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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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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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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Unternehmen Barbarossa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 Operation Barbaross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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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날짜 | 1944년 6월 22일~1944년 8월 19일 | |||||||||||||||||
장소 |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발칸전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발트연합공국 | |||||||||||||||||
결과 | 독일제국과 라이히스팍트의 대승 | |||||||||||||||||
영향 | 독일이 러시아를 완전히 독일 본토에서 축출함 발칸의 모스크바 협정군이 붕괴함 벨라루스 전선군이 궤멸함 팍트군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와 발트연합공국을 해방 시키기 시작함 북유럽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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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와 드네프르-돈 공세 |
개요
독일어: Operation zur Befreiung des Ostens[1], Operation Ostrückkehr 《Barbarossa》[2]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3]
독일군이 독러전쟁 발발 정확히 3년 만인 1944년 6월 22일 중부전선 일대의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을 상대로 실시한 대반격 작전. 독일이 러시아에 내린 사형 선고라고 불린다.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1944년 하계공세는 서방 협상군이 대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상륙한 오버로드 작전과 대한제국과 협상군의 극동 공세작전에 시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통해 갖춰진 엄청난 수량의 차량으로 기동력과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독일군은 여름 기간 동안 동부전선 전체에 걸쳐 반격에 나섰다.
당시에 독일군은 동부전선 최북단의 핀란드 일대를 우선 공격했고(은색 여우 작전, 5월 20일) 이후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이 담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 주공세를(바르바로사 작전 6월 22일), 이어서 발트3국과 동프로이센에 배치된 러시아 발트 전선군에 보조 공격이 이어졌다.(베오울프 작전, 7월 10일) 그 후에 갈리치아와 우크라이나 전선군(뮌헨 작전, 7월 13일)과 마지막으로 발칸반도의 발칸 전선군을 공격했다.(25 작전, 8월 20일) 이 중에서 가장 전력이 집중되어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곳이 주공이었던 벨로루시의 벨라루스 전선군에 대한 바르바로사 공세였다.
사빈코프와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주공 방향을 오판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전략적 기습을 달성했고 러시아군과 벨라루스 전선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 여기에 사빈코프가 벨라루스 전선군의 후퇴불가를 고집하면서 러시아군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서는 대참사를 맞았다. 독일군은 폴란드-벨라루스 돌출부의 정면을 돌파하여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 일대를 휩쓸고 발칸을 고립시키며 취약한 벨라루스 전선군을 포위섬멸하고 발칸을 포위 시켰다.
당시 벨라루스 전선군을 구성한 4개 야전군 중에 정면을 담당한 제1 근위 전차군, 3군, 5군에 타격이 집중되었다. 3개 군 모두 전면적인 재건에 착수했으나 벨라루스 전선군의 잔해더미에 불과했다. 특히 비알리토스크 일대에서 포위섬멸 당한 제4군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러시아의 신임 벨라루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바실렙스키 원수가 기동방어와 적절한 대처로 공세 시작 1달 반만인 8월 초순 경에 독일군의 진격을 민스크와 키이우 근처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간신히 정지시켰으나 이미 벨라루스 전선군이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마르세유 상륙작전과 뒤이은 프랑스 전역도 이즈음에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으며, 대한제국과 미국의 합동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극동 공세 작전 또한 러시아 극동군이 사실상 괴멸한채 마무리 되었다. 러시아군은 동서 양쪽 전선에서 라이히스팍트와 협상군의 역대 최대규모의 공세를 받아 완패했다. 그 결과 러시아국은 수년간 지배했던 북유럽 및 동유럽의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한 채 러시아 본토로 밀려났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팍트군과 협상군이 다음으로 러시아 본토의 심장부를 향해 밀고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사빈코프와 제2 제국의 운명은 패망까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게 되었다.
배경
빈을 해방한 독일군 |
바르바로사 작전 전해인 1943년 여름에 독일군은 포젠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포젠 전투가 아직 채 끝나기도 전에 독일군은 동부전선 곳곳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포젠 전투 이후인 1943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1944년 초까지 6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독일군의 반격은 특히 전선 남부인 발칸에 집중되었다. 사빈코프가 발칸의 원유지대를 비롯한 자원지대의 상실을 우려하여 우물쭈물하는 동안 독일군은 도나우 강을 순식간에 돌파해버렸다. 발칸 전선군은 힘겨운 퇴각전투를 치르며 도나우 연방의 영토에서 간신히 후퇴했다. 1944년 봄 무렵에 이르면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도나우 연방의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북쪽으로는 갈리치아 서부, 남쪽으로는 보스니아 일대에,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왕국이 도나우 연방에게서 빼앗은 트란실바니아 입구까지 밀고들어왔다. 한편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 북쪽 지역에서는 더이상 쾨니히스베르크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발트 전선군이 독일군의 압박으로 인해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물러나며 기나긴 포위전이 마침내 끝났고 쾨니히스베르크는 해방되었다. 벨라루스 전선군 역시 요충지인 바르샤바를 내어주고 벨라루스 방면으로 밀려났다.
