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조니 가문

Famiglia Rigioni
라틴어명 Gens Rigionia
영문명 House of Rizoni
표어 F.F.R.O.S. (1473~)
Fides et fiducia radices nostrae sunt.[1]
건립일 1389. 5. 28
시조 발데마로 리조니(Valdemaro Rigioni)
중시조 파비오 리조니(Fabio Rigioni)
가주 발데마로 데 리조니(Valdemaro de Rigioni)
가문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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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니 저택 (Palazzo Rigioni)
국가 노르웨이 왕국
피렌체 공화국
그리스 왕국
작위 교황
노르웨이의 왕
정의의 곤팔로니에
피렌체 공작
코린토스 공작
민족 이탈리아계통 일족
본가 본 가문이 분가들의 뿌리임.
분가
리조니 가문의 기원 몬테리조니 성
피렌체의 리조니 궁전
피렌체 교외의 리조니 가족 예배당

교황
호칭 성하 (聖下,Papa)
교황 빅토르 4세
대수 제235대

노르웨이의 왕
호칭 폐하 (陛下, Majesty)
테오필리스
대수 제13대

개요

리조니 가문(이탈리아어:Famiglia Rigioni, 라틴어:Gens Rigionia, 영어:House of Rigioni)는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이다. 리조니 가문은 한명의 교황(빅토르 4세)을 배출하였으며 역사상 5명의 추기경, 다수의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다.

그들은 피렌체에서 주로 고위 귀족가문으로서 권력을 행사해 왔다. 15세기부터 파비오 리조니가 가문을 부흥시키자 본격적인 권세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더욱 나아가 당대의 최고 권력가인 메디치 가와 결탁하여 독주체제를 완고히 해 주었다. 이후 코시모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이를 낚아채면서 한세기 안되게 피렌체를 지배해왔다. 이후 파치 음모에 의해 파치 가가 몰락하고 메디치 가는 통치자의 무력함과 잦은 음모로 인해 추락하자 메디치 가문을 지원하면서 실세로서 군림하다 17세기가 되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 정치에 개입해 사실상 통치하였다.

비록, 그들의 혈통은 고귀한 귀족가문이나 영세가가 아니라 도시의 수공업자(정확히는 대장장이)였으나 길드를 장악하고 사업에 수완이 있었던 파비오 리조니가 가문을 부흥시켜 그의 아들 알레산드로 리조니가 피렌체에 정착시켰고, 안드레아 리조니가 메디치 가문과 우정을 만들어 가문의 안정을 꽤하여 피렌체의 귀족가문으로 공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리조니 가문의 주된 사업은 은행업, 모직물, 철강업, 갑옷 제조업, 수공업 등이 주된 사업이었다. 리조니 가문은 메디치 가문에서 개발한 복식부기 체제를 단식부기 체제를 버리고 빠르게 변화하여 적용하였으며, 메디치 가문이 창성할 때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은행으로서 항상 부유하였다. 그들의 가문 문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피렌체의 속담에서도 들어나는데, "리조니도 그쯤 하면 내려놓는다."라는 속담과 같이 리조니 가문은 피렌체에서도 유명한 애주가들이 즐비한 가문이었다. 시조인 발데마로 리조니서부터 애주가였고 유명한 리조니인 안드레아 리조니는 특히나 낮술을 즐기고 이탈리아의 유명한 고전 소설을 집필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유명 저작으로는 《토스카나의 우화》와 《피아노 포르테》가 유명하며, 피아노 포르테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걸작으로 불린다.

역사

리조니 가문의 근본은 피렌체 외각에서 일하던 도시의 대장장이 가문이었다. 때문에, 문장의 상단 금색위에 망치와 집게가 있는것으로 그 근본을 추적할 수 있다. 리조니 가문의 문장은 교황에 오른 빅토르 4세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부역한 부역자 마르첼로 리조니, 가문 자체가 방계로 갈라져나간 울덴부르크-몬테리조니의 경우엔 아예 하단의 바퀴를 다른 문장(크리스토그램, 책)으로 바꾸거나, 바퀴만 남긴채 몬테리조니 성을 그려넣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초기엔 도시의 평범한 대장장이 가문이었으나 길드의 수장을 맡은 발데마로 리조니가 자신의 아들 둘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뒤 파비오 리조니 대에 금융업의 부흥에 올라타 금융업 가문이 되었다. 원래는 금색 바탕에 망치와 집게만 있는 문장이었으나 이후 금융업 가문이 되며 파란색으로 위아래로 방패를 나누곤 아래쪽에 바퀴를 추가한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후 피렌체의 도시귀족으로 남다가 파치, 메디치의 몰락 이후 마지막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한 가문으로써 17세기 최고의 전성기를 달렸다.

그리스에까지 진출한 리조니 가문은 같은 가문인 빅토르 4세 치세 시절에 잠깐 점령하였던 코린토스의 공작으로 봉해지며 그리스의 작위도 잠시나마 소유하게 되었었고[2] 독일과 폴란드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었으나, 중세의 말미 이후 급격히 몰락하며 역사의 메인스트림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피렌체가 함락되며 그 치세도 끝나게 되었다. 이후 현대에 와선 무솔리니 정권 아래에 부역한 마르첼로 리조니는 파시즘에 대한 유명한 이론가이자 연설가로 부역하며 그 가문의 위세를 잠시나마 드높였으나, 이탈리아가 연합군의 상륙으로 남북으로 갈라지고, 마르첼로 리조니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으로 도망도중 가문의 고향인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하며 끝나게 되었다.

이후 마르첼로 리조니의 사촌관계의 발데마로 데 리조니가 이탈리아 공산당 아래에서 레시스텐자 활동을 하며 정치계에 진출하자 다시금 가문은 유지될 수 있었으며, 노르웨이에선 먼 친척관계로 울덴부르크-몬테리조니 가문의 요하네스가 노르웨이의 왕위 적장자로 결정되어 왕위에 오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현대의 리조니 가문은 피렌체 근교의 화학공장과 피렌체 내의 관광업에 종사하는 가문이 되었다.

발데마로 리조니

위대한 파비오 리조니

알레산드로 리조니

발데마르 리조니

안드레아 리조니

아드리아노 리조니

알베르토 리조니

파비오 데 리조니

근대

안토니아 리조니

안드레아 데 리조니

발데마로 데 리조니

파브리지오 리조니

작은 파비오 리조니

죠르죠 리조니

현대

아드리아노 데 리조니

세르오지오 리조니

마르첼로 리조니

발데마로 데 리조니

테오필리스 요하네스 울덴부르크-몬테리조니

각주

  1. 믿음과 신용이 우리의 뿌리이다.
  2. 이후 비잔틴 제국이 수복하며 사실상 상실하게 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