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세계관은 리뉴 이브위키의 창작 세계관이며, 어떤 인물 또는 국가단체에 대한 감정 없이 서술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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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러시아의 정치인, 변호사. 현재 러시아의 총리이자, 현 사회혁명당의 총비서이다. 러시아 공화국 건국의 1등 공신이며 단 34세의 나이에 공화국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움과 동시에 브리치네 프라샤니에 계획으로 불리우는 토지개혁, 선거개혁 등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사자의 심장", "혁명의 심장" 등으로 불리는 과연 부정할수 없는 이 시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어린 시절케렌스키의 집안은 대대로 지방 성직자를 지냈었다. 그의 할아버지 미하일 이바노비치는 1830년부터 펜자 지방의 고로디쉬첸스키 지역에 있는 케렌카 마을에서 사제로 재직하기도 했었다. 케렌스키(Kerensky)라는 성은 이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정작 케렌스키 자신은 이 마을을 같은 펜자주에 있는 케렌스크(Kerensk)라는 카운티 마을과 연관시켰다. 미하일 이바노비치의 막내 아들이자 향후 케렌스키의 아버지가 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케렌스키는 펜자 신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그의 형인 알렉산더와 그레고리처럼 사제가 되지는 않았었다. 이후 그는 신학 및 지역 학교에서 6년 동안 일한 후 카잔 대학의 역사철학학부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후 카잔의 여러 교육 기관에서 러시아 문학, 교육학 및 라틴어를 가르쳤다. 카잔에서 표도르는 카잔군정청의 지형 국장의 딸인 나데즈다 에들러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 쪽에서 에들러는 러시아-독일 출신의 귀족 여성이었고 어머니 쪽에서도 그녀는 농노가 폐지 된 후 나중에 부유한 모스크바가 된 농노의 손녀였었다. 사후 그는 그의 손녀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이로 인하여 어머니 쪽에서 케렌스키의 유대인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혁명 이전 시대와 현재까지 반유대주의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퍼졌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모두 거짓으로, 대부분 케렌스키의 음해를 위해 만들어진 소문으로 밝혀졌다. 이후 1881년, 울리야놉스크에서 케렌스키 가족의 첫번째 아들인 알렉산데르 표도르비치 케렌스키와 페도르 쌍둥이가 태어난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들인 만큼 쌍둥이는 부모님의 전적인 사랑을 누렸다. 하지만 이런 사랑과는 별개로 케렌스키는 어렸을 때 그는 대퇴골 결핵을 앓았다. 수술 후 케렌스키는 침대에서 6개월을 보내야했고 오랫동안 금속 단조 부츠를 벗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하여 본래 멀리 하였던 엄청난 량의 책들을 6개월 동안 계속해서 읽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이 회고하길, 이 기간은 자신에게 어려워졌지만 병에 걸리기 전에 스스로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을 수 있었기에 오히려 좋았다고 회고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후 결핵은 1887년경 마침내 가라앉게 된다. 1889년 5월 아버지 표도르가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학교 감독관으로 임명되며 가족과 함께 타슈켄트로 이사를 갔다. 8세의 케렌스키는 부지런하고 성공적인 학생이었던 타슈켄트 중등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이 명성은 계속해서 끊이지 않아 중등학교에서 케렌스키는 예의 바른 청년, 숙련된 댄서, 유능한 배우로 명성을 얻었을 정도였다. 그는 특히 니콜라이 고골의 연극인 <검사>의 클레스타코프의 역할을 하면서 연극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일부 아마추어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1899년 케렌스키는 타슈켄트 중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역사 및 철학 학부에 입학한 후 법학부로 편입하게 된다. 변호사 시절과 초기 정치경력대학을 졸업한 이후인 1904년 12월, 그는 변호사 N. A. 오펠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1905년 1월 9일 변호사 협회에서 만든 피해자 지원 위원회에 참여하여 1905년 10월부터 무장 봉기 조직이 발간하기 시작한 혁명적 사회주의 회보인 <부레베스트니크> 에 글을 썼다. 허나 <부레베스트니크>의 여덟 번째 호가 정부당국에게 입수되었고, 연달아 12월 23일 케렌스키의 아파트에서 그 "무장 봉기 조직"의 전단과 자기 방어용 리볼버가 발견되었다. 결국 수색 결과로 케렌스키에게 사회주의 혁명 투쟁부대 소속이라는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고, 케렌스키는 1906년 4월 5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구금 센터에서 미결 구금되었다. 처음에 그에 대한 혐의가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구금 기간인 14일이 끝난 후 케렌스키는 구금 상황을 명확히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방 법원의 검사 차장에게 편지를 제출했다. 