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슈치퍼리
Shqipëri
알바니아 왕국
Mbretëria Shqiptare

1916년 - 현재
국가 깃발의 찬가
표어 Atdheu mbi të gjitha
( 무엇보다도 조국 )
수도 두러스
최대 도시
면적 43,620 km²
(유럽 28위, 세계 130위, 유럽의 0.43%)
국왕/음브레트
1944년 ~ 1945년 스컨데르베우 2세
1945년 ~ 1973년 스컨데르 1세
1973년 ~ 현재 스컨데르베우 3세
수상/크뤼에미니스터르
1912년 ~ 1914년 이스마엘 체말리
1914년 ~ 1916년 투르한 퍼르메티
1916년 ~ 1924년 아치프 엘바사니
부수상/저벤더스크뤼에미니스트리
1912년 ~ 1913년 니콜 카초리
1913년 ~ 1914년
1916년 ~ 1924년
프렌크 비버 도다
알바니아 독립 선언 1912년 11월 28일
런던 조약 1913년 5월 30일
알바니아 공국 건국 1914년 2월 21일
북이피로스 독립 전쟁 1914년 ~ 1916년
알바니아 농민 봉기 1914년 ~ 1917년
왕국 선포 1916년 3월 7일
알바니아 침공 194_년 _월 _일
알바니아 내전 1944년 _월 _일 ~ _월 _일
코소보 위기 1998년 2월
인문 환경
행정구역
정치
경제
경제 체제 혼합 경제
화폐 공식 화폐 컨데르 (K)
코드와 단위
ccTLD .al
국가 코드 008 AL ALB
국제 전화 코드 +355
단위 법정연호 서력 기원
시간대 CET (UTC+1)
DST CEST (UTC+2)
도량형 SI 단위
날짜형식 YMD DMY

알바니아 왕국(알바니아어: Mbretëria Shqiptare 음브레터리아 슈칩타레) 혹은 알바니아(알바니아어: Shqipëri 슈치퍼리)는 발칸 반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북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위치하며, 동쪽으로 북마케도니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 아드리아해오트란토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가 위치한다. 법적공용어는 알바니아어알바니아인이 다수 민족을 차지하며, 동부와 남부에 세르비아인,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 등 소수 민족 및 소수 언어 화자가 존재한다. 수도는 두러스이며, 주요 대도시로는 티라나, 블로러, 슈쿠피, 프리슈티나 등이 있다.

알바니아 왕국은 1914년, 런던 조약의 결과로 건국된 알바니아 공국을 전신으로 한다. 건국 직후 두 차례의 반란과 한 차례의 세계 대전 등을 버티며 왕국을 선포하고 근대 국민 국가로 나아갔으며, 전간기 동안 안정된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지리적 특성상 이탈리아의 영향력에 쉽게 노출되어 여러 차례 국가 존속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주변국 및 영국과의 친선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추축국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망명정부와 파르티잔 단체들이 내외적으로 저항했으며, 추축국의 몰락과 함께 지배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해방과 동시에 저항 과정에서 세력을 이룬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 충돌이 알바니아 내전으로 확대되었으며, 스컨데르베우 2세가 귀국과 동시에 민족주의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알바니아 내전민족주의 세력의 승리로 종전되었다. 내전 이후 알바니아는 발칸 반도의 제1세계로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국경을 접하며 대치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제3세계를 추구하면서 냉전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을 수 있었다. 2000년 대에 들어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알바니아인의 문제로 갈등을 겪고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영토를 확장하나 이로 인해 세르비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다.

알바니아는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일 국가이다. 알바니아의 왕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하여, 하원인 알바니아 국민의회에서 선출된 수상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수상행정부로써 __명의 각료로 구성된 알바니아 각료협의회를 구성한다. 입법부양원제로써 상원인 알바니아 총평의회와 하원인 알바니아 국민의회로 구성된다. 상원인 총평의회의 이름은 1444년 구성된 레저 동맹을 당대 부르던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___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총평의회1916년, 스컨데르베우 2세가 귀족위를 신설하며 만든 것으로, 세습적이고 종신적인 귀족 의원이 권한을 행사한다. 총평의회는 하원인 국가의회에 안건을 상정시킬 수 있으며, 하원으로부터 통과된 안건을 검토 및 심의하고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 할 수 있다. 상원의 권한은 하원에 대해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정도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지속해서 개혁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원인 알바니아 국가의회는 기본적으로 매 4년을 주기로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로 선출된 ___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국가의회는 건국 당시 국제 통제 위원회에 의해 36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이후 여러 차례의 개혁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국가의회는 정부를 구성하고, 법률안을 제정하고 통과시키며,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 또한 매년 예산안을 편성하며, 국제 조약에 대해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 사법부대륙법계 헌법과 민법을 지녀 일반법원, 행정법원, 헌법원으로 나뉘어 각각의 최고 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밥법원은 삼심제로써 장로평의회, 치안법원, 항소법원, 왕립최고법원으로 구성된다. 장로평의회와 치안법원은 1심 법원으로, 장로평의회는 나히야에서의 소정의 소규모 사건을 재판하며 그보다 크거나 항소한 사건의 경우 치안법원이 재판한다. 왕립최고법원은 각각 5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13개의 재판부[1]로 구성된다. 행정법원은 2심제로 산자크행정법원, 국가행정법원으로 구성된다. 국가행정법원국왕에 의해 임명된 1명의 법관과 4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6개의 재판부로 구성된다. 헌법원헌법과 관련된 재판을 담당하며 하위 법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원은 8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1개의 재판부가 존재한다.

