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개화}} [[분류:개화/한국]]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border: 1px solid #ddd; width:100%; max-width:500px; text-align: center" | colspan="6" style="background:linear-gradient(120deg, #fff 5%, #000 5%, #000 9%, #fff 9%, #fff 10%, #000 10%, #000 14%, #fff 14%, #fff 15%, #000 15%, #000 19%, #fff 19%, #fff 81%, #CD2E3A 81%, #CD2E3A 90%, #0047A0 90%); color: #000" | [[파일:대한민국 국장 (개화).svg|30px|link=]] '''한국의 시기별 현대사''' |- | rowspan="1" colspan="1" width=30% style="background:#; color:#" | '''[[개화기 (개화)|{{글씨 색|#000|개화기}}]]''' | rowspan="1" colspan="1" style="background:#; color:#" | → | rowspan="1" colspan="1" width=30% style="background:#0047A0; color:#fff" | '''천금의 시대''' | rowspan="1" colspan="1" style="background:#; color:#" | → | rowspan="1" width=30% style="background:#; color:#" | '''대공황기''' |- |} {{목차}} ==개요== {{인용문1|아, 대한의 거리마다 새 아침의 빛이 가득하다. 전차가 질주하고, 전등이 밤을 밝히니, 백성들의 얼굴엔 희망이 넘친다. 배움의 길로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새 시대의 바람이 모든 것을 깨운다. 민국이여, 이 빛나는 길이 너의 영광이 될지어다.|이광수, 「민국 30년」}} '''천금의 시대'''(<small>the Golden Era / 千金時代</small>)는 [[한국 (개화)|한국]]에서 전반적으로 대전쟁기와 대전쟁 이후에 일어난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과 더불어, 갑신혁명 이래 정부에서 내걸은 표어인 서구화, 근대 시기의 낭만주의 등이 어우러지던 시기로, 당대를 살아가던 한국 대중들 입장에서도 혁명 이래 최고의 호황과 더불어 다양한 예술, 문화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세계대공황이 발생한 1929년까지 약 15년간의 시기를 천금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배경== 1884년 [[갑신혁명 (개화)|갑신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개화정부 (개화)|개화정부]]는 급진적인 서구화 및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국가 전반에 걸쳐 30여년간 서구 기술과 제도의 도입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히였다. 또한 제1차와 제2차 극동전쟁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국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해 중국과 러시아를 제압한 결과,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다음가는 준열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기존의 한영동맹에 따라 협상국의 편으로 대전쟁에 참가하였다. 한국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칭다오 전투 (개화)|교주만에 대한 공략전]]에 참가하여 교주만을 점령하는 등 동맹국과 직접적인 충돌을 벌였으나 그 규모는 매우 작았다. 대전쟁의 주전장은 유럽이었고 머나먼 극동에는 그 포화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 덕에 한국은 전장으로부터 헌 발짝 비껴서서 대전쟁의 피해는 입지 않고 대전쟁의 이익만을 취하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의회정치의 안착== 선거제 개혁으로 참정권 확대 ==사회의 변화== <div style="margin: 0px 0px -5px 0px"><big>'''• 서구적 가치관의 확산</big>'''</div> {{인용문1|민권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연의 권리로, 누구도 이를 침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은 권리를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권리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다. 고로 민권의 창달은 단지 법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스스로의 존엄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된다. |[[안중근 (개화)|안중근]], 1928년 [[평양민국대학교 (개화)|평양민국대학교]] 강의 중}} 서구적 가치관은 한국에서 19세기 말 갑신혁명과 민국창건, 개화정부의 급진적 개화정책 등을 거치며 점차 유입되기 시작했지만, 천금의 시대 동안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교류 확대와 경제와 전반의 변화와 맞물려 발생했으며, 전텅적인 유교적 가치관과는 차이가 있는 새로운 사회적 인식을 형성했다. 이러한 가치관의 확산은 민주주의, 개인주의, 평등사상, 여성의 권리, 과학적 사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와 의회정치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참정권 확대화 대중의 정치참여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천금의 시대동안 한국이 의회정치의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신여성'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계층을 만들어냈고, 자유로운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여성 권리 증진과 여성 참정권 운동이 전개됐다.<ref>의회민주주의의 발전은 <의회정치의 안착> 항목에서, 여성권 운동에 대한 내용은 <사회운동의 대두> 항목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ref> 과학적 사고방식과 실증주의의 확산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였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해 사회적, 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려 했으나, 서구적 과학기술과 이론이 유입되면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핟문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산업화와 경제 정책에서도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서구적 가치관의 확산의 반대급부로, 기존의 유교적 질서는 힘이 크게 꺾였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공공연히 유교를 폄하하였고, 이승만 등 일부 기독교도 출신 정치인들은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 윤리를 토대로 한 서구적 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입국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도시에서 서구 사상의 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도시 지역에서는 기존의 유교적 질서가 붕괴하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골 지역에서는 옛 유교적 질서가 상당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도시의 자유주의적 신질서와 농촌의 잔통적 구질서 사이의 충돌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big>'''• 중산층의 증가</big>'''<br>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 사회는 전통적인 농민-양반 계층 구조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적 계층, 즉 중산층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중산층의 형성은 주로 산업화와 경제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한국 경제가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기술자, 공장관리자,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 등과 같은 새로운 직업군이 나타났다. 