허나 이가 기각되자 승복하지 못한 그는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후 첫 번째 두마 소집으로 인한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와 증거 부족으로 그는 석방되어 아내와 한 살 된 아들 올렉과 함께 타슈켄트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2년 가량이 지난 1906년 8월 중순에서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수있었다. 이후 1906년, 케렌스키는 사회민주당 소속의 변호사인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요청에 따라 정치변호인으로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여러 정치적 재판에 참여해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치범들을 변호하였다. 이후 1910년에는 마침내 정식으로 변호사가 되었다.[2] 변호사가 된 직후 그는 반정부 무장 행동으로 기소된 투르키스탄 사회주의 혁명가 조직의 재판에서 주요 변호인으로 참여하였고, 실제로 사형을 막는것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하여 아르메니아 혁명전선 당원들의 변호를 맡거나, 레나 대학살[3]을 조사하기 위한 공개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허나 이러한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25인 변호사 사건[4]에 연루되어 징역 8개월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는 최종적으로 8개월의 집행유예로 뒤집어졌다. 1912년 그는 사라토프주의 볼스크시를 지역구로 하여 제4대 러시아 제국 국가두마에 입성한다. 사회혁명당의 선거 보이콧 선언 이후 케렌스키는 당을 탈당해 1915년 부터 실질적으로 그가 이끌었던 트루도비키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1918년 사회혁명당이 사실상 와해 된 직후 트루도비키와 케렌스키 본인이 중심이 된 합당을 진행할때까지 사회혁명당과는 가까이 지내되 어느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한편 그는 순식간에 국가 두마에서 가장 유명한 좌파 정치가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는 강경한 정부에 대한 비판수위로 인한것이였다. 오죽하면 그가 라스푸틴을 비난한 직후 알렉산드라 황후는 케렌스키를 반역자로 처형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뛸 정도였다고. 이후 그는 예산위원회 예산위원으로 선출된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 혁명가였던 수하노프의 기본 작업 "혁명에 대한 메모"에서 혁명 이전에 케렌스키는 거리를 달리는 도중에 노면전차에 뛰어 드는 습관 때문에 "Fast"라는 별명[5]으로 보안 부서의 감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2월 혁명케렌스키의 투쟁은 이미 2월 혁명 중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것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첫날부터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7년 2월 14일, 케렌스키는 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에 당황한 제국 국가두마 의장 로지안코는 케렌스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음으로써 그의 연설을 중단시켰다. 의장에 질문에 대한 케렌스키의 답변은 바로 날라왔는데, 케렌스키는 그에게 "내 말은 고대 로마에서 브루투스가 한 일을 의미합니다."라고 답하였다. 1917년 2월 26일부터 27일까지 두마 회의가 자정에 중단된 후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를 선언하자 케렌스키는 2월 27일 두마 원로회의에서 차르의 명령에 따르지 말 것을 촉구했다. 같은 날 그는 장로회가 구성한 국가 두마 임시위원회 위원과 경찰에 대한 혁명 세력의 행동을 주도한 군사위원회 위원이되었다. 2월 동안 케렌스키는 봉기군들과 반복적으로 대화를 나눴으며 그들로부터 차르 정부에서 체포된 장관들의 석방을 들었고 정부 부처에서 압수한 돈과 비밀 문서를 받았다. 2월 혁명이 시작될 때 케렌스키는 트루도비키의 대표로서 사회혁명당과 연합하였으며 두마에서 창설된 혁명 임시 위원회 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 대표로 임명되었다. 또한 3월 3일에는 국가두마의 대표로서 같은 대표자들과 함께 미하일 대공을 찾아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게 만들어 러시아 제정에 완전한 종식을 알리는것에 공헌했다. 임시정부 법무부 장관과 전쟁부 장관러시아 공화국 총리브리치네 프라샤니에 계획여담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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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혁명당 소속 두마 의원들의 모임.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보였다.
- ↑ 이전까지는 N. A. 오펠의 조수라는 간판으로 사실상의 변호사 업무를 수행했었다.
- ↑ 레나 지역 금광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자 정부군이 이를 대량으로 진압한 사건. 정부군의 진압으로 인해 200명 가량의 노동자들이 사망하였다.
- ↑ 베일즈라는 유대계 우크라이나인이 12살 신학교 학생 유친스키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사건으로, 혁명운동에 연루된 유대인들의 기소연장을 위한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배경이 짙었다. 최종적으로 베일즈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해당 사건은 베일즈를 변호, 지지했던 25인의 변호사들에 대해 행정부가 행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을 한 사건이다.
- ↑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날쎈돌이" 정도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