국명

알바니아의 국명은 공식적으로 "알바니아 왕국"(알바니아어: Mbretëria Shqiptare 음브레터리아 슈칩타레)이며, 주로 "알바니아"(알바니아어: Shqipëri 슈치퍼리)라 부른다. 비공식적으로 Mbretëria e Shqipërisë라고도 사용한다. "슈치퍼리"는 1555년 발간된 메샤리에서 최초 문증된다. 17세기 무렵부터 그 이전에 사용하던 "아르버리아"(Arbëria) 혹은 "아르버네셔"(Arbëneshë)를 대체한다. 오랫동안 "슈치퍼리"의 어원은 독수리라는 뜻의 shqipe 혹은 shqiponjë에서 기원했다고 여겨졌지만, 알바니아어 동사인 "분명히 말하다"(알바니아어: shqiptar 슈칩타르) 혹은 "말하다"(알바니아어: shqiptoj 슈칩토이)에서 기원했다. "음브레터리아"는 왕을 뜻하는 "음브레트"(Mbret)에 국가, 영토 등에 붙는 접미사 -ëri가 붙은 정형 명사 단수형이다. "음브레트"는 속라틴어에서 지도자를 뜻하는 imperātus에서 기원했다.

역사

기원

스컨데르베우 1세
 

구석기 시대중석기 시대 무렵에 알바니아 지역에 현생 인류가 정착하였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인도유럽어족이 정착하여 청동기 문명을 이루어 남하한 일부 그룹은 미케네 문명을 이루었다. 고대에는 일리리아라 불리는 지역에 속했으며, 아르디에이라는 집단이 가장 번성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7세기부터 슬라브족들이 남하하여 정착하였다. 9세기와 13세기에 불가리아 제1제국세르비아 대공국의 침략을 받았고, 세르비아 대공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아르바논 공국알바니아 왕국 등이 알바니아인의 최초의 국가를 이룬다. 14세기 세르비아 제국의 침공 이후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게 되나 1444년, 스컨데르베우 1세를 중심으로 항전하여 독립을 유지하였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된 이후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여러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쾨프륄루 메흐메드, 쾨프륄자드 파질 아흐메드, 무함마드 알리 등이 그들이다. 1870년 대부터 프리즈렌 동맹이 결성되어 민족 부흥 운동이 진행되었다. 카라르나메라 불린 강령이 발표되었고,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지역의 여러 산자크들을 통합할 것 등을 요구했다. 베를린 회의에서 플라브, 구시네 등의 지역이 몬테네그로에 할당되자 무력수단을 동원해 막아내었으나 열강의 경고에 의해 철수하고 이후 오스만의 군대에 의해 분쇄되었다. 1912년, 다시 봉기를 일으켰고, 1912년 11월 28일, 이스마엘 체말리에 의해 독립을 선언한다.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런던 회의에서 알바니아의 독립이 인정받는다.

공국 성립 이전

 
블로러 회의

1912년, 이스마엘 체말리를 주도로 알바니아 전역에서 대표들이 모여 전알바니아 회의가 개최된다.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승전국들은 알바니아를 분할해 점령하기를 원했고, 회의는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을 위함이었다. 비록 코소보 빌라예트의 대표단이 군대에 의해 가로막혀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회의는 진행되었고, 제1차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의 분할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2월 4일 진행된 제2차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 1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원로회의(알바니아어: Pleqënia 플레처니아)가 선포되었다.

의욕적으로 출범한 알바니아 임시 정부였으나 내우외환의 상태에 빠진다.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그리스 왕국은 현재 알바니아 영토의 경계를 침범해 있었으며, 여러 토착 세력과 군벌들은 알바니아 임시 정부을 인정하지 않았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은 블로러, 베라트, 피에르가 전부였다. 그러나 곧 런던 조약피렌체 의정서의 결과로 알바니아의 경계가 확립되고, 이를 침범한 국가들에 대한 열강의 압박이 이어져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이 철수하면서 외부적인 위협은 어느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임시 정부에 등용되었던 에사드 톱타니가 사임하고 두러스로 가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해 반정부를 선언함과 동시에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하산 프리슈티나엘바산으로 가 새 내각에서 에사드 톱타니에게 전쟁부장관직을 약속하는 대가로 타협하길 원하였으나, 이는 실패하고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해 국제 헌병대가 개입해 충돌을 해산한다. 1914년 1월 9일에는 청년 튀르크당베키르 피카리아흐메트 이제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란이 발생하여 국제 헌병대가 진압하기도 하였다.

결국 알바니아 임시 정부는 사임하고, 에사드 톱타니국제 통제 위원회과의 타협으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해산하여 국제 통제 위원회런던 조약에 따라 알바니아 공국의 수립을 위해 그전까지 위임 통치하게 된다.

1913년 국제 헌병대
 

공국 성립과 반란

1914년 3월 7일, 스컨데르베우 2세두러스에 상륙했고, 이후 즉위식을 올리며 알바니아의 공작에 오른다. 스컨데르베우 2세투르한 퍼르메티수상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에게 내각을 조각할 것을 명했고, 제1기 퍼르메티 정부가 개각한다. 그러나 제1기 퍼르메티 정부에는 내무부장관전쟁부장관으로 에사드 톱타니가 등용되었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블로러에 있던 국제 통제 위원회의 본부가 두러스로 이동하였고, 4월 10일, 헌법이 발효되었다. 헌법에 따라 국가의회를 비롯한 여러 정부 기관들이 수립되었고, 행정 구역이 조직되었다.