특히 기계공업, 조선업, 철도산업 등 공업의 성장과 함께 기술직과 전문직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노동자 계층과는 구별되는 중산층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했다. 또한 금융업과 무역업의 발달로 인해 은행원, 회계사, 무역상과 같은 상업 분야의 전문직도 크게 증가했다. 교육의 확산 역시 중산층 형성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며 중등 및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이전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직업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술학교나 전문학교에서 기계공학, 농업, 상업 등을 배운 졸업생들은 공공기관, 기업체, 학교 등에서 근무하며 전문성을 가진 새로운 계층으로 성장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여성 교육도 활성화되어 여교사, 간호사, 은행원 등 여성 중산층 직업군이 등장했다. 도시화는 중산층의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간기 동안 한성, 평양, 동래와 같은 도시들이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중산층이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전통적인 농촌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생활 방식이 나타났는데, 중산층 가정은 근대적 주택에서 생활하며 전기, 수도, 가구 등 당대의 기준으로는 혁신적인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했다. 이들은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현대적인 문화와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카페나 극장 같은 장소에서 여가를 즐기는 등 새로운 소비 문화를 주도했다. <div style="margin: -10px 0px -3px 0px"><big>'''• 교육의 확산과 고도화</big>'''</div> <div style="margin: 0px 0px 0px 0px"><table style="float:left; font-size: 10pt; margin:8px; width: 333px"><td style="border:1px solid #CCC; background:#F8F8F8; text-align:center" class="dark:bg-evewiki-020 dark:!text-white"><div style="margin: 4px 4px 2px 4px">[[파일: 대성학교.jpg]]</div><div style="margin: 0px 0px 1px 0px"> 1898년 평양에 설립된 대성중학교</div></td></table></div> 전국적으로 기술학교와 전문학교가 설립된 것은 산업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국은 철도, 조선, 전력, 기계공업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에 필요한 전문 기술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공업학교를 확충했다. 예를 들어, 평양과 한성에는 여러 대규모 기술학교가 설립되어 기계공학, 전기공학, 화학공학 등을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은 전국의 공장과 발전소, 공공기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농업학교 역시 농업의 현대화와 농촌의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선진적 농업기술을 교육했다. 이러한 교육기관은 당시 한국이 자립적 산업국가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문교육 외에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교육 역시 강화되었다.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소학교와 중학교의 수가 급증했고, 이는 전체 문해율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청소년기 의무교육은 민족성을 확립하고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또한 교육의 정점이라고 할 수 았는 고등교육기관의 설립도 두드러진다. 1897년 한성민국대학교가 개교한 이후로 전국에 6개의 민국대학교가 추가로 개교하였고, 이는 한국 고등교육의 기초를 이루었더. 대학교에서 배출된 고학력의 졸업자들은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인텔리 계층이 되었고, 장래에 한국을 이끄는 사회지도층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국비유학생 선발을 텅해 매년 100명 이상의 학생이 서구 대학에서 유학하였고, 이들은 발전된 서구 학문을 한국에 들여오게 된다. 남녀 모두 교육기회 확댜의 혜택을 입었지만, 일부 교육 내용은 성별에 따라 달랐다. 남학생은 주로 수학, 과학, 공업기술과 같은 근대적이고 실용적인 과목을 중심으로 배우며 산업화의 기술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재로 양성되었다. 반면 여성교육은 초기에는 주로 가사나 가정과 같은 전통적 여성 역할을 강화하는 과목이 중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은 간호, 교직, 회계 같은 직업적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며 근대적 직업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얻었다. <div style="margin: 0px 0px -5px 0px"><big>'''• 인구의 성장</big>'''</big></div> {{인용문1|금년 본국 인구는 삼천만에 이르러, 이는 25년 전보다 배가 된 수치입니다. 현 추세를 유지할 경우, 금후 40년 내로 인구는 억 단위에 달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인구의 급증은 노동력 확보와 같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여지가 있으나, 말튜스<ref>맬서스 트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토마스 맬서스를 의미한다.</ref>의 논지에 의거하면 극심한 식량 부족과 같은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미리 대책을 강구함이 가할 줄 보고드립니다.|재무성 월례보고서, 1918년 12월}}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했다. 1910년에 2200만명이었던 한국 인규는 20년이 지난 1930년에는 그 두 배에 가까운 4200만 명에 육박해 있었다.<ref>이는 새로 병합된 영강 지역의 화인들은 제외한 수치다.</ref><ref>[[갑신혁명 (개화)|갑신혁명]]이 발생한 1884년의 인구는 약 1500만 명으로 추산된다.</ref> 수도 한성의 인구는 1910년 40만 명에서 1930년에는 107만 명까지 치솟았다. 이는 근대적 의료기술과 공중보건 체계의 도입, 농업생산성 향상, 도시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의료기술과 공중보건의 발전은 인구증가의 핵심 원인이었다. 서구적 의학과 위생개념이 도입되면서 전염병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졌고, 유아 사망률은 크게 감소했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근대적 병원을 설립하고 의학 교육을 통해 의료 인력을 양성했다. 이와 함께 백신 접종과 상하수도 건설, 위생 캠페인 등이 대중화되며 콜레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의 확산이 억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전통적으로 높은 유아 사망률과 감염병으로 인해 낮았던 인구 증가율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경제성장을 통한 생활수준의 향상과 각종 캠페인을 통한 식습관의 개선 등 역시 인구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인구의 전반적인 증가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곤강과 영양상태 역시 개선됐다. 