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화국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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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金大中 | Kim Dae-ju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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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화국 초대 주석 | |
부주석 | 김일성 (1989~1994) |
정부 | 국민의정부 |
의회 대수 | 初 |
임기 | 1989년 5월 1일 ~ 1994년 4월 30일 |
전임: 없음 (직위 개설) 후임: 김영삼 (제2대) | |
인물 정보 | |
조선어 이름 | 김대중 (金大中) |
일본어 이름 | 도요타 다이추 ( |
출생 | 1924년 1월 6일 |
조선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 |
사망 |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 |
조선 경성부 서대문구 | |
학력 | 목포상업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경제학부 / 학사)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아퀴나스) |
소속 정당 | (신민당계) |
서명 | |
링크 |
개요
조선의 정치가, 기업인, 인권운동가. 삼민투쟁회의의 초대 의장, 조선의 초대 주석으로 조선의 민주화 및 자주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국부로, 199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대 조선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인종 우월주의 정권을 붕괴시키고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점에서 넬슨 만델라와 비교된다.
일본어 이름은 도요타 다이추(豊田大中).
생애
1924년, 전라도 무안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우등생이었으며 1943년부터 1947년까지 도쿄대학교 상경학부에서 상업을 전공하였다. 도쿄대학을 졸업한 후 1950년대까지 일본에서 사업가로 활동했으며, 당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꼽혔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부터 해운 회사, 건설 회사 등 여러 회사를 경영하였고, 1950년대 시점으로는 조선 땅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산가였다. 당시 공문서를 분석한 결과, 김대중은 전라도 땅에서 4번째로 세금 납부액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1950년대 말까지 일본에 머물렀는데, 일본어에 매우 유창했고 일본 문화에 물들어 겉만 보고서는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한다. 즉, 현대 기준으로는 일선계에 속했던 셈.
1948년, 일본 현지에서 조선민주당에 입당했다. 조선민주당은 유신정우회 계열 정당으로, 조선인 지주와 일본인 사업가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창당된 정당이었다. 조선 내에서 우파, 자산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김대중이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당연했다.
1961년, 일본에서의 체류를 정리하고 조선 내지로 귀국한다. 목포에서 해운 회사를 창업한 그는 또다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고, 조선민주당의 전라도 도당에서 꽤 높은 지위의 책임자까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인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있었고, 몇차례 조선 자치령 자치의회 입후보를 희망했지만 민주당 당 측에서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7년 조선민주당이 재창당된 신민당의 공천을 받아 목포에서 3,000여표의 접전 끝에 당선되었는데, 그는 조선 남부에서 조선인 출신으로 당선된 첫번째 정치가로 지역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신민당의 대변인과 원내 부총무의 지위를 역임하였다.
1971년, 여유로운 표차로 자치의원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당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카기 마사오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한다. 그가 속해있던 신민당 역시 정치활동 금지의 조치에 따라 해산되었다. 다카기 장군이 2년 후 암살되고, 이와무라 다케아키 장군의 주도로 급진적인 일본계 우월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조선인들의 정치 활동이 일체 금지되며 김대중의 정치 인생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김대중은 신민당의 "저항파"에 속한 인물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비밀리에 신민당을 지하정당으로 재창당했고, 스스로 광주 지역의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조선 남부 지역은 공안 탄압이 가장 거셌던 지역이었으므로 얼마 후 그는 그나마 감시가 덜했던 관북 지역으로 피신해 김영삼, 이기택, 강량욱 등의 정치가와 함께 신민당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반독재 투쟁은 조선인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특히 사업가로서 번 돈 대다수를 반독재 투쟁에 선뜻 내놓았기에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정권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는 동만주로 피신했으며,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여 김일성, 이재유, 박헌영 등의 고참 공산당원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중 통일전선 노선에 호의적이었던 김일성과는 동지의 관계가 되었다. 1978년, 백철의 근로인민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반독재투쟁위원회(반투위)가 설립되었다. 김대중은 반투위 내에서 공산당과 동맹 관계를 맺자는 PF파의 지도자격인 역할이었으며, 그의 노력으로 1981년 반투위와 조공당이 합당해 삼민투쟁회의가 설립되었다. 김대중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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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당 | 1948 - 1967 | 입당 |
신민당 | 1967 - 1972 | 창당 |
무소속 | 1972 - 1974 | 정당 해산 |
신민당 | 1974 - 1981 | 지하정당으로 재창당 |
1981 - 2009 | 창당 정계은퇴 작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