러시아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동부전선에서 해빙기로 인해 전투에 부적합한 계절이 찾아오면서 전선은 북 발칸과 폴란드를 싹 뺏겼지만 어느정도 안정화되고 일단은 그럭저럭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 러시아군의 관심은 다가오는 1944년 여름에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과연 어디를 공격해올 것인지에 모아졌다. 1944년 여름에는 극동에서 라이히스팍트의 한국군과 협상국의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극동 연합군이 시베리아 철로를 따라 극동 공세를 실시할 것이 너무도 명백해진 상태였다. 동부전선의 독일 역시 극동 공세이 발맞추어 대대적인 하계 공세에 나설 것이 확실했다. 수세에 몰려 전략적 방어자의 입장이 된 러시아는 그나마 잔존한 전력을 동부전선의 어디에 배치해야할 지, 적의 주공방향을 고민해야되는 처지였다.
동부전선에서는 발트 전선군과 발칸, 갈리치아 전선군의 전선이 밀려나자 결과적으로 벨라루스 전선군의 담당지역인 폴란드-벨로루시 일대가 독일군 방향으로 돌출되었다. 벨라루스 전선군이 버티고 있는 이 돌출부는 이른바 "서 벨로루시 발코니"라고 명명되었다.(위 지도에서 연한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 당시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서 벨로루시 발코니 바로 남쪽에 위치한 갈리치아, 발칸 전선군(종전의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공격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했다. 갈리치아와 발칸 전선군은 벨라루스 전선군의 서 벨로루시 돌출부 남쪽 측면의 연결지점인 갈리치아 동부일대와 발칸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빈코프와 러시아군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직전까지 독일군은 발칸 해방에 집중했고 발칸 전선에 이미 막대한 라이히스팍트의 병력들이 전개되어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발칸 남부의 러시아 동맹국들과 독일의 동맹 불가리아의 해방 그리고 오스만과의 연결을 목표로 하계 공세를 계속 이어가리라고 본 것이었다. 더욱이 러시아군이 보기에 독일군이 동부전선 한복판인 갈리치아 동부마저 돌파했다가는 동부전선 자체가 남북으로 결딴이 날 판이었다. 일단 동부 갈리치아가 돌파될 경우 그 위쪽의 벨라루스 전선군과 발트 전선군 전체의 배후가 위협에 처하게 된다. 또한 남쪽으로는 이미 잇따른 패전과 전황 악화로 동요하고 있는 발칸의 추축국들이 연합군측으로 전향해버릴 위험이 컸다. 특히 루마니아 왕국의 경우는 당시 러시아에게 바쿠 유전과 더불어 러시아군의 수요 상당수을 차지하는 석유공급처였다. 루마니아를 잃는다는 것은 곧 러시아가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상실한다는 것이었으며, 독일군과 연결에 성공한 오스만군이 바쿠 유전[4]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러시아군은 더이상 수요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 받지 못할 것이었으며, 그렇게 된다면 확실한 패망을 의미했다.
어느쪽이던 간에 러시아군으로서는 발칸과 갈리치아 전선군이 돌파되는 상황만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은 발칸, 갈리치아 전선군 의 담당지역에 전력을 집중했고[5] 사빈코프와 러시아군 지휘부의 관심도 온통 벨라루스 전선군의 정면이 아닌 남쪽 측면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미 동부전선 전체에서 반격을 실시할 수 있을만큼 전력상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고, 논의 끝에 벨로루시의 벨라루스 전선군 정면을 주공세지역으로 결정하였다.