신기술을 도입한 식량 증산과 국제무역을 통한 식량 수입의 증가로 식량의 수급이 안정화되었고, 곡식 위쥬의 전통적 식단이 각종 반찬들을 포함한 균형잡힌 식단으로 변화하면서 단백질과 비타민, 지방 등의 섭취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 덕분에 구루병과 야맹증 등 영양결핍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들의 발병률이 크게 감소했다. 또한 정부 주도의 소학교 급식제도가 도입되고<ref>[학교급식법, 1915년 제정]<br>유럽에서의 대전쟁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는 것을 본 한국 정부는 유사시 균인으로 징집가능 여부를 판뵬하기 위해 청년층 남성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신체검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상당수의 청년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체격을 가진 것을 확인한 정부는 청소년들의 영양상태와 발육을 개선하기 위해 소학교에서 급식제도를 도입했다. 빈곤층 학생들에게는 무상으로, 그 외의 학생들에게는 저가 유상으로 제공됐다.</ref> 이것이 전국의 소학교에서 시행되었다. 각 학교에 영양사가 파견되어 정부의 지침에 따른 <s>맛은 보장하지 못해도</s> 영양학적으로 균형잡힌 급식을 학생들에게 제공했고, 성장기 어린이에게 필요한 칼슘과 단백질 등의 영양소 공급이 원할해지면서 청소년들의 영양과 발육상태가 큰 폭으로 개선되었다. <div style="margin: -10px 0px -3px 0px"><big>'''• 도시의 성장</big>'''</div> <div style="margin: 0px 0px 0px 0px"><table style="float:left; font-size: 10pt; margin:8px; width: 333px"><td style="border:1px solid #CCC; background:#F8F8F8; text-align:center" class="dark:bg-evewiki-020 dark:!text-white"><div style="margin: 4px 4px 2px 4px">[[파일: 경성 거리.png]]</div><div style="margin: 0px 0px 1px 0px> 한성 명동거리</div></td></table></div> 한국의 도시 증가는 산업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공업화의 촉매제가 되었고, 전간기 동안 철강, 기계공업, 조선업 등의 주요 산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다. 한성, 평양, 동래, 인천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는 공업과 상업의 허브로 성장했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교통망과 통신망이 확충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산업도시와 무역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광업과 중공업 중심의 흥남, 울산, 송림, 포항과 같은 도시들과 무역으로 흥한 목포, 남포, 군산,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대전 등이 그 예이다. 이외에도 나주, 대구, 의주, 함흥 등의 전통적 지역중심지들도 공업도시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의 과잉 인구를 흡수하며 노동력을 제공받았고, 이는 도시로의 인구 이동을 가속화했다. 도시의 확장돠 성장은 시 정부와 부 정부가 주도한 인프라 정비사업의 증가를 불러왔다. 전통적으로 궁궐과 관청 주변에 형성된 도시들은 공업화와 교통의 발전에 따라 그 중심이 철도역 인근 등으로 이동하거나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한성은 철도와 전차망이 확충되며 중심지가 옛 한양도성 내에서 용산 등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근대적 주택과 초보적 형태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공시설과 상업시설이 확충되며 도시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문화의 부흥== {{인용문1|돈이 있는 곳에 문화가 있다.}} 천금의 시대는 1884년 갑신혁명부터 이어진 정부의 서구화 정책이 절정에 달한 한편, 대중문화 및 예술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당대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안정성과 자유도가 높았던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은 이러한 풍조에 불을 지른 격이 되었는데, 한편으론 과도기적 시대의 특징상 일부 측면에선 한국적인 특징이 나타나는 문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후대에서 "[[천금풍 (개화)|천금풍]]"으로 불리는 예술풍조가 자리잡는데에도 영향을 줬다. <big>'''• 영상매체</big>'''<br> 영화, 애니 1920년대는 한국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화 제작사로는 한성영화사, 조선영화주식회사, 동아영화사 등이 설립되어 국산 영화 제작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들 제작사는 초기에는 일본, 독일, 미국에서 도입한 기술과 장비를 사용했지만, 점차 한국 자체의 제작 기술을 발전시키며 독립적인 영화 산업을 구축했다. 특히 1922년에 개봉한 나운규의 <아리랑>은 대흥행에 성공하며 영화산업의 폭발적 성장의 신호탄이 됐다.<ref>오늘날 가장 유명한 아리랑 버전이 <아리랑> 제작 중에 작곡되어 영화의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됐다.</ref> 영화 상영 공간인 영화관도 이 시기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896년 인천에 설립된 최초의 영화관인 협률사를 시작으로 1914년에는 전국의 극장이 7개관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천금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수가 폭증, 1929년에는 전국에 총 22개 관의 영화관이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개꿈><ref>개를 의인화한 애니메이션으로, 사회풍자적 성격을 가졌다. 공개 당시에는 대중의 무관심 속에 묻혔지만 수십년 후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발굴되면서 각광받았다.</ref>과 같은 초보적인 수준의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 시작했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big>'''• 인쇄매체</big>'''<br> 라디오, 신문, 만화 제지기술의 발달과 상술한 제지업의 부흥으로 종이값이 하락하면서 신문과 서적 등의 인쇄매체가 널리 보급되었다. 신문사는 1910년 17개사에서 1920년 66개 사로 10년 사이에 4배 가까이 증가하였으며 신문 인쇄부수는 같은 기간동안 세 배 증가하였다. 신문의 확산은 정보 전달의 전국화와 소시민의 정치참여 증가에 기여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황색언론의 출현으로 가짜뉴스와 자극적 기사의 범람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엔 현재까지도 한국 최대의 출판사인 [[익문사(개화)|익문사]] 등 여러 대형출판사가 출현했우며 각종 서적 출판량도 수 배 증가하였다. 각종 전문서적과 기술서적의 발행 증가는 지식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며 외국의 문학과 철학, 사상서에 대중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시기다.<ref>이 시기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자본론 등의 사회주의 서적과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가 들어오면서 한국의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운동이 태동하였다. 후술된 사회주의 성향의 문인회인 [[카프 (개화)|카프]]도 이러한 시류 속에서 결성되었다.