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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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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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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 상륙작전 Operation Overlord bataille de Marseil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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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오버로드 작전의 일부 | ||||||||||||||||||
날짜 | 1944년 6월 6일~1944년 7월 | |||||||||||||||||
장소 | 프랑스 코뮌, 마르세유 | |||||||||||||||||
결과 | 협상국의 마르세유 상륙 성공 | |||||||||||||||||
영향 | 협상국의 대대적인 유럽 귀환작전 시작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인터내셔널 축출 양면전선 형성으로 인한 프랑스 코뮌의 패망 가속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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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로드 작전 |
개요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Eisenhower, Entente naval forces supported by strong air forces began landing Entente army this morning on the southern coast of France.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하에, 협상국 해상 병력은 강력한 공중 지원과 함께 오늘 아침 협상국 지상 병력을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오전 10시 BBC 홈 서비스 |
제2차 벨트크리그 중 오버로드 작전의 일환으로써, 협상군이 제3 인터내셔널 프랑스 코뮌의 마르세유에 1944년 6월 6일에 게시한 상륙작전이다. 마르세유 상륙작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자 협상국이 유럽을 탈환하는데 발판을 마련한 최초의 작전이었다.
원래 작전명은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이지만 마르세유 해안에 상륙하는 작전 과정으로 인해 대체로 "마르세유 상륙작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디데이(D-DAY)라는 말은 본래 이 작전의 게시일을 뜻하는 용어였다.
서론
인터내셔널이 독일을 침공하여 발발한 제2차 벨트크리그가 시작된 이후 독일의 총리인 한스 포겔은 인터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독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줄곧 서유럽에 제2전선 형성을 요구하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협상군은 이에 호응해 1942년에 이미 관련 성명을 발표했으나, 루이 스티븐 생 로랑 캐나다 총리의 반대[1]로 인해 미뤄졌다. 그 대신 이미 프랑스 공화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중해를 통해 공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43년 중순, 협상군은 북아프리카를 수복하고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점령하며 인터내셔널을 지중해에서 축출하기 시작했고 같은해 9월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유럽전선에서는 독일이 함부르크 공방전과 프랑크푸르트 전투에 이어 독러전쟁이 진행 중이던 동부전선에서 드레스덴 전투을 이은 3연타를 성공 시키어 결정적 승리를 하며 인터내셔널과 사빈코프 러시아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전황이 바뀌고 있었고 협상국은 프랑스 해안 상륙 작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4개의 상륙 지점 후보[2]가 뽑혔으나 최종적으로 낙점된 것은 마르세유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코뮌은 저 4개 후보 중 몽펠리에라는 곳이 협상군이 상륙하기 가장 유력한 곳이라 여겨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둔 상태였다는 것이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협상군은 마르세유 해변으로 상륙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코뮌군에 대한 수많은 폭격이 수반되었다. 작전 자체는 성공했으나 오마하 해변에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때문에 이후 여러 매체에서 마르세유 상륙작전을 다룰 때 가장 인지도 높게 인용이 되고 있다.
마르세유 상륙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3][4] 약 16만명의 병력이 작전 당일 지중해를 건넜고 6,939대의 함정이 동원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적화 된 서유럽 해방의 첫 발걸음이 되었으며, 나아가 이후 서부 전선에서의 라이히스팍트와 협상국 연합군의 승리와 인터내셔널의 최종적인 패망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된다.
배경
독일은 이미 라인란트 일대에서 인터내셔널을 상대로 처절한 방어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러시아가 라이히스팍트를 기습적으로 침공하자, 독일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핼리팩스 회담에 따라 유럽에서의 제2전선의 구축을 영미 연합군에게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1942년, 이러한 요구로 인해 결국 정치적인 입장과 국민의 사기 진작, 그리고 코뮌군의 해안 방어 능력을 시험해 볼 겸 루이 스티브 생 로랑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헤쥬스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특히 주력이었던 프랑스 국민군과 캐나다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 작전으로 인해 상륙작전의 기본이 뭔지를 깨닫는 성과도 있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상륙하면 망한다는 게 분명해졌므로 협상군의 제2전선 형성은 계속 연기된다.
그러자 협상군은 캐나다의 전략적 이점을 고려, 루이 총리의 발루아의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주장한 이탈리아, 스페인 남부 유럽에 상륙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어록
가을 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끊기지 않는 우수로 내 마음 괴롭히네. 종소리 울릴 때 창백하고 곧 숨막혀 옛날들 기억나 눈물 흘리네. 그리고 휩쓸어 가는 모진 바람에 이끌려 가네 여기저기로 낙엽처럼.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 반공 레지스탕스에게 마르세유 상륙작전의 작전 개시를 알린 신호 |
협상군의 육해공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수 개월에 걸쳐 준비한 위대한 원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여러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어디서든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용맹한 동맹과 다른 전선의 전우들과 함께 인터내셔널의 군사력을 격파하고, 탄압받고 있는 유럽 시민들에 대한 생디칼리즘의 폭정을 몰아내며, 자유 세계에서의 우리의 안보를 지켜낼 것입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적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으며, 높은 수준의 장비를 갖추었고 전투 경험 또한 풍부합니다. 적들은 무자비하게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1944년입니다! 인터내셔널의 승전이 있었던 1940년, 1941년으로부터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협상국은 적들에게 대등한 규모의 전면전에서도 수 차례 참혹한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우리의 공습은 적들의 공군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그들의 지상전 수행 능력을 저하시켰습니다. 우리의 후방에서는 우리에게 무장과 탄약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안겨주었으며, 다수의 훈련된 예비대를 보내주었습니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자유 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용맹과 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 수행능력에 대해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그리고 이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에게 전능하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1944년 6월 6일 일일명령(June 6, 1944, order of the day) |
- ↑ 당시엔 미국도 내전의 피해를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라 그런 거대한 병력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 ↑ 니스, 몽펠리에, 페르비냥, 마르세유
- ↑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에 동원된 사단이 2개 더 많긴 하였으나, 협상군의 해군 및 공군의 상당수가 이 작전에 참가했고, 협상군의 서부전선 주공은 이날 마르세유에 상륙한 군인들이었다. 존 키건에 따르면 이탈리아 전역 등이 사실상 이 서부전선을 보조하기 위한 조공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훗날 서부전선을 이끌 군인들을 이 해안에 다 투입했다.
- ↑ 또한 전체적인 작전 규모는 협상국과 라이히스팍트의 브리튼 침공작전인 귀향작전과 바다사자 작전이 압도적으로 컸으나, 단일작전 규모로는 마르세유 상륙작전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