 
1913년 3월 7일, 두러스에 도착한 스컨데르베우 2세

제1기 퍼르메티 정부에서 에사드 톱타니는 두 장관직을 겸임하면서 정부에 큰 영향을 끼쳤고, 많은 이들로부터 우려를 자아냈다. 그는 변덕스럽긴 하였으나 이미 알바니아의 왕이 되고자 하였으며, 그를 비롯한 권력에 대한 야망이 여러 차례 알바니아의 균열을 가져왔었다. 4월 10일, 그의 조카인 아흐메트 조골리마티족의 새 수장이 되자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아흐메트 조골리가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며 체포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는 스컨데르베우 2세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에사드 톱타니는 행동으로 옮기기로 한다. 수도 두러스로부터 약 10km 떨어진 시야크에 200여 명의 자신의 무장 병력을 주둔시켰고, 5월 18일, 스컨데르베우 2세에사드 톱타니를 해임하고 체포를 명령, 체포 도중 저항하다 수류탄에 폭사했다. 이후 5월 20일, 제1기 퍼르메티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제2기 퍼르메티 정부가 개각한다. 제2기 퍼르메티 정부에서는 이전 1기 정부에 있던 에사드 톱타니의 주변인들이 축출되었다.

에사드 톱타니의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21일, 카바여에서 폭동이 발생하면서 알바니아 농민 봉기가 시작된다. 에사드 톱타니의 영지인 카바여, 티라나, 크루여 등지에서 도합 5천 여명에 달하는 반란군이 모였다. 에사드 톱타니가 사망했기에 초기 반란군은 마땅한 지도부를 꾸리지 못했으나, 차후 하지 차밀리를 중심으로 아리프 히치메티, 무사 차지미, 무스타파 은드로치 등이 지도부를 꾸렸다. 반란군은 마티족의 중심지인 부렐아치프 엘바사니엘바산 등 주요 지역을 점령했으나, 북부 미르디타족이사 볼레타니의 지원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루마니아 왕국 등 외국의 군사 지원에 기반한 정부군의 군사력 향상 등으로 인해 수세에 몰렸고, 1914년 8월 중순에 이루어진 공세로 기세를 잃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알바니아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남은 게릴라 잔당이 완전히 토벌되었다.

알바니아 독립 선언과 비슷한 시기, 그리스 왕국은 현 알바니아의 국경을 넘어 북이피로스 지역을 점거했다. 이는 런던 조약피렌체 의정서를 바탕으로 국제 통제 위원회가 철수할 것을 요구한 최후통첩의 기간이 다 되어가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왕국은 철수하면서 그리스인에게 무기를 넘기며, 2월 28일,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에사드 톱타니를 비롯한 제1기 퍼르메티 정부의 인사들은 국제 통제 위원회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지원을 요청했고, 수 천 정의 소총과 대포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바니아 농민 봉기가 발생하며 당장의 진압은 어려워졌고, 1915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진압에 나설 수 있었다. 그동안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은 점령지의 알바니아인들을 학살하는 등 공분을 샀고, 이는 점령지의 알바니아인으로 하여금 저항 조직을 구축하고 보복적인 그리스인 학살을 저지르게 했다. 그리스 왕국이 이를 비난하며 개입하고자 하였으나, 국제 통제 위원회가 막아섰고,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16년, 퍼르메트 전투에서 북이피로스 자치 공화국은 대패해 지로카스터르를 내주며 멸망하게 된다.

대전과 중립

1915년 11월, 동맹국세르비아 왕국코소보까지 몰아세운다. 미트로비처가 함략되자 세르비아 왕국은 임시 수도인 프리즈렌을 포기하고, 항복, 최후의 저항, 후퇴 세 가지의 경우를 고려했다. 이 중 후퇴의 안은 당시 알바니아가 알바니아 농민 봉기북이피로스 독립 전쟁의 영향으로 세르비아군에게 대항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한 경우에만 시도 가능성이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셋으로 나눠졌고, 11월 24일, 일부 인사들이 독단적으로 동맹국에게 항복하면서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나머지 정부 요인들은 최후의 저항과 알바니아를 통한 후퇴로 나뉘어졌고, 전자는 12월 초 분쇄되었다.

 
산을 통해 후퇴하는 세르비아군

11월 25일, 저항을 선택한 세르비아군을 제외한 20만 여 명의 세르비아군이 프리즈렌에서 루머-푸커-슈코더르를 따라 두러스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나 협상국의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고, 더군나 알바니아 북부의 부족들은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이 행한 학살에 대한 복수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패잔병에 불과했지만 그 숫자가 알바니아 전체 군대―국제 헌병대와 지역의 민병대―의 몇 십 배에 달했고 협상국과의 마찰을 바라고 있지 않던 알바니아 공국협상국의 선박이 알바니아의 항구에 조차하도록 허가하고 그들에게 공식적인 공격 선언은 하지 않는 등 최대한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북부 부족들의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았고, 동맹국으로 하여금 국경을 개방했다.

세르비아군은 퇴각 이전 거의 모든 무기를 항전을 선택한 이들에게 넘겼기에 북부 부족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11월의 추운 날씨로 피해는 더욱 늘어났다. 그들은 불과 이틀에서 열흘만에 경로를 주파해 두러스에 도착하였으나, 습격의 결과로 절반의 병력이 죽거나 실종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16년 1월 3일, 협상국의 함선이 두러스에 조차해 살아남은 9만 여 명을 이탈리아브린디시로 수송하면서 세르비아의 퇴각은 끝이 난다.

왕국 선포와 회복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열강들의 알바니아에 대한 영향력은 하락했다. 세르비아 왕국의 정부가 알바니아의 영토를 통해 성공적으로 망명한 이후 협상국코소보알바니아인 다수 지역을 대가로 협상국의 편에 서기를 원했으나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의 극렬한 저항과 런던 조약의 철저한 이행을 통한 알바니아 주권 인정을 대가로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알바니아 공국의 제안에 협상은 흐지부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동맹국 또한 코소보를 대가로 알바니아 공국에 접근하였으나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에 물러갔다. 알바니아는 독립 선언 이후 처음으로 안정을 누렸다.