</ref> <big>'''• 음악</big>''' <big>'''• 식문화</big>''' <div style="margin: 0px 0px -5px 0px"><big>'''• 스포츠</big>'''</div> {{인용문1|한강변<ref>당시에는 한강에 모래사장이 있었다. 한강 백사장이 사라진 것은 1950년대 한강 정비사업 중의 일이다.</ref>에서 [[한성민국대학교 (개화)|우리 대학]] 여자배구부가 연습경기를 열었는데 인근 학교 남학생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더군. 왜일까?|[[백남운 (개화)|백남운]] 당시 한성민국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 근대적 스포츠의 도입은 학교 교육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축구는 서구식 교육과정을 채택한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체육과목의 종목 중 하나로 선정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ref>축구는 필요한 비품이 골대 두 개와 축구공이 전부이기에 적은 비용으로 수업할 수 있어 교육당국의 선호를 특히 많이 받았다.</ref> 이외에도 피구, 배구 등의 간단한 구기종목들이 정규 교육과정에 편입되었다.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일부 사립학교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농구, 야구, 펜싱 등의 종목이,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배드민턴, 테니스, 비치발리볼 등의 종목이 확산되었으나 대중화되는 수준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1921년부터는 매년 전국 각지의 [[민국대학교 (개화)|민국대학교]]의 축구대표팀 간의 축구 토너먼트(전국대학교축구대힝전)가 개최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으며, 이와 함께 대학교별 학생응원단도 생겨났다. 정부 역시 체육의 발전을 위해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공립 종합움동장이 건설되었고 매년 중앙정부의 대한체육회 주도 하에 전국체전이 개최되었다. 뿐만아니라 정부는 1917년 대한올림픽위원회를 설립하고 한국 체육인들의 국제무대로의 데뷔를 후원했다. 한국의 올림픽국가대표팀은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이후 모든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국제 대회 경험은 스포츠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여러 기업들은 광고 효과를 노리고 여러 스포츠구단을 인수하거나 후원하였고, 이를 통해 유입된 자본 덕에 전문 운동선수와 프로 스포츠단, 스포츠 산업이 태동하였다. <div style="margin: -10px 0px -3px 0px"><big>'''• 의복</big>'''</div> <div style="margin: 0px 0px 0px 0px"><table style="float:left; font-size: 10pt; margin:8px; width: 330px"><td style="border:1px solid #CCC; background:#F8F8F8; text-align:center" class="dark:bg-evewiki-020 dark:!text-white"><div style="margin: 4px 4px 2px 4px">[[파일: 정자옥 광고.png]]</div><div style="margin: 0px 0px 1px 0px"> 한국 최초의 양장점인 정자옥의 의류 광고 </div></td></table></div> 천금의 시대 동안 한국인의 의복은 크게 변화했다.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불리게 만든, 흰 색으로 염색한 한복은 점차 사라지고, 서양식 의복과 개량된 한복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남성복에서는 한복과 서구식 정장의 조화가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났아. 도시의 중산층 남성들은 주로 정장과 모자를 착용하며 근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추구했으며, 관공서와 회사에서는 양복이 필수 복장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개량한복이나 셔츠와 함께 빵모자(플랫캡)를 쓰는 문화도 생겼다. 또한 상황에 따라 한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거나 둘을 혼합해 착용하기도 하였다. 남성용 개량한복의 경우, 과도하게 넓었던 소매가 좁아지는 등이 변화가 생겼다. 한편 여전히 잔통적 문화가 상당히 남아있던 농촌에서는 한복을 변형해 실용성을 높인 작업복 스타일이 등장하며 의복의 기능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인용문1|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독특한 패션 감각을 지녔더군, 특히 젊은 여자들이 말일세. (중략) 상당히 도발적인 패션이지 않은가? 이곳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윌리엄 V. 프레트<ref>미 해군 장교로, 일본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편지를 쓴 당시에는 한국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된 상태였다.</ref>,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여성 의복은 전통 한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개량이 이루어져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했다. 치마 길이는 크게 짧아지고 간소화된 저고리는 몸에 더 밀착되며 실루엣이 강조되는 디자인이 유행했다. 이는 여성의 활동성을 높이는 실용적 변화로도 설명되었으나, 동시에 현대적 미와 여성적 매력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더 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여성상이 아닌 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한편, 서구적 패션 요소도 여성복에 점차 영향을 미쳤다.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블라우스나 치마, 모자와 같은 아이템이 인기를 끌었다. 저고리와 치마에 레이스나 새틴과 같은 서양식 장식이 더해지거나, 양말과 하이힐 같은 서구적 아이템을 한복과 함께 혼용하는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div style="margin: 0px 0px -5px 0px"><big>'''• 문학</big>'''</br> {{인용문1|문학이란 게 참 묘하지 않습니까?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낭만이니 현실이니, 온갖 사조의 이름이 머릿속을 가로지르더군요. 어떤 이들은 사랑을 찬미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가난을 절규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 모두가 인간의 안간힘으로 보입니다. 삶을 붙잡으려는 낙관주의의 손길이나, 그 삶의 부조리를 까발리려는 신경향파의 손길이나 결국은 하나의 몸짓이지 않겠습니까. 그 틈에서 나는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는 그렇게 쓰고자 하는지 홀로 묻고 있습니다. 사영<ref>사영은 구본웅의 자(字)다.</ref>, 당신의 붓끝이 그리는 선처럼 나도 내 글로 세상의 선을 그릴 수 있을까요?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이상이 구본웅에게 쓴 편지 중 일부. 당대 문학의 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대 한국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사조는 낭만주의와 낙관주의였다. 이러한 문학적 경향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근대적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이 사조를 따른 주요 문인으로는 [[이광수 (개화)|이광수]], [[최남선 (개화)|최남선]], [[김동인 (개화)|김동인]], [[이상화 (개화)|이상화]], [[김억 (개화)|김억]] 등이 있다. 