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그는 누구인가.
1. 본회퍼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누군가는 고백교회의 선구자로 알것이고 누군가는 히틀러 암살미수의 주요인물중 하나로 알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기독교를 넘어서 이 인물은 꽤나 명성이 있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간에 말이다.
본회퍼는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인물로,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는 그 배경은 꽤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8남매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일곱번째 여동생과는 쌍둥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칼 본회퍼로 고등법원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정신과 의사가 된 사람이다.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쪽에 특이사항으로는 그녀의 할아버지인 칼 아우구스트 폰 하제는 예나 대학교(조금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가 나온 그 대학이 맞다.)에서 60여년간 재직한 저명한 신학자였다.
본회퍼의 외할머니 카를라 폰 하제는 리스트(그 저명한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가 맞다!)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하며 다양한 예술적 소질이 있었고, 특히나 피아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러한 예술적 소양은 그녀의 딸이자 본회퍼의 어머니에게 이어져서, 그 자식들에게도 영향력을 투사하였다. 이후 베를린에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배경은 전체적으로 부유함에 가까웠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가 14세일때 그의 둘째 형 발터 본회퍼가 제1차 세계대전중 전사하면서 그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되었고, 유품으로 피가 묻은 그의 성경이(개신교가 성유물 문화가 있었다면, 분명히 성유물로 추앙받았을것이다.) 본회퍼에게 주어졌다. 이를 계기로 모계쪽의 깊은 신앙심과 연계되어 그는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만, 이 당시 환경에서도 신학은 철학의 아류, 특히 인정받지 못하는 학문이었고 목사와 같은 성직계통은 이제 전문직으로도 여겨지지 못했다. 그가 목사가 되겠다 하였을때 집안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는 그가 음악가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기대를 져버리고 고교에서 히브리어를 수강하며 신학의 길로 가게 되었다. 당시 그의 형인 클라우스 본회퍼는 저명한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였고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는데, 형에게 한 말은 지금에도 전해진다. "내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느님은 계신다."(Eric Metaxas, <디트리히 본회퍼>) 라고 말하며 그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이후 신학에 있어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삶과 신학을 지켜본 베트게는 초기 본회퍼 시기를 신학자로 평가했다. 당시 그는 교만함이 느껴질 정도로 학문적인 신학자였던것 같다. 그의 지도교수인 제베르크의 심리학적 신학에서 차별화되고자 노력했다는 의견은 여러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동의받고 있다. 그는 중기엔 로마와 미국을 여행하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 이때 그는 미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저명한 신학자로는 폴 틸리히가 있다. 계몽주의적인 특징이 강하며 기존의 과학적이지 못한 것을 현실에 맞춰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등이 있다. 이후 20세기를 지나며 그 선호도는 점점 떨어졌으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선호하지 않는다.)" 을 경험하고 당시 흑인신학자들과 관계를 맺었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선 전례와 전통에 대해서 배웠다.
본회퍼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기, 이미 독일에선 탄압이 가시화되고 있었고 많은 신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본회퍼도 망명을 권유받았으나 결국 독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가 올때에, 독일에선 교단을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한 '제국교회(Reichskirche, 일반적으로 제국교회라고 하지만 당시 뉘앙스는 국가교회에 가깝다.)'의 영도자 신학이라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은 아돌프 히틀러이다." 라는 신앙고백에 저항하여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세웠고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벗어나, 성경을 위반하는 모든 가르침을 단죄한다는 선언을 통해 교회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고백교회는 사회정치적인 영향력을 투사하는것에는 분명한 한계는 있었다.
이후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관련자로(실제로 가담하였다.) 결국 투옥되게 된다.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라는 말은 지금도 회자되곤 하는듯 하다. 결국 능동적으로 행동한 그는 패전을 한달앞둔 4월 9일, 바이에른 주의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 나를 따르라(제자도의 대가)
게시글 따로 쓸것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