독일군의 작전 입안, 준비
폐허가 된 폴란드의 한 마을을 지나는 독일군 |
포젠 전투 직후 시작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방이 마무리되고 있던 1944년 3월부터 독일군 지휘부는 다음 공세의 기회를 찾기 위해 동부전선 각 지역을 점검했다. 논의 끝에 독일군은 폴란드-벨로루시에 버티고 있던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의 정면을 공격해 섬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이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동부전선의 다른 방면으로 주공을 돌릴 경우 벨로루시에 있는 러시아의 벨라루스 전선군이 독일군의 측면을 위협할 우려가 있었고 돌출부의 벨라루스 전선군을 견제할 만한 병력도 별도로 필요했다. 반대로 벨로루시에 대한 공세가 성공하면 벨라루스 전선군 자체를 분쇄해버릴 수 있었고, 발트 전선군의 보급과 퇴로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벨로루시의 벨라루스 전선군을 격파하면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끝자락에 있는 러시아군을 완전히 축출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본토를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었고 벨로루시, 발트, 우크라이나 등 라이히스팍트의 동방 동맹국들을 해방함은 물론이거니와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 본토와 모스크바까지 위협해 볼 수도 있었다. 또한 압도적인 전력 우위에 선 독일군과 팍트군은 동부전선의 중부 뿐 아니라 동부전선 전체에 걸친 공세를 준비 중이었는데 벨라루스에서의 성공은 다른 전략적 공격 축선에서의 추가적인 공격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1944년 여름에 야심찬 4개의 대공세- 은색여우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뮌헨 작전, 25 작전을 계획 중이었다. 독일군의 계획은 동부전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공지역이 바로 벨로루시를 공격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을 따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공세에는 벨라루스 전선군을 상대로 독일군 4개 야전군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공세 계획의 전모는 빌헬름 3세와 SOK 사령관 카이텔[6], OHL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OHL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만 알고 있었다. 보급과 작전 단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5개의 작전은 북에서 남으로 시차를 두고 진행될 것이었다.
마지막 전략 계획이 고안되기 전에 OHL은 야전 조직과 그 사령관들을 교체했다. 동부전선의 각 집단군들이 크게 세개로 각각 북부, 중부, 남부를 담당하는 세개의 집단군으로 재편성되어 각각 게오르크 폰 퀴흘러, 발터 모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임명되었다.
한편 집단군 사령관들은 배치된 78개 사단과 4개 기갑집단, 총 100만명의 군대로 독일군이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에 대해 확실한 전력 우위를 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르덴 대공세의 성공으로 여유가 생긴 서부 전선과 각지에서 차출된 5개 야전군과 2개 기갑집단, 1개 우크라이나 야전군, 11개 전차군단 등 총 40만 명이 증강되었다. 빌헬름 3세는 작전의 구체적 사안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2일에서 23일까지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과 대치중인 대부분의 지휘관들을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작전 회의에 불러들었다.
헤르만 호트와 발터 벵크는 벨라루스 전선군의 대부분을 민스크 서쪽에서 포위 섬멸하고 이 작전과 함께 헤르만 발크의 제4 기갑 집단과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의 제2 기갑 집단이 돌출부 북쪽 비아위스토크의 러시아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돌출부 남쪽에서는 펠릭스 슈타이너가 11ss 기갑 군단을 이끌고 루블린 북쪽, 브레스트 주변에 배치된 러시아군에 대해 이중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겠다는 방안을 제출했다.
회의 끝에 마침내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적인 윤곽이 나왔다. 공세는 벨로루시 발코니의 러시아군 진지의 남익과 북익에서 야전군 규모의 기동 집단이 각각 전술적 포위진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3기갑집단과 제4 기갑집단이 협조, 바르샤바 북동쪽에 위치한 돌출부 북쪽의 비아위스토크를 포위하고, 11ss 기갑군은 돌출부 남쪽의 브레스트를 포위한다. 동시에 북쪽에서 비아위스토크 돌파가 성공하면 협조한 제2 기갑 집단과 제7 기갑 집단이 제3 기갑집단과 협조하여 러시아군의 후방인 민스크를 향해 양익 포위전을 실지한다. 제4 기갑 집단은 북익을 보호하기 위해 다우바 강을 향해 에스토니아 방향으로 진격한다. 제9군 좌익에서는 추후, 르비우 부터 코브린을 따라 드네프르 강을 향해 제11ss 기갑군이 공세를 시작한다. 공세 날짜는 잠정적으로 6월 15일에서 20일로 결정되었다.
OHL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기본 지침을 5월 31일에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에 따라 대군의 보급품을 옮기고 집단군을 따라 수많은 부대들이 기밀을 유지하며 전략적으로 이동했다. 남부 전선, 즉 러시아 갈리치아 전선군이 집결해 있는 갈리치아에서 주공이 있을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무에 모든 일은 극도의 기밀 유지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원안대로 시간을 맞추는 건 어려워졌고 작전 날짜는 갈수록 연기되었다. 계속 작전이 연기되자 빌헬름 3세는 아예 공세 날짜를 바그라티온 작전이 6월 22일에 벌어진 것을 복수하는 의미로 6월 22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