특히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자 국가발전에 대한 열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정》을 완성하여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이끌었으며, 김동인은 100냔 후의 유토피아적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아름다운 나라 (개화)|《아름다운 나라》]]를 집필해 한국의 첫 SF소설을 만들어냈다. 당대 낙관주의 문학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은근히 민족주의적, 애국주의적 뉘앙스가 작품에 내포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낙관주의가, 빛나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민국은 지나([[중국(개화)|중국]])<ref>당시 민간에서는 중국을 보통 지나(支那)라고 불렀다.</ref>나 아프리카 등과 달리 문명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는 사회진화론적 우월감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작품들도 등장했다. 경제적 호황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경제적 번영 속에서 풍요로움과 자유를 탐구했으며, 인간의 욕망과 관계를 과감히 다루는 경향도 나타났다. 도시 중산층의 형성과 소비문화의 확산은 인간의 사랑과 자유연애, 원초적 욕망 등을 다루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다룬 대표적인 문예동인지로는 자유주의, 낭만주의 성향의 잡지 《폐허》가 있으며, 염상섭, [[변영태 (개화)|변영태]]<ref>훗날 외무성총판을 역임하는 외교관 변영태가 맞다.</ref>, 김일엽 등이 해당 잡지에 시와 소설 등을 연재하였다. 다만 이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퇴폐적이고 저급하며 사회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당시 비주류 문학이았던 신경향파 문학은 낙관주의, 퇴폐주의 문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도시 빈곤층의 고통과 산업화의 부작용을 묘사하며,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비판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현진건 (개화)|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작품은 도시 빈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산업화 이면의 어두운 현실을 조명했다. 신경향파 문인 중 [[최서해 (개화)|최서해]], [[한설야 (개화)|한설야]] 등 일부는 사회주의 문인으로 변신해, 프로문학<ref>프롤레타리아 문학</ref> 단체인 [[카프 (개화)|카프]]를 조직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문학은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각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통해 계급적 갈등과 약자의 연대를 강조했지만, 이는 1920년대 문학계에서 비주류, 소규모의 흐름으로 남았다.<ref>프로문학이 국민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류 문학사조로 떠오른 것은 대공황이 발생한 1929년 이후의 일이었다.</ref> '''<big>• 천금풍</big>''' <div style="margin: -10px 0px 10px 0px">[[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20px|link=]] 이 항목의 본문은 [[천금풍 (개화)|천금풍]] 문서입니다.{{글씨 색|transparent|.}}</div> 천금풍은 천금의 시대 당대의 문화나 그를 다루는 이후 시대의 대중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금풍을 따르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낭만주의, 퇴폐주의적인 경향을 띄며 동시에 전통문화와 서구문화, 전통사상과 개화사상, 구질서와 신질서가 뒤섞인, 조금은 혼란하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쳔금풍의 하위 장르로는 로맨스물, 전쟁물, 첩보물, 대체역사물 등이 있어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주제로 다뤄진다. ==외부로의 진출== <big>'''• 서구 열강과의 관계</big>'''<br> <big>'''• 북방으로의 진출</big>'''<br>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20px|link=]] [[만주 출병 (개화)|만주 출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big>'''• 중일과의 줄다리기</big>'''<br> ==황금의 그림자== 천금의 시대가 한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황금기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황금의 찬란한 빛이 닿지 못하는 어두운 그림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도시와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업과 농촌은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노동자는 분명히 힘든 일자리였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다. 이로 인해 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고 농촌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하락했다. 이런 이촌향도 현상은 식량문제와 도시빈민문제를 야기했으며, 식량문제는 급격한 통화량 증가와 더불어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div style="margin: 0px 0px -5px 0px"><big>'''• 농업·식량문제</big>'''</br> {{인용문1|본 총판은 현재 식량 가격의 지속적 상승과 이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 경제 전반의 불안정을 심각히 우려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을 중추원에 상정하고자 합니다. 식량 가격의 등귀는 비단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비 상승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는 임금 인상 압력을 초래하여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경공업에 막대한 부담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전반에 물가상승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농촌 생산성의 정체로 인한 양곡 부족 현상이 지속된다면, 도시노동자의 역도시화 현상마저 초래될 위험이 있는바, 이는 공업화를 국가발전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정부 정책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문제라 할 것입니다. 이에 농림성은 정부가 양곡을 직접 수매하여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양곡가를 조절하고, 동시에 농촌에 대한 생산성 증대를 위한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관개시설 확충, 현대적 농기계 보급, 농업기술 교육 강화 등을 통해 농촌 생산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오니, 추가경정예산안의 신속한 편성과 승인으로 민생안정과 민국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농림성총판 ○○○, 중추원 보고}}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농촌의 청년 인구 증가가 정체되변서 식량 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더군다나 국가 전체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식량 생산량에 비해 그 식량을 필요로 하는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전반적인 식량 가격은 상승세를 그렸다. 