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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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1968 2023, CC-0

개요

서부 유럽에 위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상세

상징물

국가


역사

프랑스 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1918년, 4년간의 전쟁 끝에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였으나 프랑스 국내가 받은 타격은 막대했고 극복 불가능했다. 청년 인구의 1/3이 사망하였고 전쟁 도중에 발행한 국채는 대규모 정부 부채를 발생시켰다. 어려운 경제 사정은 프랑스 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보수주의자 등 다양한 정파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프랑스 정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타파하기 위해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중심으로 한 중도좌파 연합과 레몽 푸앵카레를 중심으로 한 우파 연합을 결성한다. 1920년, 지속되는 경제난과 실업 속에 광산노동자 15,000여명이 파업에 돌입하였으나 우파 연합 내각은 이들을 모두 해고하는 것으로 답했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좌파 연합은 공화사회당-급진당의 의견 분열로 이렇다할 대응을 내놓지 못한다. 결국 무산 계급과 정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1925년 총선에서 이런 불만적인 상황을 등에 엎고 좌파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하나 브리앙 내각은 급진파와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으로 좌초되고 새 예산안은 통과조차 실패한다. 브리앙 총리는 1926년 7월 집권 10여개월만에 실각하며 정계 혼란이 가속화되었다.

한편 프로사르와 레옹 블룸을 중심으로 한 급진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세력을 불렸으며 1930년대에는 악시옹 프랑세즈, 르페소, 불의 십자단 등의 극우 집단도 등장한다. 극좌와 극우가 점차 의회에서 파이를 넓히던 도중 터진 1934년 프랑스 폭동은 중도파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를 사임시킨다. 후임 총리로 지명된 소방수 가스통 두메르그가 암살되고 우익강경파 피에르 라발이 총리직에 오르며 CGT, SFIO, 공산당 등 무산자 세력은 파업을 감행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940년 2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단 6주만에 독일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모리스 토레즈 공산당 서기장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좌익 세력은 "국민적 항전"을 표명하였고 프랑스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모리스 토레즈는 신변상을 이유로 당시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였던 미국으로 망명하며 프랑스에 남은 자크 뒤클로가 레지스탕스를 이끈다. 정치가 레옹 블룸, 작가 사르트르, 철학자 메를로퐁티 등 여러 지식인들도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며 좌익 저항운동은 범국민적 운동으로 번진다.

1944년, 미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동시에 프랑스 역시 해방된다. 모리스 토레즈 서기장은 미국 공산당 회의에서 프랑스를 국제공산당 혁명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강변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인다. 결국 1944년 6월, 프랑스 해방과 동시에 파리에 토레즈를 국가원수로, 레옹 블룸을 총리로 하는 "프랑스 사회주의 공화국 임시정부"이 출범한다. 1946년 1월,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는 당대회에서 "프랑스 노동자당" 결성을 결의하며 합당하였으며 국민투표에서 92.5%의 동의로 프랑스 인민공화국이 건국된다.

초기 ~ 1968년 혁명

1946년 5월 프랑스 노동당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인민공화국 장관회의 주석으로 선출된 모리스 토레즈는 1948년 10월까지 기 몰레, 레옹 블룸, 뱅상 오리올 등 중도좌파 인사까지 포함한 거국적 내각을 꾸린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와 좌파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이 거세졌고 여기에 전후 경제 처리 문제까지 겹치며 프랑스 정국은 미궁에 빠졌다. 1948년 10월, 공산주의자들이 포진해있던 프랑스 인민군이 친위쿠데타를 통해 기 몰레 등 중도좌파 지도자들을 긴급 체포하는 "10월 정변"을 감행하며 결과적으로 모리스 토레즈 일인 독주 체제가 강해진다.

모리스 토레즈는 폐허가 된 프랑스 사회를 수선하기 위해 그랑 무브망 베르 라방(프랑스어: Grand mouvement vers l'avant, 대약진 운동이라고 하기도 함)이라는 경제적, 사회적 운동을 일으킨다. 이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산업을 중공업으로 회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에 남아있던 귀족적, 부르주아적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밀 빽빽하게 심기, 비둘기 잡기, 해충 박멸 사업, 공용 식당 설치 등의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결과는 대실패로 돌아갔고 모리스 토레즈 정권은 큰 위기에 빠진다.

