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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공화국의 주요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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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대통령 선거 第10回大統領選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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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개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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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 1차 76.75% ▼ 7.37%p 결선 83.17% ▼ 5.08%p | |||||||
선거 결과 | ||||||||
후보 | ||||||||
1차 투표 | ||||||||
36.38% 14,068,254 |
19.30% 7,463,368 | |||||||
결선 투표 | ||||||||
54.02% 22,630,252 |
45.98% 19,262,106 | |||||||
당선자 | ||||||||
한인사회당 김대중 |
개요
1988년 5월 8일 치러진 대한공화국의 대통령 선거. 현직 대통령인 김대중과 현직 총리인 김종필이 좌우파의 후보로 격돌하였다.
배경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하게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은 61년 체제의 첫 좌파 정부를 구성하며 야심차게 개혁을 추진했다. 주39시간 노동제도가 도입되고 사형제도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송화강 이남 간도 지역의 영유권을 포기하며 중국 정부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각종 사업을 국영화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 추진되었다. 동시에 연립여당이었던 공산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민영 방송국을 개국하고, 정보화 사회 구축을 위해 미니텔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등 유연한 정책으로 초기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연준의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이 흔들리는 틈을 타 제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하여 수출에서 호황을 보면서 경제 정책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화와 원화의 평가절상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1986년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으며, 1985년 터진 옷로비 사건은 김대중의 도덕주의 정치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게다가 1986년 한국의 포경 사업을 반대하던 그린피스의 선박을 폭파시켜 사망자까지 발생하며 공산당이 고정훈 내각과의 연정 해소를 선언했고 좌파 진영에서 김대중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1986년 3월 16일 치러진 제26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에서 좌파는 과반 의석을 상실했고 김종필을 총리로 하는 우파 동거정부가 수립되었다.
김종필 내각은 초기에는 김대중 행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경제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KBS를 민영화하고, 금리를 6%에서 2.5%로 대폭 하락시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부동산값을 폭등시키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반대로 김대중은 이원집정부제의 원리에 따라 골치 아픈 내치 문제는 전부 총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상대적으로 사고가 날 위험이 없는 외교 관련 일만을 처리하면서 이미지를 회복시켜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린다.
여론조사
1차 투표
사회당과 공화당은 각각 김대중과 김종필을 후보로 추대했으며 공화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고 있던 민주당은 거산 정신의 비판적인 계승을 내세우며 이기택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이기택은 김종필의 예스러운 이미지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좌우 중도 유권자들의 표를 흡수했으나 선명하지 못한 정책으로 지지율 상승에 한계를 보였다. 1981년 대선과 달리 독자 후보를 출마시키기로 결정한 대한공산당은 김일성 전 국방부장관의 아들인 47세의 김정일을 내보내 신선한 이미지를 유도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공화당 내 극우 성향 의원들은 신생 정당인 재건공화당을 창당, 차지철을 후보로 추대하여 진정한 박정희주의의 복원을 내걸었다.
결과
제10회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대한공화국 전역 및 재외국민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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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김종필(金鍾泌) | 7,463,368 | 2위 |
19.30% | 결선 진출 | ||
2 | 김대중(金大中) | 14,068,254 | 1위 |
36.38% | 결선 진출 | ||
3 | 이기택(李基澤) | 7,045,728 | 3위 |
18.22% | 낙선 | ||
4 | 김정일(金正日) | 2,559,974 | 5위 |
6.62% | 낙선 | ||
5 | 차지철(車智澈) | 4,358,143 | 4위 |
11.27% | 낙선 | ||
6 | 김휘영(金揮英) | 436,974 | 8위 |
노동자 투쟁 | 1.13% | 낙선 | |
7 | 박복주(朴馥周) | 672,863 | 7위 |
환경당 | 1.74% | 낙선 | |
8 | 홍숙자(洪淑子) | 216,554 | 9위 |
대한여성권익회 | 0.56% | 낙선 | |
9 | 백기완(白基琓) | 1,848,440 | 6위 |
무소속 | 4.78% | 낙선 | |
계 | 유권자 수 | 50,663,402 | 투표율 76.75% |
투표 수 | 38,884,161 | ||
무효표 수 | 213,863 |
1차 투표에서 탈락할 위기까지 내몰렸던 김종필 후보는 여론조사보다는 높은 득표를 거두며 결선에 진출했으나 1위인 김대중 후보에 비해 크게 밀려있는 상태였다. 한편 공화당의 온건화 노선을 비판하며 대선에 출마한 극우 성향의 차지철 후보는 공산당의 김정일 후보도 앞서면서 돌풍을 일으킨다.
결선투표
1988년 대통령 선거 토론회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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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선 투표를 앞두고 김종필과 김대중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자 김종필은 토론회에서 기선 제압을 하겠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김종필: 시방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로 이 자리에 나온게 아닙디다. 임자와 나는 대등헌 후보로서 이 자리에 나와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슈. 땜시 임자를 대통령이 아니라 김대중씨라고 부르겄습니다. 알겄슈, 김대중씨? 김대중: 당신 말이 하먼 맞구먼, 총리 양반! |
하지만 김대중이 위와 같은 말로 반격하며 김종필은 본전도 못 찾았다.
결과
제10회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
대한공화국 전역 및 재외국민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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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김종필(金鍾泌) | 19,262,106 | 2위 |
45.98% | 낙선 | ||
2 | 김대중(金大中) | 22,630,252 | 1위 |
54.02% | 당선 | ||
계 | 유권자 수 | 50,663,402 | 투표율 83.17% |
투표 수 | 42,186,205 | ||
무효표 수 | 293,847 |
김종필 후보는 여론조사 상의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큰 표차로 패배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은 1988년 의회를 해산하여 조기 총선거를 시행했고 해당 총선에서 좌파 진영이 다시 과반 의석을 수복함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은 불과 2년만에 실권을 회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