이는 전체 소득에서 식료품 소비비의 비중이 높은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식량부족과 식량가격의 상승은 정부 당국과 경제계에게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식량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들의 생활비가 상승해 임금 증가 압력이 생기고, 이는 값싼 노동룍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타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또한 식량가격의 상승과 이에 따른 임금의 상승은 사회 전반에 걸친 인플레이션을 촉발해 정부의 경제관리에도 큰 어려움을 줄 것이었다. 게다가 심한 경우 농민 소득과 도시노동자의 소득역전이 발생해 도시노동자가 농촌으로 돌아가는 역도시화 현상까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공업국가화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에게 있어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한편 정치인들에게 있어서도 식량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민중의 생활비 압박은 자신들의 표에 직결되는 사안이었기에 정치인들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에 자본을 투입하여 '산미증식계획'이라는 이름의 영농개혁에 착수했다. 농회, 산업조합, 산림회, 금융조합 등을 통합하여 [[농업협동조합 (개화)|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만들고 그 산하에 농협은행을 설립해 농민들에게 저금리로 대출을 제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국내 기계공업계와 화학공업계로부터 각종 영농기계와 화학비료를 도입하여 농업의 효율성을 제고, 식량증산을 이룩하는 것이 정부 정책의 골자였다. 또한 양곡관리법을 제정, 국가가 적정가격으로 양곡을 수매해 저가로 도시 시민들에게 공급하였다.<ref>이로 인해 정부의 재정부담이 증가하였으나, 당시 국가 전반적인 경제 활황으로 세수가 증가했기에 정부는 이를 부담할 여력이 충분했다.</ref> 정부 정책의 결과로 전반적인 식량 생산은 증가하였다. 호남과 해서, 관서 지방 등 비옥한 토지를 가진 지역에서는 농업이 노동집약적 영농에서 자본집약적 영농으로 전환되고 근대적 부농이 탄생하였다. 또한 도시 지역에서는 양곡가격이 하락하면서 전반적인 식량가격도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제한된 경작지 면적에 비해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기에, 식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이 훗날 곡창지대인 만주를 확보하기 위한 [[만주 출병 (개화)|만주 출병]]을 단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div style="margin: 0px 0px -5px 0px"><big>'''• 도시빈민문제</big>'''</br> {{인용문1|본 의원은 중추원 빈민가조사위원회의 임무로 한성 남대문 바깥 빈민촌을 조사하였으며, 그 참상은 참으로 기록하기조차 부끄러운 바입니다. 주민들은 판잣집에 몰려 거주하며, 비가 오면 지붕은 새고, 배수시설이 없어 진흙탕 속에서 생활합니다. 위생상태는 더욱 심각하여 상하수도 시설이 전무하며, 하천은 오물로 뒤덮여 있고, 전염병이 만연하여 아이들은 여전히 비위생과 병마 속에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치안이 극도로 열악하여 절도, 폭력 사건이 빈발하고 있으니, 이는 단지 빈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와 중추원의 문제라 할 것입니다. 본 의원은 즉시 주거환경 개선과 공중위생시설 확충을 위한 정부 차원의 긴급대책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중추원의원 겸 빈민가조사위원회 의정 [[손정도 (개화)|손정도]], 1927년 9월 16일 중추원 보고}} 도시 빈민의 주거 문제는 당시 도시화의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였다. 한성, 평양, 동래와 같은 대도시에는 급격히 증가한 인구를 수용할 적절한 양과 질의 주택이 부족했으며, 이에 따라 빈민들은 판잣집이 즐비한 달동네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임시 주거지는 제대로 된 건축 자재 없이 조립된 경우가 많아 안전성이 크게 떨어졌고, 화재와 붕괴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또한, 공간이 협소하고 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다세대 가족이 밀집해 생활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주거 문제는 도시 빈민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주거 환경의 열악함은 도시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대부분의 빈민지역은 상하수도 시설이 부족하거나 전혀 없는 상태였으며, 쓰레기와 오물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는 하천 오염과 전염병 확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판자촌에서는 특히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질병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위생설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도시 빈민들은 이러한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열악한 주거환경은 치안문제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빈민가에서는 절도, 폭력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공권력의 개입도 제한적이었다. 경찰력이 빈약한 상황에서 이러한 지역에 종종 법의 사각지대가 생겨 우범지대가 되었다. 우범지대의 출현은 도시 전체의 치안에 악영향을 주었다. 정부도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단기대책과 장기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였다. 정부의 단기대책으로는 위생시설 설치와 경찰력 추가 배치가 있다. 정부는 각 지방정부를 지원해 빈민촌에 간이 변소와 샤워장을 설치하고 급수차를 파견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빈민가에 기존보다 더 많은 경찰인원을 배치해 빈민가의 치안 문제를 누그려트리려 하였다. 이 덕에 문제의 심각성은 역화되었지만 일시적인 해법이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빈민촌을 철거하고 공동주택을 건설해 빈민촌 거주민들을 수용하는 장기대책을 채택했다. 공동주택에는 최소한의 상하수도가 갖춰져 있었기에 위생문제가 적었고, 공동주탹의 특징 덕에 범죄율오 하락했다. 다만 정부의 공동주택 공급량은 언제나 수요량에 미치지 못했고, 빈민촌 철거가 상당히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정부의 도시빈민촌 대책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big>'''• 물가문제</big>'''<br> ==사회운동의 대두== 천금의 시대 동안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에 힘입어, 각계각층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보수성향 일간지 [[경향신문 (개화)|경향신문]]은 1922년 3월 16일호 사설에서 이러한 운동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4대 운동'이라고 이름붙였는데, 각각 노동운동, 농민운동, 참정운동, 여성운동이다. <div style="margin: -10px 0px -5px 0px"><big>'''• 노동운동</big>'''</br> {{인용문1|오늘날 우리 대한은 일찍이 경험치 못한 경제적 부흥을 맞이하였으니, 이를 가히 황금기라 칭할 만하다. 허나, 이 모든 영화는 묵묵히 땀 흘리는 근로 대중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였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물질적 풍요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노동신문》<ref>전국노동총동맹의 기관지</ref> 의 1925년 7월호 평론}} 이 시기는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처음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었고,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직면하면서 집단적인 행동과 조직화를 통해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은 공업화가 진행되던 대도시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주로 발생했다. 