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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후루 아이싱가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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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 ||||
직위개설 | → | 초대 니어후루 아이싱가 |
→ | 제2대 남춘봉 |
만주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니어후루 아이싱가 Ниохүрү Aисиңиа | 钮祜禄 爱星阿 | ||||
출생 | 1922년 11월 2일 | |||
중화민국 흑룡강성 | ||||
사망 | 2010년 1월 11일 (향년 82세) | |||
묵던 수도시 국립 묵던대학교병원 | ||||
만주 민주 공화국 초대 대총통 | ||||
후임: 남춘봉(제2대) | ||||
재임기간 | 만주 인민 공화국 제7대 국가주석 | |||
1991년 9월 3일 - 1993년 1월 5일 | ||||
만주공산당 제20대 서기장 | ||||
1991년 8월 21일 - 1993년 1월 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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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니어후루 와이란 어머니 니어후루 백하 |
배우자 | 니어후루 루드밀라 |
자녀 | 슬하 2남 1녀 |
학력 | 프룬체 사관학교(졸업 / 52회) 국립묵던대학교(졸업 / 3회) |
종교 | 만주정교회 (세례명: 라도네주의 성 세르기) |
정당 | |
의원선수 | 1(건국의회) |
의원대수 | 만주 건국회의 대표의원 |
자 | 경춘(慶春)[1], 로사(老舍)[2] |
호 | 로사(老舍)[2] |
서훈 |
공식 초상화 |
개요
랑경춘 (한자: 狼庆春), 니어후루 아이싱가 (만주어:Ниохүрү Aисиңиа, 1922년 2월 3일 ~ 2010년 8월 24일)은 만주 민주 공화국의 정치인·언론인·문학가·사회운동가·교육자로, 만주 인민 공화국의 마지막 국가주석이자 만주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을 역임한 인물이다. 1995년에 건국훈장 공화국장을 서훈받았고, 2003년에 국가인민영웅장을 서훈받았다.
대성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헤이어성의 아편굴과 마작을 운영하던 가정에서 태어나 이후 집에서 쫓겨나고 러시아 정교회의 고아원에서 나와 사회에 나온 청년시절 반대성운동에 지식인으로서 서리로 등용되어 지하신문인 《독립회보》를 발행하는 책임자로 활동하였었고, 만주공산당에 가입한 후 지식인을 소련에서 양성하여 향후 이용하려 하였던 블라디미르 보이틴스키에 의해 발탁되어 모스크바의 프룬제 사관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하였고, 1945년 8월의 소련이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자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만주 인민 공화국을 건국시키었고, 이때 공산당원으로서 교육기관의 감시겸 교육을 수료하고자 국립묵던대학교에 입학하여 인문대학을 나와 졸업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주 인민 공화국에선 만주공산당의 상임간부회의의 상임간부직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직책을 거쳤다. 그가 주도한 대표적인 정책이 만주어 문자개혁등이 있다. 이는 현재까지도 2번의 수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해당 표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후 말기의 정국이 고르바쵸프식 개혁파가 잡고있던 권력을 니어후루 아이싱가가 당수이던 민국개혁파가 이어받자 기습적으로 1992 민공천명사건 등을 일으키며 결국 1993년 건국회의를 수립하며 만주 인민 공화국을 계승하여 만주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 국부가 되었다.
일생
1922년 11월 2일 중화민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편굴과 마작집을 운영하였고, 아편굴에서 일하던 매춘부와 생긴 사생아가 바로 니어후루 아이싱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싱가를 낳은 후 얼마 안되어 흑룡강성을 떠났고, 니어후루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6살때부터 마작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하였다. 11살까지 마작집에서 일하던 아이싱가는 숫자 계산과 언어 습득에 능했다. 하지만 투루시는 아이싱가를 자신의 친자식들에게 해를 끼칠 골칫덩이로 보아 쫒아냈다고 한다. 이후 헤이허성에 위치한 성 그리고리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그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숫자계산에 능한점을 인정받아 한 신문사에서 회계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신문사가 《독립회보》를 간행하는 건평신문이었고, 순사에게 습격당해 잡혀갈뻔 한것을 반대성 운동을 하던 공산당원들에게 구원되면서 반대성 운동과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그는 독립회보를 지하신문화 하는것에 협조해 건평신문에 있어선 간부가 되었고, 지하언론을 효율적이고 특정 대성에 좋은 감정이 적은 연령대에 유포하여 성과를 거두는 등, 이를 통해 몇몇 민중들이 혁명가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언론활동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었다 판단한 그는 그렇게 만주공산당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여러 혁명당원들을 지원하는 비밀거처를 마련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때,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좌익활동에 대해 소련에서 보냈던 블라디미르 보이틴스키는 그를 높이 사 소련의 푸룬제 사관학교로 유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를 포함하여 5인이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었다. 하지만 짐칸에 겨우 몸을 사리며 가는 터였던지라,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동지는 가던중 동사해버렸고 한명은 유학을 도중에 포기하는 바람에 그를 포함, 3명만이 프룬제 사관학교의 유학길에 최종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당시 얼마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가는 길이 고되었는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는게 아닌가 하며 그나마 남은 동지 세명과 서로 꼭 껴안고 담요를 서로 감싸 버티면서 갔다."라고 회고하였다.
