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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 군사정변 七一一軍事政變 July 11 coup | |
평양 거리를 주행 중인 반란군 전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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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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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7월 11일 | |
장소 | |
대한국 평양, 남포 | |
원인 | |
항전파와 휴전파 간의 갈등 | |
교전군 | |
대한국 내각 대한국 국군 |
한인애국단 |
지휘관 | |
내각총리대신 박중양 국방대신 신태영 원수부총관 원수 송호성 육군참모총장 대장 이응준 제3집단군사령관 원수 이석화 제6야전군사령관 대장 채원개 제25예비기갑사단사단장 참장 홍사익 육군본부헌병감 준장 원용덕 |
제국익문사 독리 김구 제국익문사 사신 김원봉 제5야전군사령관 대장 권준 이화함대사령관 참장 손원일 제7보병사단사단장 참장 이준식 제2공정사단사단장 참장 최용건 |
병력 | |
원수부 육군본부 제3집단군 제6야전군 제25예비기갑사단 헌병대 |
제국익문사 제5야전군 이화함대[4] 제7보병사단 제2공정사단 |
피해 | |
21명 사망 47명 부상 전차 1대 격파[5] |
15명 사망 43명 부상 |
결과 | |
정변 성공 | |
영향 | |
김구 전시내각 수립 일본과의 전쟁 지속 |
당시 대한뉴스 보도 |
개요
제2차 벨트크리그 중인 1941년 7월 11일 대일 항전파 인사들의 사조직인 한인애국단이 임시수도인 평양에서 일으킨 쿠데타. 이 사건으로 인해 박중양 내각은 붕괴하였으며, 휴전파 세력들이 완전히 축출되었다. 쿠데타가 성조의 재가를 받으면서 주모자였던 김구를[6] 중심으로 한 전시내각이 수립되었고, 중추원에서 대일 항전을 재확인 하였다.
과거에는 신사정난, 또는 7.11 정난으로 불렸으나 88혁명 이후에는 7.11 군사정변으로 불린다.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단은 쿠데타이기는 하나 그 목적이 대일 항전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승전했다는 점, (성조의 상당한 압박이 있었지만) 종전 이후 민정이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 또한 상당수이다. 때문에 쿠데타로 규정된 지금에도 정난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박헌영 정권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휴전 여론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던 노동당 의원들은 쿠데타 당일 제국익문사 요원들에 의해 납치 되거나 중추원에 난입한 쿠데타군에 의해 억류되었으며, 반역죄로 기소되거나 황제에 대한 충성혈서를 써야했다. 이 난리통에서 간신히 피신에 성공한 박헌영은 일본의 박헌영 공작에 넘어가 박헌영 정권을 탄생 시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