두 번의 반란이 알바니아 공국을 휩쓸었으나 공국은 버텨내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두 반란으로 인해 의회 선거는 여러 차례 연기되었고, 북이피로스 독립 전쟁이 마무리되어 가던 1916년 2월 26일에 이르러 초회 국가의회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헌법에 따라 4명의 각 종교 대표와 1명의 알바니아 은행 총재가 고정적으로 임명되었고, 스컨데르베우 2세가 10명의 의원을 또한 임명했다. 투표를 통한 선출은 7개의 산자크에서 각각 3명 씩, 총 2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1916년 3월 7일, 제1대 알바니아 국가의회의 개회와 함께 스컨데르베우 2세런던 조약 당시 몬테네그로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알바니아의 군주가 공작이 된 것을 왕으로 고치며 대외적으로 알바니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가의회새 헌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알바니아 왕국의 선포와 함께 스컨데르베우 2세오스만 제국의 귀족제를 수용한다. 지역 유지나 알바니아 농민 봉기 등 정부에 협력한 이들에 대해 파샤(알바니아어: Pasha), 베이(알바니아어: Bej), 아가이(알바니아어: Agai)으로 차등해 귀족위를 내렸다. 또한 상원인 알바니아 총평의회(알바니아어: Këshilli i Përgjithshëm 커실리 이 퍼르지스섬)를 신설해 그들로 구성된 귀족원을 꾸렸다. 총평의회는 귀족과 귀족에 의해 추천된 이들로 구성되어, 전자의 경우 종신의 임기를 지니고, 후자의 경우 7년의 임기를 지닌다. 추천의원의 경우 의석과 함께 본인에 한해 귀족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아치프 엘바사니

1916년 3월 7일, 스컨데르베우 2세아치프 엘바사니알바니아의 수상으로 임명한다. 엘바사니 정부를 구성한 아치프 엘바사니프렌크 비버 도다이사 볼레타니, 아흐메트 조골리 등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친정부 인사들을 등용하며, 지역 유지들의 민병대를 해산하고자 한다. 셋의 개인 사병만 해도 1만 여 명에 이르렀고, 3월 10일,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의 민병대의 해산과 함께 알바니아 왕립군을 창설한다. 알바니아 부족들에게 있어서 민병대의 해산은 가장 치욕적인 것으로서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귀족 임명과 총평의회 개회식에 참여하기 위해 두러스에 방문한 상태였고, 곧바로 에피다믄 중대국제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무력화되었다. 주요 유지들의 체포로 반발은 예상보다 약해졌으나 그럼에도 전국적인 소요가 발생했다. 하지만 그러한 소요들도 몇 개월만에 진압되었고, 알바니아 전역의 민병대들은 해산된다.

알바니아 독립 선언 이후 알바니아의 경제는 중앙은행 없이 금본위제로서 프랑화를 기준으로 한 다양한 화폐가 유통되며 혼란스러웠다. 이스마엘 체말리알바니아 임시 정부 시기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두 차례의 반란을 거치며 다시금 중앙은행의 설립이 시도된다. 그러나 1916년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모든 참전국이 전쟁에 막대한 지출을 이루고 있었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스위스이었다. 1916년 5월, 외무부장관 메흐메드 코니차는 대표단을 이끌고 알바니아 국립은행의 설립을 위해 스위스로 향했다. 1916년 6월 11일, 바젤 상업 은행을 비롯한 여러 은행과 투자자의 투자금을 통해 알바니아 국립은행(알바니아어: Banka Kombëtare e Shqipërisë 반카 콤버타레 에 슈치퍼리저)을 설립하고, 공식 화폐로 컨데르(알바니아어: Kënder)를 발행한다.

1916년 개헌

1916년 헌법은 이전에 국제 통제 위원회헌법과 달리 오로지 알바니아인에 의한 것으로, 국제 통제 위원회에 비해 알바니아 내부 상황에 밝은 이들이 작성하였다. 1914년 헌법의 1장이 알바니아를 공국으로 하고 국제 통제 위원회의 권한을 인정했던 것과 달리, 국채를 왕국으로 하며 국제 통제 위원회에 대한 내용은 몇몇 부분을 수정해 주체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하여 2장으로 옮겼다.

스컨데르베우 2세는 1장과 2장에 걸쳐 광범위하게 개입해 왕권을 높이고자 했다. 아치프 엘바사니는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스컨데르베우 2세의 계획을 도왔다. 내무부장관 아흐메트 조골리 또한 2장과 3장에 걸쳐 왕권을 돕는 조항을 작성했다.[2] 이에 메흐디 프라셔리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의원들이 반발하였고, 이들은 알바니아 최초의 정당인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알바니아어: Partia e Lirisë së Popullit Shqiptar 파르티아 에 리리서 서 포풀리트 슈칩타르)를 조직하였다.

3장의 주요 논건은 기존 부족들의 전통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카눈이라하는 각 부족 마다의 관습법을 지니고 있었고, 이 카눈은 서로 다른 부족끼리 암살 등 복수에 대해 허가하고 있었다. 아치프 엘바사니아흐메트 조골리, 프렌크 비버 도다 등 민병대를 해산하고 그에 따른 반란을 진압한 이들은 수 많은 이들이 카눈에 바탕한 복수를 희망하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군주인 스컨데르베우 2세 또한 예외가 아니였다. 그러나 이는 민병대 해산 보다 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엘레즈 이슈피하산 프리슈티나를 중심으로 북부동맹(알바니아어: Ligë e Veriut 리거 에 베리우트)를 구성했다. 북부동맹 뿐 아니라 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카눈의 폐지는 실패했으나 '피의 복수'(알바니아어: Gjakmarrja 자크마리아)는 차후 민법을 작성하며 불법화시켰다.