4년간의 유학생활은 이미 러시아어를 어느정도 하던 터였던지라, 시작만큼은 매우 순조로웠다. 당시 해외혁명활동을 책임지던 고위간부인 미하일 이바노프와 만났고, 이미 러시아어를 할줄 알던 그가 아직 말을 다 못땐 동지들 대신 대화하며 점수를 땄고 그의 열정에 감동하여 그들의 유학의 뒷배가 되어 주었다. 프룬제 사관학교에서 군사학과 조직에 관해 배운 그는 소련의 만주전략공세작전에 투입된다는 명령을 받았고, 만주공산당의 파르티잔들을 이끌 책임을 받았다. 이때 명령서를 받아든 그때를 회고한 그의 저서 《고백록》에는 "종이 하나가 나에게 그렇게 압박감과, 책임감을 줄줄 몰랐다." 라고 회고하였다.
이후 만주전략공세작전에서 묵던에 입성하자, 바로 점령지 관리의 고위담당자로 임명되었고, 만주공산당 내에서 유망주로 많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배우고 싶은게 있었고, 당시 서기장이었던 힝단 예록에게 장춘국립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당직과 공직에 힘쓰겠다 말하고선 장춘국립대학의 예비 입학생으로 등록되게 된다.
이후 민주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자 그는 인문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부전공으로, 주전공은 문학으로 4년의 수료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바로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이때 그가 말년까지도 함께할 정치적 동지를 얻는데 남춘봉이다. 그는 1940년대 몽골이 문자개혁을 한것에 영감을 받아 이후 문자개혁을 주장하게 되었다. 소련의 외교관이 문자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이 있는 후, 문자개혁을 위한 위원회가 개설되고 그가 위원장이 되어 키릴문자를 사용하는 만주어를 구상하였고, 1952년 《효율적 신문자체계(1952)》를 발표하며 만주에서는 이를 초안으로 1번의 개정절차 후 1955년 《유민경문(牖民警文)》을 선언하며 이후 만주문자는 키릴문자로만 쓰이게 되었다.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는 당중앙까지 속전으로 승진하였고, 당중앙의 요직에 자신의 인사를 배치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만주 인민 공화국말에 자신의 민국개혁파와, 고르바쵸프식 개혁파, 마르크스 정통파의 큰 세 파벌 가운데 고르바쵸프식 개혁파가 실각하고 얻은 정권을 가지고 1992 민공천명을 선포하였고, 1992년 12월 건국회의를 수립하고 1993년 3월 15일 1차 국가대률을 선포하였고 직선제로 1994년 대총통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남춘봉이 다음 대총통에 당선되었고, 1999년 개헌때 그는 마지막 행보로 개헌회의 초대 의장직을 맡아 지금의 2차 국가대률을 선포하며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나 자신의 고향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2010년 1월 11일, 그는 간암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니어후루 아이싱가 정부
타타라 아산 내각
보굴롯 와키란 내각
개헌의회 의장
저작
창작품
여담
유명한 애묘가이다. 또한 유쾌한 풍자소설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중국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애주가였다. 하루의 시작을 보드카 한잔으로 시작할 정도였고, 손님이 오면 아르메니아산 브랜디를 꼭 대접하였다.
각주
- ↑ 그를 거두어준 신부가 그를 가르키며 "경사스러운 봄이다."라고 한것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 ↑ 2.0 2.1 자와 호를 겸하여 사용하였다.
- ↑ 봉천 군벌을 이끌고, 만주 지역을 통치하던 장작림의 무덤에 한 일본 개가 오줌을 누자 장작림이 살아나서는 만주사변의 전개를 목격하고는 다시 도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풍자 소설이다.
- ↑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자신이 취임하는 직책 이름도 대총통이 되었다. 막상 취임할땐 몰랐으나 자신을 비판하는 마지총의 일갈로 깨달았다고 한다.
- ↑ 안경을 쓰고 여성스럽게 생긴 띠공 선생이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며 아편중독자 푸이(圃怡)와 함께 나병촌과 매음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는 계획을 짜는 내용의 풍자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