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
---|
[ 펼치기 · 접기 ] |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 Roh Moo-hyun | |
---|---|
출생 | 1946년 9월 1일 |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30 (現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 | |
사망 |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 | |
사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 (본산리) |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
재임기간 | 제16대 대통령 |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 |
서명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노무현(盧武鉉, Roh Moo-hyun)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활동했다. 그는 노동자 계층의 출신으로,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당에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 등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북한과의 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 등을 추진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사상과 역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09년 5월 23일, 그는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치사상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애
변호사 활동
노무현은 1980년 대학 시절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학생 운동대책위원회의 법률자문단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고용노동, 국가안보법, 국가유공자법 등 다양한 분야의 사건을 담당하였다.
특히, 고용노동 분야에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산업재해 보상 청구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민주주의를 위한 법률활동을 펼치기 위해 법률연구소 설립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무현 변호사의 노력과 열정은 이후 민주화 운동을 향한 투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1990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신과 윤리를 기반으로 한 변호사단인 '민주변호사모임'을 설립하고,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법률사무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정계 입문
노무현은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노동자들, 환경운동가들, 민주화운동가들과 함께 일해왔으며, 빈곤층 및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법안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국회 안보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를 적극 지지하였다. 1998년 노무현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다.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무현은 청와대와의 충돌을 빚으면서도 법원 개혁과 검찰개혁, 그리고 인권보호 강화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으로서는 "대한민국은 바뀔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고, 정치적인 변화와 대한민국의 글로벌 역할에 중점을 두고 경제, 국방, 국제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전망적인 대북정책으로 유명하다. 그는 2007년 6월,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며, 2002년 이후 처음으로 두 대한민국과 북한 대표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으며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남북관계의 평화적인 발전을 추진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국가안보, 국민생활개선, 국가재건, 국제화, 권위주의 청산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한일 역사문제 공동연구 등의 이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통렴 퇴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대외적인 연설 및 강연, 그리고 국내외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이어갔다.
노 대통령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권과 민주주의, 환경 등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바탕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연설 및 강연을 통해 사회운동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또한 여러 차례 국내외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와 민주주의 위반 등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와 협력하고 환경보호와 관련된 여러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그는 또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고, 여러 책을 출판하며 작가로서 인정받기도 하였다.
사망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이전에 그는 비리 수사를 받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과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비리 수사는 그와 가족들이 국내외 거래소 상장기업들의 주식을 불법적으로 매매하고 이익을 얻은 혐의였다. 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수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의 진행 방식을 불공정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전의 개혁적 행보에 상충되는 모습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살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가족들과 함께 자택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그 날 새벽에 가족들에게 이별 인사를 건넨 후 자택 내부 침실에서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픔으로 전국적인 애도 분위기가 흘렀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영결식이 열렸고, 그의 유가족과 수많은 국민들이 그의 뜻을 기리는 행사들을 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노무현 대통령은 대체로 대한민국 역사상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복지 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과 문제들을 해결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은 지금까지 시행되었던 대한민국 헌법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고,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인권과 사회정의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며, 여성 인권, 장애인 인권, 성소수자 인권을 포함한 모든 취약 계층의 권리를 보호하였다.
노무현은 또한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햇볕 정책'을 제안하고, 남북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7년 10월에는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이는 5년 만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이며,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최초의 사례였다.
부정적 평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의 집권기간 동안 국내외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로 그의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합니다. 그의 부정적인 평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낙하산 지역구 논란
국회의원 시절 험지 출마 대신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호남 위주로 출마하여 논란이 되었다.
대북 정책 실패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북 정책을 강조하였지만, 이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실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퇴임 이후 2008년에 북한의 군사 작전으로 인해 남북간 철도가 파괴되었을 때, 그의 대북 정책이 무력한 것으로 비판받았습니다.
국내 경제 성장 실패
노무현 대통령은 이른바 '평등한 경제성장'을 강조하였으나, 그의 임기 동안 국내 경제가 침체하였다. 그리고 퇴임 이후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발생으로 인해 대한민국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책임 논란도 존재한다.
민주주의 원칙 위반
민주주의를 항상 옹호하던 그의 행보와 상반되게, 야당인 열린우리당 측에서는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국내에서 많은 사건들을 조작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전두환 자살미수 사건"이 있는데, 200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출소한 직후 자신의 과오를 이유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수사결과, 자살미수는 물론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블랙리스트"나 지지자 명단도 노무현 정부의 권력 남용에 의해 작성되었고,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이 야당을 위주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노무현 정부의 청렴도와 정의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비리 및 부정행위 혐의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이전부터 그의 비리와 부정행위에 대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리 및 부정행위는 그의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어떠한 성과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비리 수사 중인 2009년 5월 23일 자택에서 발견된 뒤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으로 인해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사례로 남았다.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나주시·나주군 | 56,608 (72.44%) | 당선 (1위) | 초선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나주시 | 48,762 (74.15%) | 재선[1] | ||
2002 | 제16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12,014,277 (48.91%) | 초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8 - 2009 | 정계 입문 사망 |
- ↑ 전국 최다 득표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