위협은 해결되었으나 내부적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쉬레야 블로라]]와 그 지지자들은 임시 정부와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자 하였고, [[미르디타]] 등 북부 카톨릭 세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임시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북이피로스]]에는 [[피렌체 조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가장 큰 위협은 [[슈코드라 공방전]] 이후 칭왕하였다가 임시 정부에 등용되었던 [[에사드 톱타니]]로, [[1913년]] [[10월 14일]],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1913년]] 말에서 [[1914년]] 사이,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은 [[엘바산]] 지역에서 가시적인 충돌을 보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의 개입을 통해 일단락이 되었다. 또한 그 무렵, [[아흐메트 이제트]]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청년 튀르크당]]과 [[베키르 피크리]]의 음모가 [[국제 헌병대]]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 |||
수 많은 갈등에 직면한 임시 정부는 사실상 해체 수준에 이르렀고, [[1914년]] [[1월 15일]], 사임을 발표함과 동시에 [[1월 22일]], [[국제 통제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위임하며 해산한다. | |||
{| class=" wikitable " style=" border: 2px solid #000; " | {| class=" wikitable " style=" border: 2px solid #000; " |
2023년 10월 6일 (금) 14:28 판
|
알바니아 임시 정부(알바니아어: Qeveria e Përkohshme e Shqipërisë 체베리아 에 퍼르코흐슈메 에 슈치퍼리서) 혹은 체말리 정부(알바니아어: Qeveria Qemali 체베리아 체말리)는 1912년 12월 4일 블로러 의회에 의해 구성된 알바니아의 첫번째 정부이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수상과 블로러 회의의 의장 또한 겸임했다. 임시 정부는 블로러에 임시 수도를 두었으며, 열강은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4개월 동안 임시 정부는 사실상 알바니아의 미래를 열강의 손에 맡겼고, 이 때문에 임시 정부는 소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임시 정부의 소극적인 행보는 일부 인민과 정치인, 귀족 집단과 괴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초기에 블로러, 베라트, 피어 등 4,000km²에 불과한 영토만을 통치할 뿐이며, 오스만 군대 잔당의 행정과도 혼용되었다. 런던에서의 회의로 알바니아의 독립이 결정되었고, 런던 조약과 피렌체 조약을 통해 알바니아의 국경이 결정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알바니아는 알바니아인이 다수인 서부 코소보, 서부 마케도니아, 남부 이피로스 등의 영토를 잃었으나, 열강은 외교적·군사적 위협을 통해 결정된 경계 내부에 있는 타국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외부적 위협은 해결되었으나 내부적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쉬레야 블로라와 그 지지자들은 임시 정부와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자 하였고, 미르디타 등 북부 카톨릭 세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임시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북이피로스에는 피렌체 조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가장 큰 위협은 슈코드라 공방전 이후 칭왕하였다가 임시 정부에 등용되었던 에사드 톱타니로, 1913년 10월 14일,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1913년 말에서 1914년 사이,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은 엘바산 지역에서 가시적인 충돌을 보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의 개입을 통해 일단락이 되었다. 또한 그 무렵, 아흐메트 이제트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청년 튀르크당과 베키르 피크리의 음모가 국제 헌병대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수 많은 갈등에 직면한 임시 정부는 사실상 해체 수준에 이르렀고, 1914년 1월 15일, 사임을 발표함과 동시에 1월 22일, 국제 통제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위임하며 해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