한성, 대구, 함흥, 동래와 같은 대도시의 공장과 조선소, 철도와 같은 대규모 산업현장에서 근로자들은 저임금과 가혹한 작업환걍에 시달렸다. 이러한 환경은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의 불씨를 키웠으며, 초기에는 각 사업장 단위로 임금 인상과 근로 시간 단축 같은 구체적 요구를 중심으로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1920년대 원산 지역의 노동조합 연합체였던 원산노동연합회<ref>당시에는 전국단위의 산별노조가 없었고 그 대신 지역별로 노조 연합체가 있었다. 전국적 산별노조가 이를 대체한 것은 대공황 이후인 1930년대 초반이다.</ref>가 근로재해 보상을 요구하며 일으킨 1923년 원산 파업은 '전형적인 1920년대 방식'의 노동쟁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은 점차 조직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의 결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파업뿐 아니라, 집회와 토론회, 근로자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노동계의 단결력을 강화했다. 노동운동은 주로 한인사회당 소속 정치인들과 좌익 계열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근로자들의 법적 권리와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ref>이와 맞바꾸어 노동조합은 한인사회당 등 좌익 세력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ref> 1925년에는 전국적인 노동운동 조직인 전국노동총동맹(전노맹)이 결성되었다. 전노맹은 전국의 주요 산업 부문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으나 조직이 느슨하여 내부 분열이 심했고 결국 얼마 못 가 여러 단체로 쪼개진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열강인 소련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 경향을 띄기도 했다. 이 시기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단순히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 노동계급의 해방을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출신 일부 [[한인사회당 (개화)|한인사회당]] 의원들을 필두로 혁명적 사회주의 계열의 급진파 노동지도자들이 등장헸다. 이러한 일부 급진적 노동운동은 기존의 시장지본주의 경제구조 뿐만 아니라 수정주의적 노동운동까지도 비판하며 근로자들의 계급투쟁과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급진파 노동운동세력에 대한 대중의 비토와 정부의 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급진파 노동운동은 1920년대 내내 비주류에 머물렀다. 따라서 당대 노동운동의 주도권은 노동운동과 민주적 절차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던 온건파가 잡았다. 이러한 구도는 훗날 경제대공황과 사회혼란으로 인해 붕괴하게 된다. <div style="margin: -10px 0px -3px 0px"><big>'''• 농민운동</big>'''</div> <table style="float:left; font-size: 10pt; margin:8px; width: 330px"><td style="border:1px solid #CCC; background:#F8F8F8; text-align:center" class="dark:bg-evewiki-020 dark:!text-white"><div style="margin: 4px 4px 2px 4px">[[파일: 목포소작쟁의.jpg]]</div><div style="margin: 0px 0px 1px 0px"> 동아일보에 보도된 신안 농민쟁의 </div></td></table> 한국의 농민운동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지키며 농촌 지역의 권익을 보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은 개화정부의 토지개혁으로 비교적 평등한 토지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농민들은 농업 생산성의 불균형, 농촌 지역의 빈곤,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등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촌 지역에서는 농업의 기계화와 상품화가 진행되었지만, 이에 따른 이익은 모든 농민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업경영이 이루어졌지만, 많은 중소농들은 농업기술의 부족과 자연재해,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도시로의 인구 유출로 인해 농촌 노동력이 감소하며 농업의 생산기반이 약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농촌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자극했다. 1920년대 중반에 결성된 [[전국농민회총동맹 (개화)|전국농민회총동맹(전농)]]은 농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전농은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그들의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고, 농업 현대화를 촉진하며, 농촌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조직은 지역 농민회와 연계하여 농업기술 교육, 농산물 유통 개선, 협동조합 설립 등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전농은 또한 정부와 협력하거나 때로는 비판하며 농업 관련 정책에 농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당시 전농은 노동조합들과는 달리 중앙정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좌익 성향을 가진 노조들과는 달리, 당시의 전농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다. 왼쪽으로는 사유재산 철폐와 협동농장 도입을 부르짖는 혁명가부터 오른쪽으로는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 농업사회 복원을 지지하는 반혁명가까지 분포해있어서, 전농 조직원들의 공통점은 농본주의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ref>전농이 현재와 같은 강경좌파 색채를 띄게 됰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ref> 이로 인해 농민들은 노조와 달리 정치조직화에 실패했고, 장기적으로는 농민운동의 침체를 초래한다.<ref>이후에 전농은 농민의 절대적 수가 감소하고 내부의 여러 정파가 차례로 이탈하면서 서서히 힘을 잃게 된다.</ref> <big>'''• 참정운동</big>'''<div style="margin: 0px 0px 10px 0px">[[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20px|link=]] [[한국의 선거법 개혁 (개화)|한국의 선거법 개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글씨 색|transparent|.}}</div> 천금의 시대 동안 참정권은 서서히 확대되었다. 1884년 [[갑신혁명 (개화)|갑신혁명]]으로 개화당이 개화의 깃발을 내걸고 집권한 이래로, [[개화당 (개화)|개화당]]이 주도하고 [[보수당 (개화)|보수당]]이 견제하는 구조의 과도정부였던 [[개화정부 (개화)|개화정부]]가 선거 없이 계속해서 나라를 통치했다. 이는 개화당이 장기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봉건국가에서 곧바로 의회정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개화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입된 개화사상을 대중에게 확산시켜 봉건신민을 근대국민으로 탈바꿈시킨 뒤 선거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1906년부터 [[임시중추원 (개화)|임시중추원]]을 개원해 형식적으로는 의회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개화지식인들과 개혁파 관료들의 과두정이었다.