4장은 입법부에 대한 것으로, 기존 36석이던 의석을 증가시키기로 하였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일명 선출의원과 국왕에 의해 지명되는 일명 지명의원, 법적으로 종교 단체의 대표자나 정부 각료를 지정하는 일명 지정의원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우선 선출의원의 경우 기존에는 각 산자쿠 당 3명의 의원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여 총 2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수를 늘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각 산자크 마다 동일한 수의 의원을 선출하자는 이들과 인구에 비례하여 의원의 수를 정하자는 이들로 나뉘어졌다. 북부에 비해 남부가 인구가 많았으며, 이 때문에 북부 부족들에 기반한 북부동맹은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지정에 반대했고, 셰프체트 버를라치와 같은 남부 지주들은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지정을 찬성한다. 아치프 엘바사니북부동맹의 손을 들어주며 선출의원은 각 산자쿠에서 6명을 선출하여 총 42개의 의석이 배분되었다. 지명의원에 경우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이 증설을 반대하고 오히려 축소를 주장했으나 기존 10명에서 25명으로 2배 이상 증가하였다. 지정의원의 경우 이슬람교, 로마 카톨릭, 동방정교회, 벡타시 종단, 네 종교 단체에서 한 명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알바니아 국립은행 총제가 1석을 차지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차등적인 의석 수를 주장했으나 대부분의 의원이 이를 통한 종교 갈등을 우려하며 획일적인 증가를 결정했고 각 1석에서 각 2석으로 증가했다. 최종적으로 국가의회 의석은 36석에서 76석으로 증가하였다.

5장은 정부기관에 대한 것으로 기존에 세세하게 서술된 정부기관의 조직에 대해서는 별개의 법으로 대신 서술하기로 하였다. 6장은 행정 구역과 각 행정구역의 행정책임자, 지방의회에 대한 것으로 지방 의회 의석의 수를 조정했다. 7장은 재무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이를 4장으로 이동시켰으며, 대신 국토개발에 대해 다루었다. 8장은 군대에 대한 것으로 국제 헌병대에피다믄 중대를 기원으로 한 알바니아 왕실근위대,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을 명시했다. 9장과 10장, 11장, 12장은 각각 법무와 종교, 교육, 토지에 관한 것으로 별다른 변경 사항 없이 유지되었다. 기존 14장은 산업에 관한 것으로 이전에 비해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독립된 법으로 작성하였다. 13장은 체신과 통신에 대한 것으로 내용을 유지하였다. 14장은 행정법원에 대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유지시켰다. 외에도 총칙을 추가하여 헌법의 공표, 개정[3], 항 삭제, 그리고 특수한 경우[4] 일부 헌법[5]이 정지될 수 있음을 명기했다.

종전 이전

대중적인 요구는 토지 개혁에 있었다. 지주의 약화를 원한 아치프 엘바사니 또한 토지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치프 엘바사니의 정적 중 한 명이자 엘바산의 대지주인 셰프체트 버를라치를 중심으로 국가의회의 지주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아치프 엘바사니의 토지 개혁에 제동을 건다. 1916년 10월, 토지 개혁 반대론자들은 통합당(알바니아어: Partia e Bashkuar 파르티아 에 바슈쿠아르)을 설립한다. 그러자 아치프 엘바사니 또한 개혁주의자들을 모아 대중당(알바니아어: Partia Popullore 파르티아 포풀로레)을 설립한다.

1917년, 동맹국코소보를 포함한 알바니아인 다수 지역을 대가로 접근한 것을 엘바사니 정부가 거부하자 북부동맹하산 프리슈티나코소보 인사들은 이를 규탄하며 코소보 합병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바이람 페부지우를 중심으로 북부동맹 당 내 반대파는 코소보 합병을 대가로 하는 참전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고, 이에 하산 프리슈티나 등 주요 코소보 인사들은 반발하며 탈당했다. 이후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알바니아어: Komiteti "Mbrojtja Kombëtare e Kosovës" 코미테티 "음브로이티아 콤버타레 에 코소버스")를 창설하며 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코소보 지역으로 넘어가 카차크 운동을 조직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협력했다.

1918년 말,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의 점령지
 

1918년 가을에 들어서 협상국발칸 반도 남쪽의 전선에서 마케도니아를 향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동맹국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도 이를 피해갈 수 없어 보였다. 그러나 협상국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와 적대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코소보 지역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는 그들을 회유하여 전세에 유리하게 하고자 했다.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자코바, 프리슈티나, 미트로비차 등의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슈쿠피, 테토바 등 북부 마케도니아알바니아인 다수 지역에 대해서는 불가리아 왕국과의 마찰 끝에 영향력을 거세당했기에 동맹국에 대한 불만은 있었다. 다만 협상국의 약속은 그들의 동맹인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라 하여 이들을 신용하기 꺼려한 여론도 존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카드리 프리슈티나협상국과 협력을 약속하고 불가리아 왕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뒤를 공격, 발칸 반도의 전세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9월 30일, 불가리아 왕국은 항복했고,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마케도니아 북부에 대한 지배를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 휩싸였다.

10월 4일, 프레셰보에서 세르비아군과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 간의 교전이 발생한다. 세르비아 왕국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협상국 사이의 밀약에 대해 알지도 못했거니와 그들에게 있어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동맹국의 동맹으로서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를 불법 점거한 집단일 뿐이었다. 프레셰보에서의 교전을 시작으로 오흐리드, 테토바, 슈쿠피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 남부 경계 전역에서 세르비아군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카드리 프리슈티나는 영토를 약속한 영국에 제지를 요청하나 무시당한다. 영국이 약속을 이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는 총력적인 저항을 개시한다. 세르비아 왕국은 총 2개 군단을 투입한데 비해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는 1개 군단 규모의 민병대가 유일했다. 수 차례의 전투 모두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의 패배로 귀결되자 중요 거점을 포기하고 게릴라전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전투는 수 년 간 지속되었다.

