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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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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연방 공화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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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메르케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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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소말리아 공화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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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소말리아 연방 공화국 대통령 압디라시드 알리 샤를메르케 Abdirashid Ali Shermarke | عبد الرشيد علي شارماركي | |||||||||||||||||||||
출생 | 1919년 6월 8일 | ||||||||||||||||||||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무두그주 하라드 | |||||||||||||||||||||
사망일 | 1995년 10월 15일 (76세) | ||||||||||||||||||||
소말리아 하라르데레 자택 | |||||||||||||||||||||
재임기간 | 소말리아 공화국 초대 총리[1] | ||||||||||||||||||||
1961년 2월 19일 ~ 1980년 2월 14일 | |||||||||||||||||||||
소말리아 연방 공화국 초대 대통령 | |||||||||||||||||||||
1980년 5월 13일 ~ 1984년 5월 1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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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아니, 명예를 택하기 보다는 자유를 택하리. |
소말리아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945년까지는 독립운동가로서으로서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영국령 소말리아 지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독립 이후 총리가 되어 소말리아의 지역강대국화와 오가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소말리아 공화국을 연방화 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소말리아의 케말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이에 상응하게 현대 소말리아의 국부로 추앙받는다.
강력한 중앙집권제, 정교분리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이탈리아와 영국의 식민지였음에도 "강자에게 배워야한다" 주장하며 중립외교를 기반으로 한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임기 동안 수많은 암살시도에 휩싸였으나 서방세계와 가까이 지내어 수많은 경제적 원조를 받을수있었고, 이를 통해 여러 국가의 경제개발 정책을 모방해 수많은 경제개발 정책을 시행하여 소말리아가 이집트를 제치고 아프리카 2위, 동아프리카 지역강국으로 동아프리카 공동체를 이끄는 국가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상세
독립 이전
총리에 대통령까지 지낸 양반이 정보가 이렇게 없다고? 긴배가 독립 이전 정보가 없음에 한탄하며 |
대충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공무원하다 이게 뭐하는거냐고 빡쳐서 때려치고 소말리아 청년연맹 만들고 정치하고 대소말리아 주장한거 말고는 정보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독립 이전 행적은 생략한다.
독립 직후
총리 재임 기간
다시 아프리카의 뿔이 되자 압디라시드 내각 시절 국가모토 |
중립 외교
샤를메르케의 외교 노선을 보여주는 사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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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총리 재임 시절 가장 노력을 기울였던것은 경제발전이나 세속화, 서구화 정책이 보다 다름이 아니라 중립외교에 가까웠었다. 그는 대소말리아주의, 경제발전, 세속화와 서구화 정책 모두 중립외교를 통해 이루어 질수있다 생각했었고 자신의 생각을 이루기 위해 중립외교에 모든것을 걸었었다. 오죽 그가 줄실했으면 본래 법적으로는 외교 권한이 대부분 대통령에게 있었으나 오스만 대통령이 샤를메르케의 중립외교 정책을 지지하며 그의 재임시절에는 사실상 외교적 권한이 총리에게 있기도 했었다. 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1세계를 비롯해 서방권과 대화하는 동시에 제2세계 및 제3세계에도 투자와 협상을 이어나가며 스스로의 중립외교 정책을 이행했다. 실제로 이것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어 그는 경제계발에 필요한 많은 재원을 제1세계에서 확보할수 있었으며, 오가덴 전쟁 당시 소련이 개입하는것을 막아내기도 했고 수많은 제3세계 국가의 지지도 얻어내었다. 이후 그는 총리와 대통령 퇴임한 후에도 의원을 지내면서 끊임없이 중립외교론을 강조했고 시아드 바레 내각 및 히르시 대통령이 친소노선을 강화하자 가장 강력히 반발하며 모든 외교 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해 본인이 만든 중립외교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세속화 정책
그는 강경 이슬람 국가로 기울뻔한 소말리아에서 상당한 규모의 세속화 정책을 실행했다.
서구화 정책
그는 서구화 정책도 실행했다.
경제개발 6개년 계획
대소말리아주의
그가 지지했던 대소말리아주의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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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말리아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야당의 비판에 항상 대소말리아를 위해서라고 응수했고, 앞서 말했듯 실질적으로 모든 정책들의 이유를 대소말리아 실현으로 정당화했다. 경제개발 6개년 계획에 대해 야당이 반대하며 지지 부족을 데리고 국회를 봉쇄하자(...) 그는 대소말리아에 반대하는 반국가놈들이라며 비난했을 정도였다.
우선 그는 첫번째로 지부티를 합병했다. 1967년, 프랑스가 지부티의 이름을 개칭하려고 하자 기회를 노려 직접 프랑스에 방문해 그러지 말고 "잔류, 독립, 소말리아에 흡수" 셋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라고 제안했다. 프랑스는 당연히 샤를메르케의 속내를 알고 있었으나 국민투표로 인해 소말리아에 흡수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여 OK를 했고, 대신 독립시에는 지부티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했었다. 허나 예상외로 소말리아가 없는돈 있는돈 털어가며 자금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지부티 내에서도 "소말리아가 되는길"이라는 어용단체를 만들어서 민족주의를 부추겨 투표는 점점 소말리아에 기울기 시작했다. 지부티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가 뒤늦게 소말리아와 같은 자금지원을 했으나 잔류 27%, 독립 33%, 합류 40%라는 결과가 나오면서 결국 지부티는 소말리아로 흡수되게 된다.
두번째로 그는 오가덴 전쟁으로 에티오피아 내 소말리아 지역을 쟁취하고자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
세번째로는 케냐의 소말리아 지역을 병합하고자 했는데, 문제는 그즈음 이미 샤를메르케는 총리에서 사퇴하고 대통령 임기도 끝나갈때 즈음이였다는 것이다.[4] 결국 그는 한번의 전쟁을 겪었기에 더 이상 전쟁으로 대소말리아를 이루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대소말리아 문제를 후임자에게 넘기고 임기를 마쳤다. 허나 그의 후임자가 하필 바레 총리와 히르시 대통령이였고(...) 이후에는 케냐 내 소말리아 지역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면서 사실상 소말리아의 대소말리아에 의거한 확장주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오가덴 전쟁
대통령 취임
말년
평가
아아! 샤를메르케시여! 저는 어찌하라고... 샤를메르케 사망 당시 총리 압둘라히 유수프 아흐메드 |
여담
어록
나는 국익을 최선으로 하며 이에 상응하는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에 만족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것을 선언합니다. 대통령 취임선언문. 이후 이 문장은 모든 소말리아 대통령 취임선서의 첫번째 문장으로 자리잡았다. |
내 정책의 존재 이유는 첫번째는 국민, 두번째도 국민, 세번째는 대소말리아입니다. 총리 시절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