<ref>개화정부도 임시중추원이 제대로 된 의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임시' 중추원이라고 명명했다. 임시중추원은 현재의 중추원과 다른 조직으로 인식되며, 임시중추원 의원 선거 역시 현대 중추원 의원 선거와 별개의 것으로 분륟된다.</ref> 임시중추원은 선거권 확대에 관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갔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대중의 의견을 취합했다. 이후 초보적인 수준의 의회정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개화정부는 훗날 천금의 사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첫번째 해인 1914년에 [[제 1회 대한민국 중추원의원 선거 (개화)|제 1회 총선거]]를 실시하고 초대 중추원을 구성했다. 그 결과 [[개화당 (개화)|개화당]]이 중추원 단독 과반을 차지해 [[서재필 (개화)|서재필]]이 첫 민선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했다는 기념비적인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한국의 참정권은 완전한 보편참정권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1913년 제 1차 선거법 개혁으로 초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 대한 투표권을 얻은 이는 성인의 8%에 불과했다. 이는 1913년 선거법이 국세로 매년 직접세 5원 이상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녀에 한해서 선거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한편 피선거권은 직접세 10원 이상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부여됐다. 이로 인해 당시 8할 이상의 국민은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일부 민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참정권 확대운동이 확산되었다. 영국 유학생 출신인 [[안중근 (개화)|안중근]]<ref>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관료로, 내무성참판과 임시중추원 의원을 지냈다.</ref>이 펴낸 민권과 참정권의 확대를 주장하는 [[《삼천만 국민에게 고함》 (개화)|《삼천만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저서는 한국사회에 일대 파장을 일으켰으며, 1904년 설립된 민권운동단체인 [[일진회 (개화)|일진회]]와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주도 하에 '참정권 확대 백만인 청원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임시중추원 내에서도 [[손정도 (개화)|손정도]] 등의 [[개화당 (개화)#민중파|민중파]] 의원들이 참정권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이후 1918년에는 원래부터 참정권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민중파와, 그들과 손을 잡고 [[대한국민회 (개화)|대한국민회]]를 창당한 이승만이 선거권자의 납세조항 대폭 완화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개정안을 발의했고, 이것이 통과되면서 차기 총선부터 성인 남성의 6할에게 선거권이 부여됐다. {{인용문1|이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바라 마지않던 일이지 않는가. 오늘날의 법안을 당리당략을 따져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과 하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서재필 국무총리, 1918년 제 2차 선거법개혁안 표결을 앞두고 개화당 임시의원총회에서<ref>참정권 부여 대상을 확대하는 해당 법안이 가결될 경우 차기 총선에서 개화당이 국민회에 패배할 것이 유력했던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서재필의 몇몇 참모와 동료 정치인들은 당론으로 선거법 개혁안을 부결시키자 건의했지만 서재필은 위와 같이 말하며 이를 거부했다.</ref>}} 이후에도 참정권 확대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28년에는 제3차 선거법개혁이 이루어져, 2차 개혁 당시 남성에게 부여된 것과 동일한 참정권이 여성에게 부여되었다. 결과적으로 천금의 시대가 끝나갈 즈음에는 20세 이상 남녀의 대부분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 <big>'''• 여성운동</big>'''<br> 한국의 여성운동은 천금의 시대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태동했다. 물론 이전에도 찬양회나 여우회 등 초보적인 여성운동단체가 생겨났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해산됐었다. 하지만 천금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운동은 언론의 주목을 받을만큼 성장했고, 한국 사회에서 여러 욕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사회홯동을 하게 된 신여성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여성권리의 법제화를 요구하였고, 정치권은 이에 화답하였다. 천금의 시대 중 다양한 분야에서 시작된 양성평등의 제도화는 천금의 시대가 끝난 후인 1936년에 여성의 참정권이 남성과 같은 조건으로 보장되면서 법적 기본권 보장의 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완전한 평등이 달성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활발해져 여성기자, 여성작가, 여성의사 등 기존에는 남성만의 직업이라고 여겨졌돈 직업에 여성들이 조금씩 진출하기 시작했다. 다만 남녀학생의 교육과목 차이 등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일부 신여성들은 조직적 여성운동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 (개화)|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여성동우회 (개화)|대한여성동우회]]라는 이름의 여성단체를 만들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 성향으로, 반대파로부터 부르주아 여성운동이라고 불렸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여성교육 증진과 여성참정권 확대를 통해 여권을 향상시키려는 계몽주의적 성격을 보였다. 반면 대한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에 기반한 여성운동을 주창하는 급진파 성향의 여성운동단체였다. 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한인사회당과 협력해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투쟁을 통한 여성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우회의 이러한 반체제적 성향은 정부가 동우회를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게 하는 이유가 됐고, 규모가 작아 대표성이 떨어진다고 비판받던 애국부인회보다도 규모가 약소했던 동우회는 정부의 탄압에 세가 위축되다가 한인사회당 분당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황금기의 종말== ==현대의 인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20px|link=]] [[천금풍 (개화)|천금풍]]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여담== ==관련 문서== *[[대공황기 (개화)|대공황기]] *[[만주 출병 (개화)|만주 출병]] *[[천금풍 (개화)|천금풍]] ==각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개화 (원본 보기) 틀:개화 배너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인용문1 (원본 보기) 천금의 시대 (개화) 문서로 돌아갑니다.