종전

 
1920년~1922년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알바니아인 왕국의 포크라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루어진 파리 강화 회의에 알바니아와 코소보 국가 통제 위원회 모두 사절단을 보냈다. 양측 모두 코소보를 비롯한 알바니아계 빌라예트의 알바니아 통합을 요구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수립 등 세르비아 왕국그리스 왕국의 주권을 우선시한 열강에 의해 반단되었다.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는 전쟁 도중 영국의 밀약을 바탕으로 약속한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반려되었고, 미국우드로 윌슨의 주장에 의한 코소보 포크라진의 수립과 자치권 인정으로 타협되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이는 이른 시일 코소보-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발발케 한다. 알바니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이익 증대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수립된 국제 연맹1920년 12월 17일, 알바니아의 주권과 가입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 정체되어 있던 근대화는 종전 이후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엘바사니 정부 수립과 동시에 교육부장관 루이지 구라쿠치는 초등 교육의 의무화를 추진하며, 두러스에 고등교육기관을 수립하고자 했으나 광범위한 전시 상황과 고립된 외교 상황, 부족한 자금 상황에 따라 보류되어 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국제 연맹 가입을 통해 다시금 시도되었고, 1919년 9월 11일, 두러스에 알바니아 최초의 대학인 스컨데르베우 왕립 대학교(알바니아어: Universiteti Mbretëror i Skënderbeu 우니베르시테티 음브레러로르 이 스컨데르베우)가 창립되었다. 외에도 초등 교육 과정 이수자가 나타남에 따라 각 산자쿠를 중심으로 중등 교육 시설을 증설하고 산업화에 대비한 직업 교육 시설을 두러스블로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산업화는 2년에 걸쳐 정비된 행정과 토지 개혁, 초등 교육 정책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룩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국제 연맹 가입 등을 통해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 열강으로 하여금 투자를 받았다. 이러한 해외 자본 유치를 통해 국토의 동서와 남북을 잇는 거대한 두 철도 계획을 중심으로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산업화 초기 주요 산업은 섬유산업석유 산업이었다. 북부 산악지대의 목축업으로부터 원자재를 공급하기 쉬운 두러스, 티라나, 슈코드라 등 북서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석유 산업의 경우 루마니아 다음으로 발칸 반도 석유 매장량이 많아 미국독일석유 산업이 발전한 국가의 전문가를 초청해 1920년 2월 1일, 석유 기업이자 국영 기업인 알바니아 석유회사(알바니아어: Kompania Shqiptare e Naftës 콤파니아 슈칩타레 에 나프터스)를 설립했다. 1920년, 쿠초버 일대에 최초의 유전이 세워졌으며, 다음해, 파토스에도 유전이 건설되었다. 유전의 개발은 각각 베라트피에르의 산업화를 불러 일으켰다.

1920년 2월 28일, 제2대 국가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1916년 개헌으로 인해 각 산자쿠 당 3석의 의석이 배정되던 것이 5석으로 증가됐으며, 음브레트에 의해 지명되는 지명의원이 10석에서 25석으로 느는 등 총 36석에서 76석으로 추가되었다. 2대 국가의회3월 9일 개회했다. 스컨데르베우 2세의 지지 세력이 지명의원으로 대거 선출되고 대중당에 가입하면서 대중당은 76석 중 37석을 얻어 제1당이 된다.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이 11석, 통합당이 7석, 북부동맹이 4석을 차지하였다. 비록 지명의원을 제외하고도 대중당은 21석을 얻어 제1당에 다름이 없으나 지명의원이 2배 이상 증가하면서 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의석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야당은 크게 반발하였다.

아흐메트 조골리
 

과반수 가량의 의석을 차지한 대중당에게는 파벌 정치가 몰아쳤다. 이전 국가의회 의원 중 무소속 의원의 입당과 지명의원 출신의 대중당 의석은 대부분이 스컨데르베우 2세의 의중에 의한 것이었다. 37석 중 절반에 달하는 의원이 근왕파였고, 이들는 루이지 구라쿠치를 중심으로 한 중도좌파 성향의 개혁파와의 갈등을 빚었다. 알바니아 농민 봉기 당시 공을 세운 아흐메트 조골리내무부장관으로서 권위주의적인 정책들을 피력하며 얻은 스컨데르베우 2세의 신임을 바탕으로 프렌크 비버 도다를 재치고 근왕파의 수장으로 올라섰다. 엘바사니 정부대중당은 중도파인 아치프 엘바사니, 개혁파인 루이지 구라쿠치, 근왕파인 아흐메트 조골리를 중심으로 나뉘어졌다. 중도파는 그 수가 적었으나, 아치프 엘바사니는 무소속 장관들을 규합해 세력의 균형을 맞췄다.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알바니아인 왕국[6] 내에 수립된 코소보 포크라진를 바탕으로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는 정당으로서 활동을 겸했다. 총선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제미예트와 함께 코소보 포크라진의 의석을 나눠가졌으며, 코소보 포크라진 수립 과정에서 세르비아 포크라진으로 넘어간 전코소보 빌라예트 지역에서도 크게 선전한다. 그러나 알바니아인을 비롯한 무슬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인민급진당과 연정을 행하는 등 온건적인 모습을 보이는 제미예트와 갈등하게 된다. 1921년, 선출된 제헌의회를 통해 SCSA 왕국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과정에서 코소보 국가 방위 위원회포크라진을 폐지하고 단일 국가로서 오블라스트스를 수립하는 건과 그로 인한 결과물에 크게 반발했고, 크로아트인슬로벤인 등의 정당과 같이 보이콧했다. 그러나 결국 6월 28일, 비도브단 헌법이 통과되고 코소보 포크라진은 폐지된다.

