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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민의원 원내대표 게오르기 이바노비찌 마야꼽스끼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Georgy Ivanovich of Mayako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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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9년 7월 18일 (84세) |
만주국 신징특별시 | |
국적 | 만주국 -> 만주 민주 공화국 |
현재 | 자유당 민의원 원내대표 제13대 민의원 의원 시장경제 연구원 상임고문 만주자유총련맹 상임고문 |
배우자 | 김혜석 (金慧石)[1] |
학력 | 묵던 국립 대학교 (경제학 / 학사) 모스끄바 국립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모스끄바 국립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 |
종교 | 로씨야 정교회 |
의원 대수 | 4선 |
의원 선수 | (민) 1, 2, 4, 13 |
소속 정당 | |
약력 | 만주 민주 공화국 재정성 관료 만주 공화당 경제위원회 부위원장 시장당 창당준비위원장 시장경제 연구원 연구원장 자유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 |
개요
sүыфан циһаыан огжоsыамbи аSSаме арbүSамbи йафаһаыаbүмbи! 자유를 경솔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
만주의 관료 출신 정치인. 관료시절에는 만주의 자유방임주의적 개혁개방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만주의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특히 만주의 모든 정권들을 만주공산당의 연장선이라 비난한것으로 유명하다.
대외적으로는 본인을 신자유주의자나 자유방임주의자라 선전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라 보는게 타당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상세
1939년 7월, 러시아계 부모님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하기 위해 소련령 사할린에서 일본제국령 사할린으로 탈출하였고, 이후 만주지역에 정착하였다. 부모님이 러시아계 망명자인 만큼 어렸을때부터 상당히 가난하게 살았으나, 그래도 어떻게 북만주지역 개간사업에 참여함과 동시에 어느정도 성공하여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에 진출해 만주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며 그의 아버지는 토지개혁으로 상당한 손해를 보게된다. 이에 어린 게오르기는 "자기가 일한 만큼 가지는것이 뭐가 잘못이지"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사상적 기초가 자리잡혔던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버지처럼 땅파고 고생하지 않겠다는 신념하나로 어릴때부터 엄청난 량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다. 그가 회고 하길 "학교에서 교과서를 받으면 집에서 몇일동안 훑어본 뒤에 1달이면 그 책하나를 다 풀고, 계속 다시 풀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 성과덕분에 그는 묵던국립대학교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이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모스크바 국립대학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게오르기가 대학을 다닐때인 60년대는 냉전의 최전선임과 동시에 소련과 그 위성국에서의 자유방임주의적 개혁개방은 등장하기 한첨 전인 상황이였다. 이와중에 게오르기는 대학교에서 유일하게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생각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2] 당국이 원하는바와는 정반대로 행동하였고, 이로인해서인지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직후 만주로 귀국해야 했다고 한다.
귀국한 직후 그는 모스크바에서 잠시 만주로 왔을때 혼인신고만 하고 거의 10년간 방치했던 아내 김혜석과 공식으로 결혼함과 동시에 재정성에 관료가 된다. 이때도 그는 상부의 얘기를 무시하고 지속해서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재정성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일을 너무 잘해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상부마저 포기하게 된다. 이후 만주에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에 영향을 받아 점진적 개혁이 추진되자 담당자로 고려되었으나,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후 마주가 마침내 민주화되자 재정성에서 나와 만주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초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만주 공화당 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계속해서 자유방임주의를 설파했고 이로 인해 당시 의원들 사이에서 게오르기의 별명이 "자유로운 앵무새"였다고 한다. 이후 2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으나 공화당이 자유방임주의 정책 추진에 상당히 주춤거리자 "나의 생각과 달랐다"라며 공화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시장당을 창당해 3대 민의원 선거를 준비했으나, 자금부족으로 포기하고 공화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시장경제 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공화당 소속으로 다시한번 4대 민의원을 지냈다. 이후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인재 양성에 나서겠다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가끔 공화당이나 국민당 인사들에 대한 선거 지원을 하는것 외에는 크게 매스컴에 노출되지는 않았으나, 돌연 2021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공화당 소속으로 묵던수도시에서 출마하겠다 밝혔다. 이후 당연히 컷오프 될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기적적으로 공천되어 당선, 의회에 복귀하였다.
허나 또다시 "공화당이 시장경제를 무시한다"라는 이유로 뇨후루 사할리얀 의원과 함께 탈당하였다. 이후 림건명에게 공동 당의장을 양보한 뒤 자유당 원내대표에 취임하였다. 이후 림건명이 묵던시장 선거에서 25%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얻자 숨은 1등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3]
평가
여담
자유당 당의장인 뇨후루 사할리얀을 아들처럼 여길정도로 가까이 한다고 한다. 뇨호루 사할리얀이 기본적으로 만주계이긴 하나, 어머니와 외가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러시아계처럼 보이는것도 있을것이고, 약 20여년간 시장경제 연구원에서 동거동락한 사이라는 이유도 있을것이다. 가끔씩 게오르기가 뇨후루 의장을 양자로 삼았다는 가짜뉴스가 퍼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