토레즈는 자신에 가해지는 노동당내 좌파의 압박을 타파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고도 불리는 그랑 레볼루시옹 퀼튀렐(프랑스어: Grande révolution culturelle)을 실시한다. 대약진 운동의 정신적 측면을 더욱 강조한 문화혁명은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문화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 노동당 내 좌파 숙청, 독일계 민족 박해, 플랑드르 진군, 네덜란드-프랑스 국경 위기 등을 포함한 정책이었다. 또한 광범위한 문화 정화 사업이 추진되어 "압제자 벨기에 왕실 문화 청산"을 목적으로 브뤼셀, 뤼뱅 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잿더미로 변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 공산당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토레즈는 미국의 에드거 후버 서기장을 "기회주의자"로 폄하하며 미불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이 공산화되고 영국은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국경을 바로 맞댄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의 공산당이 남부의 왕국에 패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리스 토레즈는 이것이 미국의 소극적인 지원 때문이라고 생각한 반면 에드거 후버 미국 서기장은 이것이 프랑스의 극단적인 정책 추구로 인한 반공 감정 태동 때문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1959년을 기점으로 미불결렬(프랑스어: Scission américano-française)이 발생해 공산주의 진영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1963년, 모리스 토레즈 주석은 건강 상의 이유로 사임하였으며, 지중해 요양 도중 사망한다. 뒤를 이은 자크 뒤클로 주석은 제한적인 사회 개방 조치만을 취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프랑스 인민공화국 내에서 문화 자유화에 대한 열망과 노동당에 대한 불만이 거세진다.

1968년 혁명과 노선 전환

1968년 가택 연금 도중 사망한 기 몰레 전 내무장관의 장례식은 약 20년간 이어진 노동자당 정권의 억압적인 정책을 규탄하는 집회에 불을 놓았다. 프랑스 노동자당 정부는 몰레 전 장관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장례식을 축소하려 하였으나, 파리 시민 30만명이 장례식에 몰려들며 기 몰레 장관의 장례식은 노동자당을 성토하는 시위 현장으로 변했다. 소르본 대학교 학생들은 대학교를 점령하였으며 파리 내에서는 거의 모든 거리가 시위대에 점령당했고 1968년 5월 말에는 프랑스 정부가 주요 도시에서 통제권을 모두 상실했다. 시위를 통해 도시를 점거한 시민들은 자치적인 코뮌을 설치해 정부와의 협상에 들어갔다. 자크 뒤클로 주석은 1968년 6월 사의를 표한다.

68년 혁명 정국에서 노동자당 내 대두된 세가지 세력은 다음과 같았다. 첫번째, 발레리 지스카르로 대표되는 관료 세력. 이들은 점진적 개혁만에 동의했으며 시위대가 제시한 개혁 개방을 거부했다. 두번째는 프랑수아 미테랑으로 대표되는 온건 개혁파 세력으로, 가장 큰 지지를 얻었으며 실용적인 공산주의 정책과 개혁 개방을 내세웠다. 세번째는 루이 알튀세르로 대표되는 노동자당 내 지식인 집단으로, 공격적인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온건 개혁파가 승리해, 1969년 노동자당 대회에서 미테랑이 총 1,454인(55%)의 동의를 얻어[1] 새 주석으로 선출된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정치적 개혁에는 미진하였으나 문화적, 경제적 개방을 내세워 시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미테랑은 고양이의 비유(프랑스어: parabole du chat)[2]를 들며 프랑스의 경직된 관료주의 사회를 대대적으로 개선한다. 브레즈네프 유라시아 대통령의 외교 정책인 랴즈랴드카를 받아들여 이른바 "핑퐁 외교"라 불리는 유라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또한, 시장 자유화를 통하여 프랑스에 외국인 자본을 대거 유치하고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여 프랑스 시장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하지만 미테랑의 이러한 노선은 빈부격차를 키우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1. 2위 지스카르(557표, 21%), 3위 알튀세르(530표, 20%), 4위 마르셰(97표, 4%)
  2. 1971년 5월 1일 노동절 대회에서 미테랑이 자신의 노선을 우화로 표현한 것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으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