개혁 및 개발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 당수 겸 제7대 농업부장관 메흐디 프라셔리

알바니아 농민 반란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인 토지 개혁의 부재는 1920년까지 개선되지 못했다. 통합당은 36석 중 3석의 의석밖에 지니지 못했으나, 여당인 대중당이 7석, 나머지 두 야당 또한 동일한 3석을 차지했을 정도로 통합당의 반대를 돌파할 만큼 조직적이지도, 의견이 통일되지도 않았었다. 통합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의원들은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은 절대 지주에게 이익이 될만한 내용은 아니였으나, 각 의원 간 의견 차이는 새로운 토지법의 제정을 늦췄고, 결국 초대 국가의회가 끝날 때까지 종결되지 못했다. 그러나 제2대 알바니아 국가의회에서 대중당은 37석이라는 과반에 달하는 의석을 차지했고, 급진적인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 또한 11석을 얻으며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농업부장관직을 대가로 일부 급진적인 내용을 수정했고, 마침내 토지 개혁안이 통과가 된다. 국가의회를 통과한 법안은 총평의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총평의회 의원은 대부분 스컨데르베우 2세엘바사니 정부의 의중에 따라 지명된 이들이었기에 법안 통과에 문제는 없었다. 마침내 1920년 12월 1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된다.

알바니아의 주요 석탄 지대는 시야크 일대와 티라나엘바산 사이의 산지, 코르처 일대에 위치해있었고, 해당 지역에서 채굴된 석탄을 바탕으로 열차를 운용할 계획이었다. 초기 열차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의 증기 기관차를 수입하여 활용했다. 철도 계획은 두러스에서 코르처까지 중부와 남동부를 잇는 두러스-코르처선 계획과 슈코더르에서 블로러까지 남북을 잇는 슈코더르-블로러선이라는 두 계획을 중심으로 하였다. 양 계획에서 주요 투자국은 미국이탈리아로, 특히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 양 계획 모두 표면상으론 알바니아 국립철도회사(알바니아어: Kompania Kombëtare e Hekurudhave Shqiptare 콤파니아 콤버타레 에 헤쿠루다베 슈칩타레)가 건설을 맡았으나, 당시 회사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의 철도 회사의 자회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미국, 영국, 이탈리아의 기술자들을 대거 고용해오기도 했다. 건설의 필요한 자재는 목재를 제외하고 전부 수입으로 이루어졌으며, 건설의 필요한 기계 장비 또한 독일 등 수입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1년 4월, 알바니아 국립철도회사 설립 이후, 양 계획 모두 건설을 시작했으며, 1923년 8월 11일, 두러스-코르처선두러스-티라나 일부 구간이 개통했다.

알바니아의 군대는 독립과 동시에 창설된 국제 헌병대가 그 기원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국제 헌병대를 구성하던 네덜란드 장교들은 대다수 귀국하고, 그 자리를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교들이 채웠다. 그리고 국제 통제 위원회가 해산되고 왕국이 선포되면서 국제 헌병대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외국 장교들로 하여 훈련받은 이들은 장교가 되어 신생 알바니아군의 수뇌를 구성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교들은 남아 군사교관단으로서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의 창설을 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패배하여 군사교관단 또한 철수하게 되었으나, 몇몇 이들은 남아 교련 체제를 구축했다. 1916년 헌법에서 알바니아의 군대는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 뿐만 아니라 순전한 친위 부대인 알바니아 왕실근위대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왕실근위대의 시초가 되어야할 에피다믄 중대는 그 특수성으로 인해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의 시초가 되었으며[7], 때문에 알바니아 왕실근위대의 설립은 수 년 뒤에나 이루어졌다.

군비는 역사적으로 많은 지출을 불러 일으켰다.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차관 및 투자를 유치 받기 힘든 제1차 세계 대전의 기간 동안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은 창립되었을지언정 가시적인 변화는 보이지 못했다. 이는 엘바사니 정부에 의해 각 지방의 민병대가 명목상으로 해체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전쟁부의 지휘 체계 아래에 남는 등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1920년에 들어 외국으로부터 투자가 이루어지고 산업화 또한 촉발되자 군대 증강 또한 다시금 논의되기 시작한다.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은 앞서 말한 에피다믄 중대를 바탕으로 1921년 5월 11일, 시야크를 본부로 하여 1개 연대를 창설했으며[8], 8월 10일에는 쿠커스[9], 1922년 2월 21일에는 지로카스터르코르처[10] 연대급 부대가 신설되었다. 모두 신설 당시 정원은 충족되지 않았고[11] 제1연대 스컨데르베우를 제외하고는 오스만 제국 당시 사용한 소총이나 화승총, 심한 경우 냉병기으로 무장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지원은 제1연대 스컨데르베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기, 소총을 비롯한 화기 대부분을 해외의 회사로부터 수입해 충당했다. 인접한 이탈리아의 경우 화기의 생산 및 개발 뿐만 아니라 군사교관단 파견을 제안해왔으나 이탈리아군의 교리 및 전술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으로부터 구성된 교리 및 전술이 알바니아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거절한다―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은 인구가 부족한 알바니아의 특성상 독일 제국의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속전속결의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다만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의 군사무기 수출이 불가능함의 이유로 이탈리아카르카노 M1891 소총, 미국루이스 경기관총맥심 기관총, M1911 등을 수입 및 알바니아 왕립 조병창(알바니아어: Arsenali Mbretëror Shqiptar 아르세날리 음브레터로르 슈칩타르)을 건설해 라이센스 생산하였다.

