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여시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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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항미호국전쟁
Chiến tranh vệ quốc chống Mỹ
Vietnam War
날짜
1960년 9월 10일 ~ 1969년 7월 17일
장소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전역
사유
베트남 불법 혁명으로 인한 북부의 반외세 종교 정권 수립
종교 근본주의 정권에 반대한 일부 베트남인들로 인한 내전 발생
베트남의 친미 정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미국의 전략
결과
뚱람 정권의 승리, 미군베트남 공화국의 패퇴
영향
초강경 반미-반공 성향의 제3세계 종교 근본주의 정권의 수립
라오스, 캄보디아의 공산화 좌절
중국, 미국, 소련의 국제 영향력 축소
국가
뚱람
지원국
소련
태국
베트남 공화국
미국
대한민국
호주
지원국
라오스
지휘관
응우옌푸언
응오득후이
보응우옌잡
응오딘지엠
응우옌반티에우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박정희
해럴드 홀트
병력
1,200,000명 950,000명
540,000명
55,000명
6,500명
피해 규모
420,000명 전사 330,000명 전사
58,313명 전사
5,099명 전사
민간인 250만명 이상 사망

개요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은 1960년부터 1974년까지 치러진, 베트남 북부의 불교 혁명 세력남부의 친미 세력이 벌인 내전이다. 뚱람 현지에서는 항미호국전쟁으로 부르며, 한국에서는 월남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세

전쟁은 1960년 베트남 각지에서 일어난, 베트남 공화국 정부에 대한 반대 항쟁인 베트남 불법 혁명으로 촉발되었다. 1964년 미국을 위시로한 자유 진영의 전쟁 개입으로 내전의 성격을 띄었던 전쟁은 뚱람 정권과 자유 진영간의 전쟁으로 번졌고, 치열한 전쟁과 게릴라전 끝에 1969년 미군이 베트남 전역에서 전면 철수하고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와해됨에 따라 뚱람 정권의 승리로 끝났다.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불자들의 신임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특히 청렴한 승려들이 주축이 된 뚱람 정권과 달리 베트남 공화국 수뇌부의 부패와 사치, 밥그릇 싸움은 대다수 베트남인들이 남베트남 정권에서 등을 돌리게 하였다. 또한 미국이 일으킨 각종 전쟁 범죄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미국 내에서까지 전쟁에 대한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따라서 자유 진영 세력은 전술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전쟁의 결과, 뚱람 불교 혁명 세력이 베트남 전체를 통일하였으며, 미국은 건국 이래 최초로 해외와의 전쟁에서 패전함으로서 그 위상이 급격하게 추락하였다. 미국의 추락한 위상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수립과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성립될때까지 회복되지 못하였다. 더불어 뚱람 정권의 폭압적인 불교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남베트남의 민간인, 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보트피플이 되어 해외를 떠돌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과 서방 민간인들의 목소리는 1967년 히피 운동과 1968년 68혁명을 촉발시켰으며, 이는 서방의 철학, 문화, 정치에 방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더 나아가 현대 반전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결과와는 별개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전쟁 수행은 현대의 잔혹성과 폭력성에 대해 서구 열강이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옥의 묵시록>, <람보>, <플래툰>, <포레스트 검프> 등 전쟁의 영웅성보다는 전쟁의 비참함과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영화들이 여럿 제작되어 흥행하였다.

전개

1960년 베트남 전역에서 일어난 베트남 불법 혁명은 베트남 공화국을 멸망에 가깝게 몰아넣었으나, 혁명군의 극단적인 종교근본주의는 서방 세계에 큰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제한적으로 베트남에 군을 파병하였으며,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로 당선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비교적 반전파에 가까워 뚱람 정권과 휴전 협상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2년 2월 일시적 휴전 협의로 위도 17도를 경계로 북부의 뚱람 정권과 남부의 공화국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전국민의 90%가 불교신도인 베트남의 인문환경 상 남베트남에서의 반정부 운동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미국 군부 내에서는 휴전 협상 파기 여론이 높아졌다. 1963년 11월 주전파인 존슨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964년 1월부터 미국은 뚱람의 지속적인 게릴라 지원을 이유로 휴전을 일방 파기하고 북부 침공에 나섰다. 전쟁은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7월 17일, 뚱람 정권은 전국민과 종교인, 혁명군, 민병대에 비상 동원령을 선포했고 뚱람 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중국은 미국 견제를 위해 각종 전쟁 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지원했다.

8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25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있었다. 1967년 11월 3일부터 23일까지 베트남의 중부 고원 지대인 꼰뚬성에 있는 닥토에서 미군과 뚱람군 그리고 남부 민병대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미군은 캄보디아 국경 지대에 있는 꼰뚬성의 닥토라는 곳에서 적의 병력,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화력과 기동력만을 믿고, 익숙치 않은 지형에서 작전을 펼쳤고 뚱람군은 거의 연대가 궤멸되었다. 미군은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뚱람군 1,600명 이상을 사살했다. 20일 간의 전투에서 미군 또한 350명 이상 전사하고 헬기 40대를 잃었다.

이처럼 개별 전투에서 미국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1968년 남베트남에만 40만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등 미국 입장에서도 경제적 손실이 심각했다. 뚱람 정권은 불교를 평화의 종교로 선전하며 휴전 협상 파기를 미국이 일방적으로 저질렀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국의 언론 역시 미군의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부각하면서 전쟁의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미군의 사기를 하락시켰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 반전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68혁명 정국에서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6개월 내에 무조건 베트남에서 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약했고, 그는 근소한 차이로 공화당 록펠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험프리 대통령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 1969년 5월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시행, 뚱람 정부와의 협의 하에 약 25일간 총 30만명의 남베트남 주둔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1969년 7월, 무주공산이 된 사이공에 뚱람군이 입성하며 전쟁은 9년만에 뚱람의 승리로 끝났다.

관련 문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