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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정치 제도부터 민중의 생활 양식까지<br>메이지 유신은 일본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br>덕분에 일본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br>태양의 제국은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br><br>그러나 일본은 민주주의 대신 전체주의의 길을<br>문민통제 대신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br>결국 일본은 스스로의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br>그 힘에 의해 자멸을 맞이하였습니다.<br><br>그러나 만약에 말입니다.<br><br>일본 제국이 민주주의를 수용했다면<br>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br><br>'''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보여준<br>일본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은<br>군홧발에 짓밟힌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br><br>그렇게 스스로 전체주의의 길을 선택한 일본은<br>스스로의 폭주하는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br>결국 그 힘에 의해 자멸을 맞이하였습니다.<br><br>그러나 만약에 말입니다.<br><br>일본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성공했다면<br>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br><br>'''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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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일본 정부의 권력은 오쿠마 시게노부 대장경과 이토 히로부미 내무경으로 양분하게 되었는데, 양 측 모두 화합을 거부하며 서로를 끌어내릴려고 시도하였다.<br><br>그러던 중, 1881년, 오쿠마는 민권파을 받아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조기 국회개설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민권파를 탄압하던 이토가 반대하였고, 결국 두 권력자는 또 다시 대립하게 된다. <br><br>본래라면 '개척사 관유물 불하사건'으로 인해 오쿠마가 실각하겠지만, 오쿠마의 적절한 대응과 사쓰마벌의 도움으로 증거불충분으로 무마하게 된다. 반면에 이토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조슈벌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공격 받았고, 끝내 이토는 실각하게 된다.<br><br>이토의 실각으로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오쿠마는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민권파와 제2차 오사카 회의를 개최, 일본 정부와 자유 민권 운동이 하나의 길을 가기로 결의하게 된다. 그리고 1882년, 오쿠마는 자신의 뜻대로 헌법을 반포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의회를 설치하면서 일본 제국은 민주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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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쇼와 2년) 3월 14일, 재무대신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모종의 이유로 중의원 예산위원회 참여가 늦어지며 '쇼와금융공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본래라면 무너져야 할 와카쓰기 레이지로 내각이 유지되고, 국내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국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온건한 외교 정책이 지속되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의 제1차 북벌이 일본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순조롭게 성공하게 된다.<br><br>그러나 정부의 온건한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군부, 특히 관동군은 국민당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1928년(쇼와 3년) 6월 4일, 관동군은 정부의 허가 없이 국민당을 피해 만주로 가던 장쭤린을 암살하며, 만주를 손에 얻고자 시도한다. (황고둔 사건) 그러나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오히려 국민당에 가담하면서 관동군은 만주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이에 정부는 '황고둔사건 해결문서'를 발표, 사건의 모든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며 군부의 힘을 크게 축소하는데 성공한다.<br><br>이후, 1930년대에 일련의 군부의 불미스러운 시도들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며 군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군부혁신법'을 통과하며 군부의 정치 개입 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냉전 시기 동안 핵개발과 경제발전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일본은 1989년(헤이세이 원년) 10월 29일,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전환,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국가=
=국가=

2023년 12월 11일 (월) 21:33 판

[ 문서 보기 ]
[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國民が選擧し
국민이 선거하고


國民を代表し
국민을 대표하고


國民的勢力を中心とし
국민적 세력을 중심으로

민본은 "만약 일본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성공하였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민본
民本
장르 대체역사, 동아시아사, 일본사
연재자 제리코
시작일 2023년 9월 28일
(시작일로부터 +282일, 0주년)
상징 색 빨간색 (#b0313f)
저작권 CC-0

개요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國民が選擧し, 國民を代表し, 國民的勢力を中心とし
국민이 선거하고, 국민을 대표하고, 국민적 세력을 중심으로

사이토 다카오, 1940년 2월 2일 제국의회에서 행한 연설 중

제리코의 장편 대체역사 세계관. 민주주의 국가가 된 일본 제국과 그로 인해 달라진 동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본 세계관 제목인 민본(民本)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에서 'Democracy'를 '민본주의'로 해석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상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보여준
일본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은
군홧발에 짓밟힌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전체주의의 길을 선택한 일본은
스스로의 폭주하는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 힘에 의해 자멸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말입니다.

일본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성공했다면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1927년(쇼와 2년) 3월 14일, 재무대신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모종의 이유로 중의원 예산위원회 참여가 늦어지며 '쇼와금융공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본래라면 무너져야 할 와카쓰기 레이지로 내각이 유지되고, 국내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국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온건한 외교 정책이 지속되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의 제1차 북벌이 일본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순조롭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온건한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군부, 특히 관동군은 국민당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1928년(쇼와 3년) 6월 4일, 관동군은 정부의 허가 없이 국민당을 피해 만주로 가던 장쭤린을 암살하며, 만주를 손에 얻고자 시도한다. (황고둔 사건) 그러나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오히려 국민당에 가담하면서 관동군은 만주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이에 정부는 '황고둔사건 해결문서'를 발표, 사건의 모든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며 군부의 힘을 크게 축소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930년대에 일련의 군부의 불미스러운 시도들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며 군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군부혁신법'을 통과하며 군부의 정치 개입 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냉전 시기 동안 핵개발과 경제발전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일본은 1989년(헤이세이 원년) 10월 29일,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전환,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국가

대일본국

임의 시대는 천 대에 팔천 대에

조선인민공화국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1932년 사쿠라다몬 의거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던 중국은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다. 결국 임시정부는 금방 힘을 잃으며 유명무실해졌고,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조선건국동맹에게 넘어오게 된다.

조선건국동맹은 1950년에 조선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등 무력 투쟁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였고, 일본은 이에 조선의 독립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이는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을 통해 끝내 독립을 인정받으며 조선은 50년만에 독립을 이루게 된다.

중화민국

삼민주의는 우리가 따를 길

대만국

온갖 고생을 이겨내며 산림을 일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대만도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의 강압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의 열기는 점점 커졌고, 결국 1972년에 중국과의 화해 분위기를 만들던 일본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만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대만 독립 이후, 리덩후이는 경제 성장과 안보 위기를 내세우며 독재 정치를 하였다. 이에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매년 시위를 일으켰고, 1989년에 중국에서 천안문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2000년에 민주화를 이룩하게 된다.

월남국

늘 푸른 역사는 대단히 빛나는 전공이라

연표

영향을 받은 매체

여담

  • 한동안은 일본만을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