탄압과 정변

석탄은 산업혁명의 주요 자원 중 하나로서 산업화를 지탱했다. 시야크베라트 일대의 석탄 산지는 빠르게 개발되어 산업화를 이끌었다. 석탄 산지의 개발로 인해 필요해진 노동력은 마침 도시로 상경하고자 한 이들로 하여금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그렇게 늘어난 노동자의 소비는 해당 지역의 도시화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시야크의 경우 수도이자 항구 도시인 두러스와 인접하고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의 본부 및 제1연대 스컨데르베우의 주둔지가 위치하는 등,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 밀집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상하수 시설 개발과 광산에서 발생한 화학 물질이 시야크를 흐르는 강에 그대로 배출됨에 따라 1923년 봄에 이르러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또한 갱도 내 산업재해 배상금의 지불이 미뤄지자 결국 불만이 폭발한다. 광산 노동자를 시작으로 발생한 시위는 점차 시야크 전역을 덮었고, 제1연대 스컨데르베우가 시위 진압에 투입된다. 그러나 일부 연대원이 명령에 불복종하며 시위대에 참가, 이를 저지하던 연대원과 시위대의 실랑이 과정 끝에 무력 시위로 발달하였고, 끝내 연대장 벡타시 차크라니 대령은 무력 진압을 명령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시위는 종료되게 된다. 시위 과정에서 콘스탄틴 보슈나크 등의 좌익 인사들이 결집해 시위를 지원하고 차후 사회당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티라나슈코더르를 잇는 도로

1924년 4월 6일, 현 티라나 산자쿠 마무라스에서 미국인 관광객 두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티라나슈코더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하던 중 오전 10시 괴한들에 의해 총에 피살돼 사망한다. 당국은 대대적인 수사에 돌입하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체 우연한 살인 사건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엘바사니 정부가 초기부터 사건을 정치적 목적의 암살로 판단짓고, 수사 과정에서의 허점 등에 의해 정부가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여론이 형성된다. 이는 4월 9일, 아흐메트 조골리 내무부장관의 강한 의견 아래 전국에 비상 사태를 선포해 야당을 탄압하면서 신빙성을 얻었다. 더불어 주알바니아 미 대사관과 엘바사니 정부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미국은 야당을 지지했다.

마무라스 사건 이전에도 아흐메트 조골리는 지속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피력해왔다. 1924년 2월 23일 치뤄진 1924년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대중당은 이전 선거에 비해 2석을 잃었고, 그와 동시에 알바니아 인민 자유당을 비롯한 야당이 급격히 부상했다.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활동한 야당들은 서로 타협하며 일련의 연합을 이루었다. 점점 정권이 위협이 되던 와중 마무라스에서의 살인 사건은 야당을 탄압하기에 좋은 명분이었다. 4월 9일, 비상 사태를 선포한 것에 이어 4월 10일에는 원래 각 카자야의 카이메카이가 통솔하는 경찰과 과거 해산된 국제헌병대를 통합해 내무부장관 산하의 국가헌병대(알바니아어: Xhandarmëria Kombëtare Shqiptare 잔다르머리아 콤버타레 슈칩타레)를 신설했다. 통합된 체계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치안 유지를 위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들은 군사조직에 가까운 무장이 별도의 승인 없이 허가되었으며, 비밀정보기관 또한 존재했기에 탄압이 본 목적이었다.

강력한 정치적 탄압은 매우 낙천적인 생각에 기반했다. 실제로 국가헌병대 창설 이후 정치적 반대파들은 별다른 반발을 보이지 못하는 듯 보였다. 4월 15일 밤, 국가헌병대 창설식에 아흐메트 조골리를 비롯한 친정부 인사들이 모여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식장 바깥에서의 굉음과 함께 식장의 국가헌병대 일부가 총구를 들어 그들을 겨누었으며, 얼마 후 알리 셰프체트 슈쿠피 참모총장을 비롯한 장성과 그의 병사들이 이들에게 합류했다. 몇몇 이들이 저항해보았으나 효과는 없었고, 아흐메트 조골리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메흐디 프라셔리, 판델리 에반젤리, 아브니 루스테미, 세오판 스틸리안 놀리 등 자유 인사들에 의한 정변으로 비상 사태의 해제와 기타 권위주의 정책 폐지, 아흐메트 조골리 해임 등을 요구하였다. 군이 정변에 합류하고 아흐메트 조골리가 체포되었단 소식에 아치프 엘바사니는 사임을 요청했고, 스컨데르베우 2세는 이를 수리함과 동시에 정변 세력의 요구를 전부 수용한다. 아흐메트 조골리와 그의 세력은 스컨데르베우 2세에 의해 해방되어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 4월 16일, 스컨데르베우 2세는 공식적으로 메흐디 프라셔리수상으로 임명하며 프라셔리 정부가 수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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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 산자쿠 Sanxhaku i Tiranës 티라나
블로러 산자쿠 Sanxhaku i Vlorës 블로러

알바니아의 행정 구역은 산자쿠(알바니아어: Sanxhaku), 카자야(알바니나어: Kazaja), 나히아(알바니아어: Nahia)로 구성된다.

수도인 두러스를 포함한 18개의 산자쿠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산자쿠는 투표로 각각 5년과 3년마다 뮈테사리피(알바니아어: Mytesafiri)와 산자쿠 평의회(알바니아어: Këshilli i sanxhakut 커실리 이 산자쿠트) 의원을 선출한다.

산자쿠는 카자야로 구성되며, 카자야의 지도자인 카이메카이(알바니나어: Kajmekami)는 뮈테사리피에 의해 선출된다. 카자야의 입법 기관인 카자야 평의회(알바니아어: Këshilli kazasë 커실리 카자서)는 법률를 바탕으로 뮈테사리피에 의해 선출된 _명의 의원과 투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된다.

경제

국방

사회

문화

교육

외교

각주

  1. 민사사건을 담당하는 9개의 재판부,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4개의 재판부
  2. 3장은 인민의 권리에 대한 것으로 언론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 등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해 추가 조항을 작성하였다.
  3. 의석의 2/3 이상의 찬성
  4. 2장에 추가
  5. 주로 3장
  6. 이하 SCSA 왕국
  7. 차후 알바니아 왕립 국가군으로부터 독립해 알바니아 왕실근위대를 구성한다.
  8. 제1연대 스컨데르베우, 물론 정원은 미달된 상태였고, 수 년 뒤에나 정원을 충족했다.
  9. 제2연대 겐티
  10. 제3연대
  11. 1922년 당시 총합 2천 여 명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